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권 쓰는 사람은 '죄인'인가

[경험담] 한번에 여러개 사면 안되고, 세일도 안되고...

등록 2007.08.20 09:40수정 2007.08.20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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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는 몇 년 전부터 취미생활로 해오던 글쓰기로 받은 상품권을 들고 오랜만에 딸집에 오신 친정부모님께 못 다한 효도라도 할 셈으로 집을 나섰다.

"네가 무슨 돈이 있느냐"며 굳이 사양하시는 부모님을 모시고 맨 처음 찾아간 곳은 구두매장이었다. 9년 전 내가 결혼할 때 사드린 구두를 아직 신고 계셔서 닳아버린 뒤축만큼이나 걸음걸이가 비뚤해진 아버지에게 새 구두를 한 켤레 장만해드리기 위해서다.

20만원 상품권이었기에 충분하리라 생각했지만 10년 사이 구두 값이 3배 이상 뛰어버려서 마음에 드는 것보다는 금액에 맞춰서 골라야 했다. 다행인 것은 세일기간이라 부담을 조금 덜어내도 된다는 것이었다.

다리가 아프신 아버지라서 디자인뿐만 아니라, 기능까지 살피다 보니 구두 한 켤레 고르는 일이 여간 쉽지가 않았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면 발이 불편하고, 발이 편하다 싶어서 신고 걸어보면 너무 무겁고, 모든 조건이 마음에 들어서 '이걸로 하자'고 결정한 뒤 가격표를 보니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놓은 듯한 금액에 도로 내려놓고… 그래도 어쨌든 고르고 골라 드디어 아버지에게 맞는 구두를 골라 계산을 하러 갔다.

그런데 계산원의 표정이 영 떨떠름했다. '상품권이라고 미리 얘기할 걸 그랬나, 상품권이라고 안 받는 거 아냐?' 어찌됐건 현금이나 카드가 아닌 상품권이다 보니 덜 반가운 건 사실인 듯했다.

"미리 말씀드릴 걸 그랬나 봐요. 방송국에서 받은 건데…."
"그게 아니라. 상품권은 세일금액이 적용되지 않거든요. 해서 이 구두는 19만2천원이 아니라 24만원입니다."
"왜요?"

무식하다는 소리 들을지언정 궁금한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원래 그렇거든요. 상품권은 원래 정가로 구입해야만 합니다."

몇 번을 물어봐도 원래 그렇다는 대답만을 하는 점원에게 기어이 난 화를 내고 말았다.

"그러면 상품권은 왜 발행했으며 발행할 당시부터 그런 조건을 명시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아버지에게 오랜만에 좋은 신발 한 켤레 해드리고픈 딸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상대방은 시종일관 원래 그렇다는 말만 되풀이했고, 딸자식의 실랑이를 보다 못한 아버지는 슬그머니 구두를 내려놓으시며 "그냥 안 신을란다, 시방 신고 있는 것도 앞으로 20년은 더 신을 수 있다" 하셨다. 효도하려다가 못난 꼴만 보인 것 같아 내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남편에게 아버지를 모시고 나가있으라고 하고, 나는 점원이 원하는 대로 상품권에 현금까지 더해서 계산을 했다. 하지만 떨떠름한 기분까지 떨쳐지진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에게 새 구두를 사드린 것만은 어쨌든 잘한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비록 예상치 못한 4만 원을 쓰긴 했지만 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뵈니 고기 몇 근 덜 사먹으면 된다고 내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다.

"옷만 골라야 하는데요, 신발은 남는 게 없어서..."

다음은 어머니 차례. 퇴행성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엄마에게 편한 신발을 사드리기 위해 또 다른 상품권을 들고 매장을 찾아갔다. 구둣가게 일 때문인지 이번에는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상품권 사용가능하죠?"라고 물었다.

"그럼요."
"휴~~."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엄마를 위래 가볍고 편한 운동화를 골랐다.

가격표를 보니 작은 용품을 하나 더 골라도 될듯해서 초등학생 아이를 위해 얼려도 깨지지 않는다는 물병도 하나 골랐는데도 몇천원의 금액이 남았다.

"계산해주세요!!"
"어!!" 우리가 골라온 물품을 본 사장은 적이 당황하는 눈빛이었다.

"왜요?"
"옷만 골라야 하는데요. 신발은 남는 게 없어서 상품권으로는 교환이 안 되는데요."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팔 걷어붙이고 싸움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효도하려고 나왔다가 부모님께 험한 모습만 보여드리는 것도 도가 아닌 듯해서 그냥 참고 말았다. 게다가 돈 주고 사는 것도 아니고, 비록 팔 아프게 글 써서 받은 상품이긴 하나 파는 사람 처지에서야 공짜나 진배없는 손님이니 그 사람인들 오죽했으면 저럴까 이해도 됐다. 하여 나는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마음에도 들지 않는 옷 한 벌을 골라서 물병과 함께 계산을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또 한 번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왜요?"
"한 가지만 고를 수 있습니다." 기가 막혔다.
"금액이 10만 원인데 왜 한 가지만 고를 수 있어요?"
"상품권은 원래 그렇거든요. 금액만큼 다 바꿔드리면 저희는 남는 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돈이 남아도 현찰로 차액을 돌려주는 경우도 없다 한다. 대신 상품권보다 더 큰 금액에 대해서는 현금으로 계산을 해야 한다는 게 주인의 말이다.

