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서 새콤한 사과 향기가 난다

[자전거 세계일주 17] 캐나다 온타리오 호수

등록 2007.08.02 11:33수정 2007.08.02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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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이 질무렵 기찻길에서. 6월 11일. ⓒ 문종성

화장실이 급했다. 급작스레 아랫배가 묵직해진 순간에는 체면을 따질 이유는 사라진다. 긴급신호를 감지한 나는 외딴 한 집의 문을 두드렸다. 너른 캐나다 땅에 공중화장실은 본 적도 없고, 주변에 주유소나 맥도날드가 없기 때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잠시 후 나온 부인은 내 말보다는 얼굴에서 더 급한 상황을 감지한 듯 보였다. 그리고는 흔쾌히 화장실을 사용하게 해준다.

"덕분에 화장실 잘 이용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찰나 남편이 무슨 일인가 나와 있었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가 에어포스 조종사였으며 한국에도 여러 번 왔다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혹시 광주 아세요? 광주도 100만 인구의 큰 도시인데 가 본 적 있나요?"
"광주요? 물론이죠!"

그가 광주에 와 본적이 있다는 말에 반가웠다.

"음, 제가 대학교를 광주에서 나와서요. 그럼 목포는 아시나요?"

혹시나 집이 있는 목포도 알까 싶어 물어봤다.

"목포? 당연히 잘 알죠. 무슨 산이 있었는데?"
"유달산 말인가요?"
"맞다, 유달산! 하하."

오, 이럴 수가! 그는 유달산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전부였기는 했지만 캐나다 시골에서 만난 사람이 한낱 동방의 작은 나라의 작은 도시를 안다는 게 신기하기 그지없다. 참으로 만남이라는 게 기기묘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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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에어포스 조종사를 했다는 델라(Della)와 그의 부인 글렌(Glenn). ⓒ 문종성

그는 한국에 대한 여러 가지 경험담을 얘기해 주었다. 내 앞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주로 좋은 얘기다. 특히 음식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다. 아마도 전라도 음식의 매력에 푹 빠졌나 보다.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 나도 한국의 음식 자랑을 거들어 준다.

한국에서 왔다는데 이 사람들이 그냥 보내줄리 만무하다. 잠깐 기다리라고 한 뒤 음료와 에너지바를 잔뜩 챙겨준다. 사실 화장실이 급해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다시 보니 집이 꽤 훌륭하다. 에어포스 조종사 할 만하단 생각이 든다. 나야 시력(실은 실력) 때문에 대상에서 제외지만 말이다.

사과농장을 경영하는 '폴'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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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발견된 거북이. 캐나다 시골에서 거북이, 도마뱀, 토끼, 다람쥐 등등 적지 않은 야생 동물을 볼 수 있었다. ⓒ 문종성

"이봐요, 당신 거기에 텐트 칠거예요?"

'이크, 주인인가 보군. 좀 봐주지 그래. 깐깐하긴.'

북미쪽 사람들은 사유지에서의 낯선 사람 출입을 상당히 경계한다. 그래서 텐트를 칠 때도 늘 허락을 맡거나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잘 분석해야 한다.

오후 5시 경부터 숙소를 찾으러 다녔다. 하루의 일과 중 늘 기계처럼 반복해야 하는 일이 숙소 찾기이다보니 이제 어느 정도 마인드 컨트롤이 된다. '정 안 되면 들판에다 텐트나 치지 뭐'하는 낙천적인 생각 같은 거 말이다. 오랜만에 숲 속에 펜션 같은 괜찮은 캠핑장이 있다는 광고를 보고 피로도 풀 겸 이용하러 갔는데 이건 가도 가도 끝이 없다. 길을 물어보면 사람들은 계속 '5마일만 더'를 외친다. 슬슬 귀찮아지고 어느 순간 CAD $25도 부담되어 한 시간이 넘은 캠핑장 찾기를 중도에 포기했다. 그냥 중간에 오면서 보았던 빈 집들을 많이 봤는데 그곳의 야드에 텐트 치려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다가 사람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제법 괜찮은 야드를 발견해냈다. 그래서 오늘 숙소를 여기에 마련하려고 자전거를 세우고 텐트를 내리려는 찰나 그 때 누군가 나를 부른 것이다. 도로와 야드 사이에는 나무들이 있었기에 그의 얼굴을 확인 할 수 없었지만 그는 내가 자전거와 함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하룻밤 자 보겠다고 여기에 온 이상 정중히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네, 오늘 잘 곳이 마땅찮아 여기서 하룻밤만 자고 가려구요. 여기 주인이세요?"

그랬더니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주인은 무슨 주인? 난 다른 곳에 살아요. 괜찮으면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은 망설일 틈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이미 난 그의 곁으로 가 있었다.

