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비결 할아버지와 셋째 누님

순수했던 그 시절, 혼담 궁금해 하는 총각처녀의 마음 달래줘

등록 2008.01.11 10:09수정 2008.01.1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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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람막이가 되어주던 정미소 창고가 헐려 골목이 허전해졌습니다. 토정비결 할아버지는 해마다 골목 어귀 구루마가 있는 자리에 자리를 펴고 이듬해 봄까지 손님을 받았지요. ⓒ 조종안

마람막이가 되어주던 정미소 창고가 헐려 골목이 허전해졌습니다. 토정비결 할아버지는 해마다 골목 어귀 구루마가 있는 자리에 자리를 펴고 이듬해 봄까지 손님을 받았지요. ⓒ 조종안

 

제가 8살 때로 기억합니다. 겨울의 시작이라는 입동(立冬)이 지나면 어김없이 우리 동네를 찾아오시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았으니, 큰 병에 걸리든가 아니면 돌아가시던 해까지 오셨던 것 같습니다.

 

집에서 한 마장도 안 되는 거리에 재래시장이 있어, 골목 앞 신작로는 평일에도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습니다. 매일 장이 서고 많은 사람들이 왕래했기 때문에 골목 어귀는 항상 잡상인들로 붐볐습니다. 그 중 한 분이 관상과 궁합, 토정비결을 봐주는 할아버지였습니다. 콧수염 옆에 깜찍하게 생긴 검은 사마귀 때문에 기억이 더욱 생생합니다. 

 

입동이 지나면 어김없이 나타난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정미소 창고 앞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이듬해 봄까지 손님을 받았습니다. 출근을 하시면 고이 접은 부처님 그림을 보자기에서 꺼내 창고 벽에 걸었습니다. 길거리 철학관? 간판이었지요. 부처의 얼굴에 적힌 뜻을 알 수 없는 글들과 점이 찍혀있는 벽보를 자세히 보려고 도와드린 적도 있습니다. 토정비결과 한문으로 된 고서들, 그리고 이상한 사람들과 동물이 그려있는 그림책을 사과상자 위에 쌓아놓고 손님을 기다렸습니다.

 

타고날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던 저는 벽에 걸린 부처가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했고, 운수를 보러온 사람들과 할아버지의 대화를 엿듣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콧등에 걸친 돋보기 너머로 바라보시던, 조금은 익살스럽게 느껴졌던 할아버지 표정이 지금도 눈앞에 그려집니다.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삼한사온이 확실했습니다. 동장군이 몰아치다가도 며칠은 따뜻한 날이 이어졌으니까요. 지금도, 을씨년스럽던 날에 따뜻한 햇볕이 쬐기라도 하면 골목 어귀에 앉아있던 초췌한 모습의 할아버지가 시나브로 떠오릅니다. 차가운 바람을 피하느라 움츠린 고개의 목주름과 이마의 굵은 주름, 콧수염 옆의 사마귀가 더욱 눈길을 끌었으니까요. 군용 담요를 염색해 만든 코트의 넓은 깃으로 얼굴을 가리고 앉아 있는 남루한 옷차림은 가난 그 자체였습니다.

 

하루는 비석치기를 하고 있는데 아홉 살 위인 셋째 누님이 저를 부르더군요. 누구 명이라고 거역하겠습니까. 짜증은 났지만 이내 달려갔지요. 누님은 10환짜리 두 장과 접은 종이쪽지를 주며 아무도 모르게 할아버지에게 갖다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저는 이게 무엇이냐고 묻다 혼나기만 했지요. 할아버지에게 주면 무엇인가 줄 터이니,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서 받아오라며 재차 당부했습니다.

 

완고하고 엄한 부모 밑에서 나들이는커녕 문밖출입조차 자유롭게 하지 못하며 14살 때부터 부엌에서 일을 하며 신부 수업을 받아야 했던 셋째 누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한 생각이 앞섭니다. 중학교에 진학도 못하고, 사춘기 시절부터 갇혀 살다시피 했으니 바깥세상의 물정과 일 년 신수가 무척 궁금했을 것입니다. 연애는 꿈도 꾸지 못하고 방에서 어른들이 하는 혼담을 부엌에서 훔쳐듣는 처지였으니, 언제 누구에게 시집을 가게 될지 가슴이 얼마나 설렜을까요. 당시 누님의 심정을 상상해봅니다.