주객이 전도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손님이 왕이라는 이 나라에서 나 같은 손님은 손님이 아니라 '거렁뱅이' 취급을 받아도 "원래부터~~ 회사의 방침"이라는 그들의 언변 앞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참으로 안 좋은 기분으로 가게를 나왔다.

딸자식의 기분이 말 안 해도 짐작이 되는지 가게를 나오자마자 엄마는 "신던 것 신으믄 되는디… 얼매나 산다고 이 신발 저 신발 쌓아놓고 신겄냐?"라고 선수를 치며 딸을 위로하셨다. 하지만 딸자식은 엄마의 그 위로가 더 죄송스러웠다.

엄마 운동화는 근처 가게에서 제대로 된 손님 대접 받으며 현금으로 사드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운동화신고 갈 데도 없다"던 엄마가 새 운동화를 신으시고는 꼭 나는 것 같고 편하다며 좋아하셨다.

집 나서기 전 상품권을 훑어보던 남편이 "여기 다 찾아다니려면 기름값이 더 들겠다"던 말이 실감됐다. 벌써 차 타고 이동한 시간만도 3시간이 넘어갔다. 게다가 상품권만 믿고 나섰다가 예상치도 못하게 쓴 돈만 해도 10만원이 훌쩍 넘어갔다. 남편 말대로 효도하려다가 외려 고생만 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식사권 되죠? 아무거나 다 먹어도 되죠?"

오랜만의 쇼핑 때문인지. 지루한 실랑이 때문인지 허기가 금방 밀려왔다. 작년에 받아놓고 혹시나 부모님 오시면 대접한다고 아껴두느라 유효기간이 딱 이틀 남은 식사권을 들고 차를 몰아 식당으로 찾아갔다. 여기까지 공짜손님이라고 홀대를 받는다면 진짜 화가 날 것 같았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부모님을 자리에 앉힌 뒤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에게 조용히 물었다. "식사권 사용해도 되죠? 아무거나 다 먹어도 되는 거죠?" 매니저의 의아한 눈빛이 나의 양 어깨를 내리눌렀다.

하지만 당당하게 들어가 물건을 고르고도 상품권 손님이라는 이유로 부모님 앞에서 천대, 홀대를 받은 나의 기분을 매니저인들 알 리 있을까.

"네, 아무거나 다 드셔도 됩니다."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에요?"
이번에는 매니저의 얼굴이 당황을 넘어 속고만 살아왔나 하는 표정이다.

"의심되시면 미리 계산을 하셔도 됩니다. 계산을 도와드릴까요?"

그리하여 나는 밥이 나오기도 전에 계산부터 끝낸 뒤 식사를 했다. 그런데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던가? 식사가 슬슬 끝나가니 이런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디저트랑 차 값은 따로 받는 거 아냐?' 물론 받지 않았다.

하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공짜손님이라고 몇 번 홀대를 받다 보니 당연한 것임에도 주차권에 도장 받기가 미안해서 그냥 나오다 보니 5천원이나 되는 주차비를 또 내 주머니에서 계산해야 했다.

싱크대서랍을 열어보면 각종 공짜쿠폰들이 써주기만을 기다린 채 쌓여 있다. 10장을 모으면 한판을 공짜로 준다는 피자집 쿠폰, 여섯 번을 가면 한번은 공짜로 잘라준다는 미용실 쿠폰, 사용금액의 20퍼센트를 포인트로 적립해준다는 서점카드에 금액이 붙어있는 쿠폰을 잘라 바코드를 붙이면 현금으로 적립해준다는 쿠폰까지.

그런데 이렇게 많은 쿠폰이 있음에도 난 한 번도 사용을 해 본 적이 없다. 왜? 사용할 줄 몰라서이기도 하지만 상품권을 쓸 때마다 공짜 손님 취급을 받은 그 기분을 맛보고 싶지 않아서이다. 거의 매일 새로운 상품권이 쏟아져 나오지만 상품권만큼이나 앞서가지 못하고, 발전하지 못하는 서비스에, 덜 가진 서민으로서 또 괜한 상처를 입을까 겁이 나기 때문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어느 상품권은 진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 발행한 상품권에 책임을 느끼고 사용해주는 사람을 고마워해 주는 곳일수록 더 많은 믿음이 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고객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는데 나 비록 가진 건 없지만 나란 사람 뒤에는 수많은 이웃과 형제와 친구들이 있음을 상품권손님이라고 박대한 그분들도 알았으면 좋겠다.

시너지효과란 바로 나 같은 사람에게서 나올 때 진정한 가치를 보일 테니까. 책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와 함께 책을 살 수 있다는 상품권을 앞에 놓고 한참을 고민 중이다. '되긴 될까? 안된다고 하면 또 현금으로 계산해야 하는 거잖아. 게다가 스크래치가 벗겨진 상품권은 온라인매장에서는 사용이 불가하다고? 그럼 어떡하라고…." 나처럼 상품권이 있어도 쓸 줄 모르는 아줌마에게는 그저 빳빳한 현금이 최고라는 걸 이참에 또 뼈저리게 느낀다.
#상품권 #쿠폰 #공짜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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