1만2천명 합창, 1만3천명 군무... 어떻게 연습했지?

[해외리포트] '노래하는 혁명' 이룬 라트비아 '노래와 춤의 대전'

등록 2008.07.17 15:53수정 2008.07.17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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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2천 명의 합창, 라트비아 '노래 대전' 1만2천 명의 합창, 라트비아 '노래 대전' ⓒ 서진석

▲ 1만2천 명의 합창, 라트비아 '노래 대전' 1만2천 명의 합창, 라트비아 '노래 대전'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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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3천 명의 군무, 라트비아 '춤의 대전' 1만3천 명의 군무, 라트비아 '춤의 대전' ⓒ 서진석

▲ 1만3천 명의 군무, 라트비아 '춤의 대전' 1만3천 명의 군무, 라트비아 '춤의 대전' ⓒ 서진석

여전히 백야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2008년 7월, 라트비아는 다시 마법에 걸렸다. 밤 9시가 넘도록 하늘은 여전히 푸른빛을 가득 머금고 있고, 수도 리가의 거리는 형형색색 민속의상을 입은 사람들로 물결쳤다. 일주일 내내 온 나라는 춤사위와 노랫가락으로 덮였다.

 

5년마다 찾아오는 이 황홀한 마법에 라트비아 사람들은 올해도 중독됐다. 이 마법에 취한 이들은 12일 저녁 리가 시내의 메자파륵스 공원에 모두 모였다.

 

그 곳에 모인 이들은 입을 모아 거대한 합창을 이루어냈고, 라트비아 최대 경기장인 다우가바 경기장에서도 지상 최대의 춤판을 벌였다. 이들이 걸린 마법은, 유네스코에서도 세계무형유산으로 등록을 시켜놓았을 정도로 강력하다.

 

5년에 한 번씩 라트비아는 마법에 걸린다

 

이 신비로운 행사는 올해 7월 5일부터 12일까지 성대하게 열린 '라트비아 노래와 춤의 대전'이다.

 

'노래와 춤의 대전'은 다른 민족의 지배 아래 신음하던 발트인들이 자유와 독립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던 1869년 에스토니아 타르투에서 최초로 열린 후 발트 3국 전역으로 확대됐다. 평균 2만명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합창단 공연과 북한의 아리랑 축전을 연상시킬 정도로 거대한 매스게임으로 상징되는, 발트 지역에서 가장 대표적인 문화 행사다.

 

에스토니아보다 4년 늦은 1873년에 라트비아에서 행사가 열렸고, 1924년에는 리투아니아에서도 열렸다. 그 후 리투아니아에서는 4년, 다른 나라에서는 5년에 한 번씩 이런 대규모 축제가 열리고 있다. 사정에 따라 다른 해로 연기된 적도 있지만, 행사 자체가 취소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렇게 라트비아에서는 올해까지 24번의 '노래 대전'이 열렸다. 또한 1883년 라트비아 민속춤을 바탕으로 한 매스게임이 진행되는 '춤의 대전'이 합류하면서, '노래 대전'과 '춤의 대전'은 함께 열리고 있다. 한 마디로 전통 문화와 예술을 바탕으로 하는 대형 이벤트가 1주일 내내 리가에서 계속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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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대전' 지휘자와 합창단. ⓒ 서진석

'노래 대전' 지휘자와 합창단.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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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삽니다.' 입장권은 이미 여러 달 전에 동났지만, 현장 구매의 희망을 안고 팻말을 들고 서 있는 젊은 여성. ⓒ 서진석

'표 삽니다.' 입장권은 이미 여러 달 전에 동났지만, 현장 구매의 희망을 안고 팻말을 들고 서 있는 젊은 여성. ⓒ 서진석

발트 3국과 인연을 맺고 살아온 지난 10년 동안, 나는 '노래 대전'을 리투아니아에서 두 번, 에스토니아에서 한 번 관람했다. 

 

약 2만 명이 만들어내는 대합창을 감상하면서, 솔직히 기자는 합창단원들이 직접 내는 소리가 아니라 이전에 국립합창단이 녹음한 것을 대형 스피커로 틀어놓고 다들 립싱크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무대 뒤쪽 어딘가에 별도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 연습하는 것은, 생계를 포기하고 5년 동안 노래 연습에만 매달리지 않는 한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북한이라면 모를까.

