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이 무령왕릉에 묻히기 전에 머무른 곳

웅진 도읍시기 백제의 제사유적, 공주 정지산 유적

등록 2007.08.30 20:50수정 2007.08.30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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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산유적 복원 모형. 정지산유적의 건물지는 이처럼 기와가 올라가 있는 격이 높은 건물이다. 그러나 초석을 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영구적인 목적으로 만들지 않았다고 본다. ⓒ 송영대, 백제역사문화원 복원 모형

대학교가 충남 부여이다 보니 자연 백제문화권의 여러 유적을 답사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답사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는 기자가 자주 가는 곳 중 한 곳이다.

워낙 공주의 유적을 자주 보러 다니다 보니 이젠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국립공주박물관까지 걸어갈 정도인데, 사실 코스가 그쪽으로 해서 모두 문화재가 있다 보니 한번쯤 그렇게 가는 것도 괜찮다.

버스터미널에서 금강 쪽을 바라보면 산이 하나 보이는데, 그곳에 있는 성이 바로 공산성이다. 공산성은 웅진백제 시절 도성이라고 할 수 있고, 공산성 앞으로 조금 걸어나가면 무령왕릉을 모델로 한 개선문 같은 문을 만들어 놓았다. 그 아래로 차가 지나가는데, 조금만 더 가면 황새바위라는 곳이 있다.

이 황새바위는 천주교 성지로서 조선 후기 천주교도들이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던 현장이다. 그쪽으로 다시 계속 올라가면 송산리고분군이 있는데, 그 안에 무령왕릉이 있다. 송산리고분군은 웅진백제시대의 대표적인 고분군으로 왕릉들이 있다.

그 아래로 내려가면 포정사가 있는데, 포정사는 조선시대 충청감영의 건물들이 있는 곳으로서 문루와 동헌, 그리고 선화당이 있다. 포정사의 뒤쪽에는 바로 국립공주박물관이 있다.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과 공주 및 충남지역의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곳으로서 국립부여박물관과 함께 백제를 대표하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코스가 있는데, 이 중에서도 하나를 덧붙이자면 정지산 유적이라는 곳이 있다. 정지산 유적은 백제의 제사유적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사실 기자도 그동안 공주는 여럿 갔었고, 정지산 유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잘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그 현장에 간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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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산유적 전경. 항공사진을 찍은 것으로서 정지산유적의 모든 모습이 한 눈에 보인다. 건물지의 배치 및 발굴 당시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 문화재청

정지산 유적에 가게 된 계기도 사실 우연이라고 하겠다. 지금으로부터 한 2달 전쯤에 후배 2명과 함께 공주를 찾았었다. 공주의 여러 유적을 보여주고 부족한 실력이지만, 선배로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따라 비가 내려서 답사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우선 국립공주박물관으로 갔고, 그곳에서 유물들을 살펴보았다. 유물을 살펴보려고 전시관 내로 들어서자 자원봉사자 아주머니께서 반갑게 맞아주시며 가이드를 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처음엔 어차피 후배들에게 간단하게 알려주러 왔고, 또 나도 약간의 상식이 있어 유물을 살펴보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분도 '그냥 편하게 이야기하는 식으로서 유물을 같이 살펴보자'라는 식으로 하자고 하여, 결국 같이 3시간 동안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같이 유물을 보면서 서로 의견을 말하면서 관람을 하다가 우연히 정지산 유적에 대한 말이 나왔다. 정지산 유적의 존재에 대해서는 기자도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게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르던 상황이었다. 대충 발굴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어서 약간의 짐작만 할 뿐이었는데, 문득 그 자원봉사자 분께서 위치를 안다고 하였다. 다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도 조금 힘들었다.

우리는 송산리고분군으로 갔고, 그곳에서 관람을 한 후 잠시 고민에 빠졌다. 비가 오다 보니 날씨도 추적추적 해서 솔직히 숲 속을 헤쳐나가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도 후배들은 예전부터 책에서나 보았던 유적을 갈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고, 선배 된 입장에서도 그러한 후배들의 심정을 마냥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결국 우리는 숲을 헤쳐나가기로 하였다. 작은길이 있긴 하였으나 군데군데 묘지 쪽으로 빠지기도 하고 여러 갈래의 길이 있어 잘못 들어서기도 하였다. 한참을 걸어나가도 유적지라고 볼만 한 곳은 보이지 않고, 그런다고 정확한 위치를 아는 것도 아니라 솔직히 당황스럽기도 하였다.