 

몰래 10환짜리 두 장과 접은 종이쪽지 건넨 셋째 누님

 

비록 꼬마손님이지만 점쟁이 할아버지는 반갑게 대했습니다. 남대문이 그려진 10환짜리 두 장을 건네면 담배쌈지를 넣는 조끼주머니에 꾸겨 넣습니다. 그러고는 밭은기침을 몇 번 하신 뒤 “어디~보자” 하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몽당연필에 침을 발라가며 산수시험 보는 학생처럼 더하기와 뺄셈을 열심히 하십니다. 계산이 끝나면 배시시 웃으며 토정비결 책을 뒤적이다 한쪽을 떼어주면서 더 해줄 얘기가 있는지 돋보기 너머로 힐끗 쳐다보며 묻습니다.

 

“누구냐?”

“누님인디요..”

“누님이라.. 음~ 무술년(戊戌年) 신수가 좋아서, 내년 봄에는 존 소식이 있을 것 같은디…. 기왕이믄 금성(金姓)이나 목성(木姓)을 가찹게 허야 좋다고 전혀라. 서북방(西北方)쪽은 위험허니께 멀리 나가지 말라고 이르고. 그리고 먼 거리를 여행헐 때는 몸을 조심허야 헌다고 전혀라. 알었찌!”

“예.”

 

‘무술년’과 ‘금성’, ‘목성’의 뜻은커녕 ‘서북방’이 어느 쪽인지도 모르는 철부지였지만, 누님이 토정비결을 받으면 좋아할 것이라는 눈치는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적어준 쪽지와 토정비결 그리고 당부를 전하는 마음이 즐거웠으니까요.

 

훗날 알게 되었지만 집에서 서북방은 서해바다라서 나가지도 못 하겠더라고요. 그리고 그 정도의 점괘는 충고나 다름없는데도 누님은 꽤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셋째 누님은 점쟁이 할아버지 점괘 대로 그 다음해인 기해년(己亥年)에 부모가 정해주는 낭군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웃음이 절로 나오는 얘기죠.

 

지금의 60대 이상 여성들은 토정비결 하나 자유롭게 보러 나가지 못할 정도로 닫힌 공간에서 꿈많은 소녀시절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형제들이 모이면, 무릎 위로 올라오는 치마를 입고 집에 놀러오다, 어머니에게 들켜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도망치던 사촌누나를 얘기하며 웃습니다. 두꺼비가 구멍 난 항아리를 막아준다는 콩쥐팥쥐 이야기를 들으며 슬퍼하고 기뻐했을 정도로 순진하고 순수했던 시절이었다고 할까요.

 

순진하고 순수했던 그 시절

 

50년대만 해도 처녀들은 스무 살을 넘기기 전에 결혼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한다거나 유학을 가는 특이한 경우에도, 스무 살을 넘기면 노처녀로 취급당했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당시 눈치 빠른 점쟁이들은 생일 생시가 적힌 쪽지를 보고 혼기에 접어든 총각이나 처녀들의 토정비결은 내용에 혼담 얘기가 적힌 쪽을 골라주셨던 것 같습니다.

 

이젠 셋째 누님도 며느리가 둘이고 살갑게 대하는 사위도 보았고 손자손녀가 일곱에, 칠순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됐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전자회사의 부장이 된 큰아들을 둔 성공한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5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누님들과 어울리면 꼬집힘을 당하던 옛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웁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면 토정비결 심부름을 하던 얘기도 나오는데, 셋째 누님의 겸연쩍어 하는 표정에서 처녀시절의 순수함과 수줍음이 아직도 남아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인지 누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야는~ 내가 언제 그런 심부름시켰다고 그런댜···”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보이(http://www.newsboy.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01.11 10:09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뉴스보이(http://www.newsboy.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토정비결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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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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