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 일부 의원들, 우리 경고 믿지 않았다"

[인터뷰] 한나라당 '비밀병기' 여의도연구소 권택용 여론조사팀장

등록 2008.04.16 10:29수정 2008.04.16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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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기계회관 신관에 자리한 여의도 연구소에서 한 직원이 전화통화를 하며 출입문을 나서고 있다. ⓒ 유성호



최대 178~184석

18대 총선일이었던 지난 9일 저녁 6시. KBS·MBC·SBS·YTN 방송 4사가 일제히 발표한 출구조사 결과다. 한나라당이 국회 모든 상임위에서 과반을 차지할 수 있다는 '꿈의 의석' 157석을 훨씬 웃도는 수치였다. 특히 YTN과 SBS는 한나라당이 적어도 160석 이상은 확보하리라고 전망했다.

"저렇게 나왔다가 나중에 뒤집히면 제일 곤란하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 여의도 당사에서 개표방송을 지켜보던 강재섭 대표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당직자들은 기쁨에 손뼉을 쳤지만, 그의 표정은 담담할 뿐이었다. 주위에선 고개를 갸우뚱했다. '강 대표 표정이 왜 밝지 않을까.'

선거 날 강재섭 대표에 "지역구 확보 가능 의석 136석"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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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택용 여의도연구소 여론조사팀장 ⓒ 유성호


"절대 우세 지역과 경합 우세 지역을 합해 지역구에서 예상 확보 의석은 136석."


강 대표가 '김칫국'부터 마시지 않은 배경엔 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여연) 여론조사팀의 보고가 있었다. 여론조사팀은 선거 날 정진섭 대표비서실장을 통해 강 대표에게 이런 보고를 올린 것이다.

개표 결과, 전체 지역구 245곳 중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된 지역은 131석(비례대표 22석을 포함하면 한나라당이 총선에서 확보한 의석수는 153석임). '과반 턱걸이'였다. 여연의 예측치가 방송사들의 출구조사 결과보다 더 정확했던 것이다. 개표방송을 보면서 강 대표가 이상하리만큼 신중한 태도를 보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여연 여론조사팀은 당내에서 '비밀병기'로 통한다. 선거 때마다 면밀한 판세분석으로 당이 선거전략을 잡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선거 중반부터 한나라당이 안정 과반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는 보도들이 나오기 시작했지요. 우리는 언론이 '오버'하는 게 아닌가 했어요."

15일 만난 권택용 여연 여론조사팀장은 선거 초반부터 한나라당의 압승을 예견한 언론사들의 보도를 꼬집었다. 선거 날 방송사들의 출구조사 발표 때도 권 팀장을 포함해 4명의 여론조사팀 구성원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고 한다.

"선거 초반엔 우리에게 (여론) 상황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어요. 조사를 후보등록일(3월 25~26일) 이전에 1차 여론조사를 했는데, 결과가 별로더라구요. 당 지도부에 과반수 확보가 어려울 수 있다는 보고를 계속 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일산 초등생 납치사건으로 일산경찰서를 방문한 이후부터 분위기가 나아졌어요. 그래서 그때 '아, 과반은 넘겠구나'하는 짐작을 했지요."

일부 낙선 우려 후보들에 경고... "조사 결과 믿을 수 없다" 항의 받기도

여연 여론조사팀은 이번 선거기간 동안 전 지역구(호남 제외)를 상대로 두 번의 여론조사를 했다. '경합' 지역 100여곳은 추가로 3차까지 조사를 돌렸다. 이번 총선 결과에 대해 어떤 언론보다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었던 비밀은 여기에 있다. 같은 지역구를 세 번 이상씩 조사해 여론의 흐름, 즉 트렌드를 읽어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같은 경합지역이라도 상승세를 타고 있는 곳과 하락세인 지역은 예측이 정반대다. 여론의 추이를 볼 때 상승세라면 당선될 확률이 높고 하락세라면 반대일 가능성이 크다. 권 팀장은 "언론사들도 전체 지역구에 대해 몇 차례에 걸쳐 조사를 해 결과를 발표했다면 이렇게 빗나가진 않았을 것"이라며 "여론조사의 핵심은 결국 트렌드를 읽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에 가장 큰 충격은 이른바 '친이' 핵심들의 낙선이었다. 이재오·이방호·정종복·박형준·김희정 의원 등이다. 선거기간 동안 여연에서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 보고서는 모든 지역구 후보들에게도 전달되는데, 낙선이 우려되는 후보들에게는 일종의 '위험 경고'를 전했다.