약간의 공간이 있어 그곳이 정지산 유적이 아닌가란 추측을 하기도 하였다. 정지산은 생각보다도 높은 산이 아니기에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곳에서 보이는 것은 잘잘한 조선시대 후기나 일제 강점기 때의 것으로 보이는 옹기파편 정도여서 그냥 경작하지 않는 밭 정도로만 생각되었다. 그리고 한 곳은 나무들이 빼곡히 있어 발굴한 지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고, 발굴현장을 그런 식으로 보존하는 경우는 없다는 생각에 유적이 아니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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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산유적. 이곳은 무령왕이 무령왕릉에 묻히기 전에 안치되었던 곳으로서 백제의 대표적인 제사유적 중 한 곳이다.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지방유형문화재에서 사적으로 작년에 승격되었다.(사적 474호) ⓒ 송영대

그렇게 한참 헤매다가 결국 정지산 유적(艇止山遺蹟)을 찾게 되었다. 정지산 유적이 바로 터널을 뚫다가 발견된 것임을 착안한 결과였다. 찻길 쪽으로 가면 무엇인가 있으리라 생각하였고, 숲을 헤쳐나가 찻길 쪽으로 가니 과연 넓은 공간과 안내표지판이 있었다. 드디어 정지산 유적을 찾은 것이다.

정지산 유적은 백제의 유명한 제사유적이다. 백제의 대표적인 제사유적을 뽑으라고 한다면 이 공주 정지산 유적과 부안 죽막동 유적이 있다. 부안 죽막동 유적은 3세기 후반부터 쓰였다가 백제가 멸망한 이후 그 생명을 다하게 된다. 반면 정지산 유적은 생각보다 오래 쓰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지산 유적은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던 시설과 함께 집 자리가 발견되었다. 시설물은 이미 있었던 가옥을 모두 철거한 뒤 능선을 깎아내어 넓고 평탄한 대지에 만들었다. 물론 지금은 그 제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를 자세히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단순한 벌판으로만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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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산유적에서 바라본 금강과 공산성. 가운데에 흐르는 강이 금강이고, 그 옆에 있는 산이 바로 공산성이다. 이처럼 정지산유적은 조망이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 송영대

그런데 이 정지산 유적은 전망이 매우 좋다. 한눈에 공주 시가지가 보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금강과 공산성이 보인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송산리고분군을 바라보고 있는데, 고분군은 나무숲으로 빽빽하게 차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날씨가 좋은 날 이곳을 다시 찾는다면 그 뛰어난 전망에, 왜 여기에 제사유구가 있었는지 어렵잖게 유추할 수 있다.

본디 백제시대에는 공산성이 바라보는 남동쪽으로는 약 세 겹 내지 다섯 겹의 나무울타리를 돌리고, 송산리 고분군으로 연결되는 능선에는 약 1m 내외의 좁은 출입구만 남긴 채 너비 5m, 깊이 2m 이상의 넓고 깊은 도랑을 파고 내부에 몇 채의 건물을 축조하였다.