"내 이름은 폴(Paul)이에요. 사과농장을 경영하고 있죠. 자전거 여행 하나 봐요?"
"네, 전 갈렙이구요. 북미 대륙 횡단 중이에요. 근데 어떻게 제가 저기 있는지 알았어요?"
"아, 차타고 오면서 보니까 웬 자전거 여행자가 야드 쪽으로 자전거를 밀고 들어가는 모습을 봤거든요."

그는 내가 무거운 자전거를 밀고 야드로 들어가는 그 모습을 보고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 짧은 시간임에 틀림없다. 차 안에서 나를 본 시간과 차의 속력을 고려하면 말이다. 그 짧은 시간에 이런 판단을 한 거라면 매우 사려 깊고 신중하게 판단한 것이 아니라 단지 습관이나 혹은 성격에 의해 결정했을 소지가 크다. 결론은 그가 나를 배려해 준 것은 깊은 고민에서 우러나온 선수(善手)가 아니라 원래 그의 인격이 자비롭거나 마인드가 열려 있다는 얘기라고 귀결할 수 있다.

바다같이 넓은 온타리오 호수

사실 지금까지 베풀어 준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결코 오래 고민하지 않는다. 오래 고민하는 사람들 치고 세심하게 배려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유익을 고려해 판단하기 위해 머리를 좀 더 굴리는 것뿐이다. 그냥 그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사람들을 보면 친절이 습관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복잡다단한 것도 정말 별 문제 아니라는 듯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말을 늘어놓고 행동이 부산한 사람일수록 결과는 좋지 않았음을 상기하면 적어도 내 경우엔 '장고 끝에 악수(惡手)'가 나오는 것이 확실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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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과 둘째 누이. 포즈가 익살스럽지만 오누이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 문종성

"저녁은 어머니 집에서 할 건데 같이 가요. 몬트리올과 토론토에 사는 누이들이 왔거든요."

그의 인상은 필드메이커인 농부답지 않게 매우 젠틀해 보인다. 부인은 토론토 병원에서 일한다고. 저녁은 그의 어머니와 누이들과 함께 정통 소시지(약간 순대 필이 나는)와 삶은 감자, 샐러드를 먹었다. 그의 어머닌 83살이었는데 내가 73살처럼 보인다고 하니 소녀처럼 쑥스러워하며 좋아한다.

그들은 나의 자전거 여행 얘기를 듣고 무척 즐거워한다. 가끔 도회적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그의 누이가 난해한 질문들을 던지지만 모두가 내 대답을 성의껏 이해해주며 저녁을 즐겼다. 폴의 집에는 자전거가 6대나 있다. 그의 아내가 자전거 여행을 무척 좋아한단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자전거 여행에 대해 관심을 나타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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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엔 사과나무에 농약을 뿌려 병충해를 예방한다. ⓒ 문종성

일정에 여유가 있어 하루 더 쉬어가기로 했다. 생각보다 토론토가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날은 폴의 사과 농장을 방문했다. 그는 맥킨토시를 재배한다. 여름철엔 병충해 예방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요즘은 넓은 농장에 농약을 뿌리는 일을 한다.

오대호 중 가장 오른편에 있는 온타리오 호수도 그의 농장에서 보이는데 정말 바다같이 넓다. 게다가 사파이어처럼 맑은 푸른빛이 감돈다. 그 푸르름에 빠지고 싶어 호수에 내려가서 발을 담갔다. 그동안 혹사 시켰는데 피로도 풀어줄 겸해서. 못생기고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발이지만 참 고생이 많다. 구린내 난다고 구박받는 발이지만 발만큼 티 안내며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기관도 없는 것 같다. 발마시지까진 못해도 호수 바람을 맞으며 발을 담그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원함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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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많았던 발에게 시원한 온타리오 호수에 흠뻑 담글 수 있는 특혜를 주었다. ⓒ 문종성

점심은 코리아 스파이시 누들이라며 라면을 해 줬는데 그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먹는다. 그래도 생각보다 잘 먹는다. 두 개의 면에 스프 하나 반을 넣어 그런지 그렇게 맵지는 않은가 보다. 이에 질세라 폴은 저녁엔 캐나다 누들을 대표해 스파게티를 요리했다. 하지만 면은 3인분이요, 소스는 1인분이라 본의 아니게 많이 남겼다.

"왜 다들 복잡한 삶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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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라면을 맛있게 잘 먹는 폴.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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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이 손수 만든 스파게티와 망고. 면에 비해 소스가 지나치게 적었지만 맛있게 먹었다. ⓒ 문종성

그를 알면 알수록 참 괜찮은 남자란 생각이 든다. 식사 전에 "무슨 음악을 좋아해?"라고 묻기에 아무거나 좋다고 답했더니 엘리샤 키즈(alicia keys)의 앨범을 튼다. 그리고는 식사를 하는 것이다. 'piano & I', 'Girlfriend'가 연속으로 재생된다. 분위기 있다.