권 팀장은 "일부 후보 측에서는 '왜 여연 조사결과만 우리 지지율이 낮게 나오느냐'고 도리어 항의를 하는 일도 있었다"며 "신뢰도를 의심받는 말을 들을 때 가장 힘들다"고 토로했다.

여연 여론조사팀은 이번 총선 후보 공천심사 때는 후보 지지도 조사에서 배제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일부 공천심사위원들이 여연 소장이 '친박' 성향의 서병수 의원이라는 점을 들어 여연을 제외시키자고 강력히 주장했다는 뒷말이 흘러나왔다. 박근혜 전 대표는 당시 "공천 과정에서 여연이 배제됐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비판한 바 있다.

권 팀장은 "공천심사 과정에서 여연의 조사가 제외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으로 안다"며 "로데이터(Raw data·원자료)가 확실히 있는데 조사결과를 조작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불쾌감을 내비쳤다.

"전화면접보다 ARS가 정확도 떨어진다? 동의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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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택용 여의도연구소 여론조사팀장이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에 자리한 여의도 연구소에서 여론조사 자동응답(ARS) 단말기를 살펴보고 있다. ⓒ 유성호



여연 여론조사팀의 조사방식이 자동응답(ARS)이라는 점도 자주 도마 위에 오른다. 정확도가 떨어지는 방법 아니냐는 것이다. 팀원들은 이런 주장에 대해 "여론조사의 기본을 모르는 소리"라고 반박한다.

팀원인 김철희 부국장은 "대부분의 여론조사기관에서 쓰는 전화면접 방식이 ARS보다 오차가 더 클 확률이 높다"며 "면접원의 숙련도나 어조가 모두 같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반면, ARS는 사회과학 실험의 기본인 '동일한 실험환경' 아래서 문답이 이뤄진다.

또한, 전화면접은 사전에 추출된 표본만을 대상으로 조사하지만, ARS는 응답할 의사가 있는 경우만 설문에 답하기 때문에 표심을 더 정확히 반영한다는 장점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대구 달서갑의 총선 결과다.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는 홍지만 한나라당 후보가 앞섰다. 그러나 결과는 박종근 친박연대 당선자의 승리였다. 이런 결과를 예측한 곳이 바로 ARS 방식을 이용했던 일부 언론사와 여연 여론조사팀이었다.  

'박근혜 영천대첩' 때도 한몫

여연은 당 지도부에 '보수적인' 보고서를 올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심지어 '너희는 도대체 어느 당 사람들이냐'는 비난을 받을 때도 있다. 권 팀장은 "안에서 바깥의 시선으로 냉철히 여론을 지켜보기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지도부가 듣기 좋을 소리만 하는 건 여론조사 전문가로서도, 당직자로서도 도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여연의 '직언'이 빛을 발한 때가 있었다. 바로 지난 2005년 10·26 재보선에서의 '영천 대첩'이다. 당시 대표였던 박근혜 의원의 선거전략은 '영천 올인'이었다. 웬만하면 잠자리를 바꾸지 않는다는 박 전 대표가 영천에서 민박까지 해가며 후보였던 정희수 의원을 지원했다. 박 전 대표의 '몰아주기 유세'로 영천 판세는 바뀌기 시작했고 결국 정 의원은 당선됐다.

권 팀장은 "선거 초반 자체 조사를 해보니 우리 후보(정희수 의원)가 상대 후보에게 16%P 차이로 지고 있었다"며 "초반에는 절대 낙관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떠올렸다. 그러나 조사를 거듭할수록 후보 간 격차가 조금씩 좁혀지는 흐름이 보였다고 한다. 권 팀장은 "영천만 다섯 번 지지율 조사를 했는데 우리 후보가 조금씩 상승세를 타더라"며 "16%→12%→8%로 격차가 좁혀지는 추세였다"고 말했다.