 

올해 라트비아에서 열린 행사를 어렵사리 취재할 수 있었다. 올해 초 전 일정이 확정되고 입장권 판매가 시작되자, 모든 표가 한 시간 만에 매진됐기 때문이다.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의 원성이 높아졌고, 5000원 정도 하는 표를 무려 50만원 정도에 파는 암표가 인터넷에서 기승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행사 조직위원회의 도움으로 기자출입증을 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처음으로 라트비아 행사를 보게 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합창단 근처까지 다가가 그들의 목소리를 가까이에서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기자의 귀에 들리던 그 어마어마한 합창 소리가 이전에 녹음된 소리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는, 아주 당연하지만 믿기 어려웠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래하는 혁명... "라트비아인들에게 노래는 영혼이다"

 

기자는 그 자리에서 바이라 비체-프레이베르가 전 라트비아 대통령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반기문씨가 유엔 사무총장에 출마했을 때, 유일한 여성이자 동유럽 출신 후보로 출마해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됐던 바로 그 사람이다.

 

바이라 전 대통령은 예전에 캐나다에 거주할 때 라트비아를 비롯한 발트 지역의 민속을 연구한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라트비아인들의 민속 문화를 대표하는 이 행사는 바이라 전 대통령에게도 의미가 깊다. 바이라 전 대통령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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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 비체-프레이베르가 라트비아 전 대통령. ⓒ 서진석

바이라 비체-프레이베르가 라트비아 전 대통령. ⓒ 서진석

- 라트비아인들에게 노래는 어떤 의미인가.

"라트비아인들에게 노래는 영혼과도 같다. 라트비아인들은 노래를 통해서 민족의 영혼과 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조상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노래를 통해서 국토와 역사와 동질감을 회복한다."

 

이번 행사 홍보를 담당한 아이바 로젠베르가씨의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다.

 

"독립을 갈구하던 라트비아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한 것도 역시 노래다. 수십만 명이 모이는 이 행사는 전 세계에 라트비아인들의 처지를 알리는 중요한 도구였고, 그렇게 자유를 향한 우리의 길은 언제나 비폭력적이었다. 우리의 독립 투쟁이 '노래하는 혁명'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그 때문이다."

 

서슬 퍼런 소련의 압제 아래서도 '노래 대전'은 꾸준히 그 명목을 유지했다. 당시에는 연주할 곡목에 대한 규제도 심했고, 전부 러시아어로만 불러야 했으며, 소련을 찬양하는 노래만 허락되었다.

 

라트비아인들에게 민요란 국토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방법이었고, 영광스러운 과거를 이야기해주는 라트비아 작곡가들의 노래는 억눌린 감정을 발산하고 자유를 향한 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소련 정부는 '노래 대전' 행사를 우려섞인 시선으로 주시했고, 만약에 대비해 합창무대 양쪽에 행사 내내 탱크를 대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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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단. ⓒ 서진석

합창단. ⓒ 서진석

수만 명이 연출하는 장관... 어떻게 연습했을까

 

이 행사에는 모두 400만 라트(약 92억원)라는 돈이 들어갔다. 그중 4분의 1은 라트비아 크라이방카 은행과 라트비아이동통신, 그리고 라트비아 최대 맥주회사인 알다리스에서 후원했다. 나머지는 정부 및 일부 지방 자치단체에서 지원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무용단과 합창단. 과연 그들은 연습을 어떻게 하는 것일까.

 

우선 알아둬야 할 것은 합창이건 매스게임이건 모두 전문가가 아닌 아마추어로 구성돼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트비아 전국에 성·직장·학교·지역·나이 등 여러 층으로 묶인 전통 무용 공연단 및 민요 합창단이 수백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트비아 사람들은 대개 한두 개 단체에 소속되어 전통예술과 꾸준히 만남을 이어간다. 이들은 평소에는 직장에 나가지만, 5년 동안 1주일에 두 번 정도 축제에서 공연할 레퍼토리를 익히기 위해 자기가 속한 단체에서 꾸준히 연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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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1일 매스게임이 펼쳐진 다우가바 경기장 모습. 무대 위에서 형상화한 것은 라트비아의 전통 문양이다. 뒤쪽에는 라트비아 농가 형태 문양이 있다. ⓒ 서진석

7월 11일 매스게임이 펼쳐진 다우가바 경기장 모습. 무대 위에서 형상화한 것은 라트비아의 전통 문양이다. 뒤쪽에는 라트비아 농가 형태 문양이 있다.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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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게임에 참가한 단원들의 다양한 몸짓. ⓒ 서진석

매스게임에 참가한 단원들의 다양한 몸짓.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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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게임에 참가한 단원들의 다양한 몸짓. ⓒ 서진석

매스게임에 참가한 단원들의 다양한 몸짓. ⓒ 서진석

하지만 축제 참여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전통춤과 노래를 연마하는 습관은 라트비아인들의 일상에 깊이 뿌리 내려 있다. 그러한 라트비아인들이 이 행사 참가에 아주 열정적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규모 축제는 5년에 한 번씩 열리지만 지역별·연령별로 다양한 소규모 '노래 대전'은 수시로 열린다.  축제 시작 1년 전부터는 전국적으로 공식 참가자를 뽑는 선발대회가 열리는데, 대회는 무려 6개월 동안 계속된다. 이러한 방식이 참가자들의 기량을 높이는 데 아주 중요하다고 홍보 담당관은 전했다.