폴은 내게 음료수와 주스를 마시지 말고 물을 많이 마시라고 배려하며 조언한다. 당연히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노력함에도 그게 그리 잘 안 된다. 알코올이나 도박, 마약 중독자들을 보며 그것 하나 못 고치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는데 나도 이래 놓고 보면 영락없다.

"사과농장 하면 심심하지 않아요? 시골인데 뭐 재미있는 것도 없고. 나 같음 따분해서 못 있겠는데."
"아뇨, 정말 만족해요. 사과농장 경영하면서 맛있는 사과도 먹고, 시원한 호수도 보고, 공기도 맑죠. 그리고 부인이랑 행복하고 살고. 이렇게 좋은 일들이 많이 있는데 왜 다들 복잡한 삶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그는 노동을 결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닌 삶의 한 부분으로 즐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농부라는 사실에 대해 불평도 불만도 없다.

"경쟁하며 사는 것보다 이렇게 정직하게 일해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나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한국에서 그런 삶은 결코 쉽지가 않아요. 다들 힘든 일은 회피하죠. 더럽고, 위험하고, 어려운… 3D라고 하거든요. 뭐 저라고 예외는 아니지만요."

자기가 하는 일에 신념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좋다고 굳게 믿으면 힘이 생기는 법이다. - 괴테

폴의 집 앞에 보이는 무수한 사과나무들을 보며 이야기하다 화제를 돌렸다.

"폴, 한국엔 사과를 많이 먹으면 미인이 된다는 말 있어요."
"오, 그래요? 캐나다에도 사과에 대한 유명한 속담이 있어요. Folk wisdom, 'An apple a day keeps the doctor away'라는 거죠. 사과를 많이 먹으면 병원 갈 일도 없죠. 저도 병원 한 번 가 본적이 없거든요. 하하."
"그런가요? 그렇다면 사과 좀 많이 먹어야겠는걸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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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의 사과농장 뒤에 펼쳐져 있는 푸르른 온타리오 호수에서. ⓒ 문종성

폴과 얘기하는 동안 태양은 또 온타리오 호수 너머로 저물어간다. 저무는 태양을 말없이 바라보는 폴을 보고 있자니 슬며시 미소가 띠어지고 이런 나를 보고 폴 역시 멋쩍게 웃는다. 서로의 삶은 달라도 지금 이 순간 서로의 마음은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행복한 인생에 관한 것들을 머릿속에 그리며.

그가 흘린 땀은 땅의 자양분이 된다. 짜디짠 땀을 흘린 만큼 달디 단 사과가 나온다. 정직한 농부의 삶인 것이다. 거기에 사람을 편하게 그리고 친근하게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다. 부인이 대도시에서 일하는 까닭에 주말부부로 살아가지만 그에게서 외로움이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긍정적인 마인드와 성실함은 결코 그의 마음에 허무로 채울 공간을 허락지 않는 것이다. 굳이 화려한 언어로 채색된 처세술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폴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인생이 가치 있고 행복한가를 발견할 수 있다.

사과 베어 물 때마다 폴이 생각나는 건 아닐까

"갈렙. 지금은 사과 수확철이 아니라서 사과는 없지만 대신 포도를 줄게요. 비타민 좀 챙겨 먹어요."

다음날 폴은 동구 밖까지 자전거를 타고 나를 배웅해 주었다. 폴은 마지막까지 짧은 시간 친구가 되어준 자전거 여행자에게 배려를 잊지 않았다.

"혹시나 한국 여행자들이 캐나다 동부를 지나게 되면 언제든지 우리집에 방문하라고 하세요. 항상 환영이니까요. 또 가을엔 사과를 마음껏 제공해 줄 수 있거든요."

그러면서 자신의 주소를 적어주었다.

"고마워요, 폴. 당신의 주소를 웹페이지에 올려줄게요. 그리고 행복하세요."

그도 아쉬운지 10분 정도 더 함께 라이딩을 해주다 손을 흔들며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그와 헤어지는 순간 마음이 찌릿해져 온다. 만남은 늘 이별을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이지만, 또 다른 만남이 있기에 이별할 수 있다는 것도 실은 애틋함과 아쉬움에 대한 변명인 것만 같다. 캐나다 동부에 넓게 펼쳐진 농장들의 사과나무에게서 폴의 향기가 나는 듯하다. 그 향기가 언젠가 많이 그리울 것 같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을 때마다 폴이 생각나는 건 아닐런지….

폴(Paul Goddard)의 주소 -RR4 Brighton, 242 Hunt Rd. ON., CAN,. kok 1ho. 613-475-1388, E-mail - paul.goddard@xplornet.ca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호수 #사과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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