이런 조사를 바탕으로 여론조사팀은 사무총장이었던 김무성 의원을 통해 박 전 대표에게 이런 보고를 했다. "영천을 집중 지원한다면 뒤집을 수 있습니다." 박 전 대표는 여연의 이런 조사 결과를 믿었고, 결국 영천에 '올인'해 승리를 이끌어낸 것이다.

민정당 시절 사개연이 뿌리... 정당 자체 여론조사팀으로는 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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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택용 여의도연구소 여론조사팀장 ⓒ 유성호


여연 여론조사팀에게는 '정당 최초'란 자부심이 훈장이나 다름없다. 팀의 뿌리는 80년대 민정당 시절 사회개발연구소(사개연)다. 여론조사 전문가로 잘 알려진 김행·김덕영 등이 사개연 출신이다. 권 팀장은 "당시로서는 정당 산하 연구소 중 정치 여론조사를 한 곳은 사개연이 처음이었다"며 "오랜 역사를 거치며 선배들이 축적하고 전수한 노하우가 우리의 숨겨진 힘"이라고 귀띔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팀은 사개연 시절에 비해 규모가 4분의 1로 줄었다. 97년 대선 패배로 당에 몰아친 구조조정 바람 때문이다. 독립된 연구소였던 사개연은 이때 여의도연구소 산하의 여론조사팀으로 흡수·통합됐다. 권 팀장은 "사개연 시절만 해도 소장·부소장·실장 등 전체 인원이 15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나를 포함해 4명뿐"이라며 "당시에는 조사 방식도 전화면접과 ARS 두 가지를 실시해 비교·분석해 보고서를 냈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

권 팀장은 "당이 우리 팀에 더 많은 인력과 예산을 투자해 많이 활용했으면 좋겠다. 정치 마케팅 등 업무 분야를 넓힌다면 당협위원장들의 활동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바람을 밝혔다.

"여론조사가 '절대값'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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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연구소 여론조사팀의 김영숙 부장, 권택용 팀장(부국장), 박혜선 인턴, 신정자 부장(왼쪽부터). ⓒ 유성호



권 팀장을 비롯한 팀원들은 자금 반년 만에 휴식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대선후보 경선 때부터 쉬지 않고 '풀가동'돼온 터다. 이 과정에서 김영숙·신정자 부장은 병원 신세까지 졌다.

집이 경기도 화성인 권 팀장은 아예 아내에게 "집에 들어가지 못하니 이해해달라"고 선언한 뒤 야근을 밥 먹듯 해왔다. 민감한 여론조사를 할 때에는 아예 휴대전화도 꺼놓고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채 살았다. 여론조사팀 방도 철저히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권 팀장은 "지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받고 지레 '졌구나'라며 자포자기하는 후보들을 볼 때 가장 가슴이 아팠다"며 "여론조사 수치는 선거전략에 활용할 참고자료일 뿐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지고 있다면 더 힘을 쏟으면 되는 일이다. 여론조사 10~20%P 차이는 인간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 가능하다"며 여론조사 맹신 풍조가 점점 강해지는 한국의 선거문화에 일침을 놨다.

여론조사팀의 바람은 한 가지 더 있다. 호남지역도 끝까지 판세분석을 해봤으면 하는 것이다. 아직도 맹위를 떨치는 지역주의 탓이다.

김철희 부국장은 "이번 총선 때 전국 모든 지역구를 대상으로 두 번, 경합 중인 곳은 세 번의 조사를 했지만, 호남은 1차밖에 하지 못했다.(초반부터 다른 당 후보들이 너무 우세해) 더 조사를 하는 게 의미 없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김 부국장은 "다음 총선 때는 호남도 끝까지 조사하게 되길 바란다"며 고질적인 지역구도 청산의 바람을 전했다.
#18대총선 #한나라당여의도연구소 #여론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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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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