중심건물은 내부의 중앙에 주축을 남북방향으로 하고 있는데, 궁궐과 사원 등 국가의 중요시설에서만 사용된 8잎의 연꽃잎을 새긴 기와를 사용하고 있다. 사방을 'ㄴ' 자 모양으로 깎아낸 돌출부에 다섯 개의 기둥을 받치고 한 번에 8∼9개의 기둥을 세운 후 지붕에 기와를 얹어 만들었으나, 기둥을 받쳐주는 돌로 만든 기초시설이 없는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 화려한 장식이 부착된 장고형 그릇받침 등 국가 제사와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연꽃잎이 새겨진 기와, 즉 연화문수막새 등이 발견된다는 것은 그 격에서 예사롭지가 않다. 즉 유적이 생각보다도 중요성이 높다고 본 것인데, 특이한 점은 앞서 말 한대로 기둥을 받쳐주는 돌, 즉 초석이나 적심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전부터 초석이나 적심을 써서 건물의 내구성을 강하게 갖추려고 하였는데, 이러한 장치를 쓰는 것과 쓰지 않는 것과는 생각보다 차이가 크다. 이러한 장치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그 건물의 수명이 30년 정도라고 하니, 내구성의 면에서는 당연히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물며 기와를 올렸다면 그 무게로 인해서라도 내구성과 건물의 수명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정지산 유적은 우선 장기적인 제사유적이 아닌, 단기적인 제사유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럼 단기적인 제사유적이면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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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벽건물지. 정지산유적에 있는 건물로서 굴을 파 그곳에 기둥을 박고 두꺼운 벽을 쌓아서 만든 것을 말한다.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백제』, 1999

그리고 이곳의 건물지는 대벽건물지라고 해서 큰 벽이 있었던 건물지들이 보인다. 이는 다른 유적에서는 보기 힘든 것으로서, 이러한 건물지의 서쪽 외곽에는 저장시설들과 암거시설, 배수로를 갖춘 특수시설물들이 만들어져있다. 이는 얼음을 보관하던 것이라고 한다.

정지산 유적과 무령왕릉의 관계는 예사롭지 않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바로 위치 때문이다. 무령왕과 왕비의 매지권에 기록된 신지(申地), 유지(酉地)의 방향과 이 정지산의 위치는 정확히 일치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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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출토 지석. 여기에서는 사마왕이라고 하여 무령왕의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 당시 백제의 제례와 대외관계 및 세계관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국보 163호) ⓒ 국립공주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도록』, 2004

여기에서 잠깐 '무령왕릉지석'을 살펴보면 이렇다.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인 백제 사마왕(斯麻王)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 5월 (병술일이 초하루인데)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 8월 (계유일이 초하루인데) 갑신일인 12일에 안장하여 대묘(大墓)에 올려 뫼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厝登冠大墓立志如左)"

여기에서 계묘년은 서기 523년이고, 을사년은 525년이다. 무령왕의 왕비는 526년에 사망하고, 529년에 무령왕릉에 안치하였다고 나온다. 그럼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사이의 간격 동안 시체가 어디에 있었을까이다. 그 측면에서 이 정지산 유적이 주목받는 것이다.

게다가 앞서 보았듯이 정지산 유적에는 얼음이 보관되는 시설이 있으며, <삼국지> '부여전'에는 부여에서 사람이 죽으면 얼음을 사용한다고 나와 있다. 백제가 부여족의 일파이고, 그들과 비슷한 장례습관을 가지고 있었다면……. 바로 이 정지산 유적은 '무령왕릉지석'에서 보이는 몇 년의 간격을 메워주는 그러한 유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지산 유적은 발굴된 이후 지방유형문화재 147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 이 정지산 유적에 대한 비중과 중요도가 커져서 작년에 사적 474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기자가 정지산 유적을 방문하였을 시, 그러한 변화가 안내표지판에 수정되어 있지 않았다. 2개월 전이라 지금도 그런지는 확실히는 모르나, 이에 대한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아직 수정이 되지 않았다면, 당연히 바로 수정을 해야 한다.

정지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의외로 간단하였다. 차길 가이고, 그 아래에 마을이 있기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내려오니 바로 길이 있었고, 그쪽은 간단한 등산로처럼 닦아져 있었다. 채 5분도 안 되어서 마을로 내려왔다. 올 때는 30분도 넘게 헤매고 왔는데……. 순간 약간 기운이 빠지긴 하였어도 숲을 헤쳐나오면서 유적은 찾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라고 하겠다. 때론 엉뚱한 실수를 하면서도 문화재를 찾으면서 추억도 같이 찾아나가는 게 아닐까?

덧붙이는 글 | 2007년 6월 21일 공주 정지산 유적을 갔다와서 쓴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2007년 6월 21일 공주 정지산 유적을 갔다와서 쓴 글입니다.
#백제 #공주 #웅진 #정지산유적 #무령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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