 

행사장에서 만난, 라트비아 북부의 굴베네에서 참석한 할머니들은 매스게임에만 이미 여러 차례 참가한 경력을 자랑하는 베테랑들이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도시 노인이 주축을 이루는 무용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연습은 평상시에 지역단체에서 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본 행사 때는 단체마다 서야 할 자리 및 동선이 경기장 바닥에 전부 표시돼 있어 그대로 따라 하면 된다"고 전했다.

 

즉 총연습을 오랫동안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1만3000명이 참석한 올해의 매스게임 총연습 기간이 불과 1주일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1만2천명의 합창, 1만3천명의 무용... 상상이 되는가

 

올해의 대합창에는 1만2천명의 단원이 참여했다. 일반적으로 합창 공연 이틀 전부터 사람들이 전부 모여 연습하는데, 올해는 그러한 연습도 전혀 없었다. 이번 공연에서 불린 노래들이 행사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노래들이었기 때문이다.

 

합창단원들은 물론 관중도 전부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이었기 때문에, 공연 현장에서는 관중도 자연스럽게 합창단의 일부가 됐다. 그래서일까. 저녁에 시작된 대합창은 하루를 넘겨 다음날 새벽 5시, 해가 뜰 무렵까지 이어졌다.

 

8개의 성부로 구성된 1만2천명의 단원들이 다양한 레퍼토리의 노래를 무반주로 소화하고, 민속의상을 입은 1만3천명이 넘는 무용수들이 복잡한 전통 문양을 무대에 연출하는 모습. 여러분은 상상이 되는가. 그러나 이것은 라트비아 리가에서 현실이다. 그것도 10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네스코는 발트인들이 수백년 동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지켜낸 전통의 힘과 행사의 문화예술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 3국의 '노래 대전' 행사를 2003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아울러 '노래 대전'은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하는 합창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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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게임? 우린 베테랑이야.' 굴베네에서 참가한 할머니들. ⓒ 서진석

'매스게임? 우린 베테랑이야.' 굴베네에서 참가한 할머니들.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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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일, '노래 대전' 대합창이 열린 메자파륵스 공원 특설무대. 놀라지 마시라. 이 많은 사람들은 관객이 아닌 합창단이다. ⓒ 서진석

7월 12일, '노래 대전' 대합창이 열린 메자파륵스 공원 특설무대. 놀라지 마시라. 이 많은 사람들은 관객이 아닌 합창단이다. ⓒ 서진석

무혈혁명이 가능했던 이유

 

19세기 독일 학자 횝커는 발트 지역의 민요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후 이렇게 평가했다.

 

"이 민족이 내 관심을 끄는 이유는 그런 어려운 조건에 처해 있으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영혼의 평안을 누리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은 보통 사람들의 정신을 무디게 하거나 자민족 숭상주의, 잔인함, 도발적 행동, 교활함, 지배자들에 대한 반감 등을 양산하기 쉽다. 그렇지만 이 곳에서는 아주 특이한 현상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그런 행동을 하는 대신)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른다. 이것은 언제나 선(善)과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심지어 한탄을 노래하는 가운데서도 분노나 출혈로 변화하는 일은 전혀 없다."

 

라트비아를 비롯한 발트 3국의 역사는 유럽의 전쟁사와 딱 들어맞을 만큼 혹독했다. 또한 이들의 근현대사는 소련이라는 거대 제국을 상대로 한 투쟁과 승리의 역사였다.

 

이 전쟁은 모두 테러나 폭력 사태 없이 평온하고 평화롭게 진행됐다. 그들은 '노래하는 혁명'을 통해 독립을 이뤘으며, 그 독립은 냉전 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그들은 자유로운 조국을 얻었지만, 100년 넘게 이어진 '노래 대전'의 전통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도 5년에 한 번씩 조국의 가치와 의미를 알려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이런 뜻 깊고 어마어마한 볼거리를 보려면, 다시 5년을 기다려야 할까?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2009년에는 이웃나라 리투아니아에서 이 축제가 다시 성대하게 열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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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 지휘자. ⓒ 서진석

합창 지휘자. ⓒ 서진석
2008.07.17 15:53 ⓒ 2008 OhmyNews
#노래대전 #노래하는 혁명 #발트3국 #합창 #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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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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