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같이 술 한 잔 할래요?

30년 전 작고한 칼럼니스트 심연섭의 <건배>

등록 2007.07.11 09:38수정 2007.07.11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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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건배> ⓒ 중앙 M&B

오래된 명사의 글을 만나는 것은 참 행복한 일 중 하나다. 만약 글과 책이 없다면 옛 사람들의 깊은 생각과 경험을 어찌 접할 수 있으랴. 그런 의미에서 출판 문화의 발전은 큰 의미가 있다.

책 <건배>는 30년 전 이미 작고한 기자이자 칼럼니스트 심연섭의 글을 엮은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인 1977년에 <술, 멋, 맛 – 주유만방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던 것인데 절판되어 없어진 것을 중앙 M&B에서 발굴하여 새로운 제목으로 엮었다.

이제 삼십 대인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쓰인 글들이라 케케묵었을 것이라 생각됐지만 예상을 깨고 너무 뜻밖의 좋은 문장을 만나 가슴이 벅차오는 책. <건배>는 나에게 바로 그런 책이 되었다. 그 까닭은 너무나 뛰어난 문장력을 자랑하면서 술과 멋, 맛을 즐기는 한 사람의 인생이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들의 감성을 울리는 자리에는 항상 술이 껴있기 마련이다. 말 많고 탈 많은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자들, 연예인들, 운동 선수들. 이들의 스캔들만큼이나 많은 것이 바로 질펀한 술자리가 아닌가 싶다. 술은 사람들이 교류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물론 술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일도 많지만 왠지 술이 있으면 보다 허심탄회한 자리처럼 보이고 멋과 낭만이 넘쳐 흐를 것만 같다. 이 책의 저자가 접한 여러 인물들은 술자리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글로 표현된 대화와 상황에 푹 빠지게 된다. 술 좋아하는 것이 워낙 소문이 나서 국세청 주류심의의원이 되질 않나 지금은 고인이지만 저자의 인생 내력에 미소가 절로 난다.

"테킬라는 멕시코 토주다. 병째로 나팔을 분 그가 오만상을 찌푸리고 소금 한 줌을 입 속에 털어 넣는 것은 그 술이 그만큼 역겨운 탓이리라. 멕시코 수도의 뒷골목 바에서 목격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소금을 입에 털어 넣는 데에도 묘한 습관이 있다. 우리 같으면 소금을 손가락으로 집어 목구멍으로 털어 넣을 텐데, 그들은 소금을 일단 오른손 손등에 얹었다가 그것을 혀끝으로 핥는다."

책의 첫 번 째 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여러 종류의 다양한 술과 그에 얽힌 에피소드나 원산지의 문화, 술 마시는 방법 등을 소개한다. 술에 대해 꽤 알고 있다는 사람도 '아, 이런 술은 이런 내력이 있구나' 할 정도의 재미있는 사연도 많다.

제대로 된 드라이 마티니는 단맛을 내는 향료인 베르무트를 매우 적게 섞는 것이 비법이다. 사람마다 가장 드라이한 마티니를 만드는 방법도 다양하다. 어떤 사람이 스포이트로 베르무트 한 방울 떨어뜨리니 제대로 된 마티니가 나왔다고 말하자, 다른 애주가는 주사기 바늘 중 가장 가는 걸로 한 방울 떨어뜨리면 된다고 한다. 그러자 어떤 이는 아내가 쓰는 향수 분무기로 살짝 분사하면 그 향만 들어간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술에 대한 얘기를 읽고 있자니 정말 누군가와 술을 한 잔 즐겁게 마시고 싶어진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글 솜씨가 너무 아까워서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더불어 술이 지닌 멋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술이 과하거나 나쁜 방향으로 가면 좋지 못하지만 적당한 술은 인생의 멋이고 즐거움이 아닐까?

애주가인 저자가 우리나라 상황 중에서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바로 전통주의 소멸이다. 한때 집에서 술을 빚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는 바람에 전통주의 맥과 흐름은 끊기고 말았다. 이제야 몇몇 양조업자들이 전통주 생산에 뛰어들었지만 고유의 맛과 향을 제대로 살리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개성과 안동의 소주, 해주 방문주, 서울과 철원의 낙주, 동래의 동동주 등 기록상으로 우리에게도 유명하다고 꼽을 만한 좋은 술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중국처럼 그 명맥을 꾸준히 이어나가지 못한 현실이 애주가 입장에서는 개탄스럽기만 하다. 특히 이런 풍토가 형성된 데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혹정과 양조는 관이 맡아야 한다는 잘못된 사고가 자리하고 있으니 더욱 안타깝다.

책의 뒷부분은 술 이야기가 아닌, 저자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여러 에피소드의 모음이다. 밤낮없이 바쁜 기자 생활을 하다 보니 아이들과 대면할 시간이 부족해서 어느 날은 딸아이가 오빠에게 "나 어제 새벽에 오줌 누러 갔다가 아빠 만났다"라고 자랑하는 얘기는 마음이 찡하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사명감이 묻어나는 글들도 꽤 있어서 고인에 대한 존경을 표하게 된다.

"본업이 칼럼니스트든 아니든, 칼럼을 쓰는 이상 독자를 생각한다. 신문에 일류, 이류는 있을망정 쓰는 사람으로서는 독자의 일류, 이류를 다질 처지가 못 된다. 독자는 모두 소중하다. 칼럼니스트라고 자칭하고 나선 이상 독자 쪽에서도 나에게서는 칼럼 이상의 것이 나오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오묘한 '학(學)'을 기대하지도 않고, 나라를 움직이고 백성을 구할 절묘한 지혜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민생고의 해결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읽어봄직한 칼럼이면 족한 것이 칼럼니스트의 독자들이 아닐까."


이렇게 독자와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고 타고난 필력을 통해 세상과 술, 문화와 멋에 대해 논하는 칼럼니스트. 우리 시대에도 이런 멋쟁이들이 많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본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지만 심연섭 기자의 글은 지금도 생생히 남아 독자들의 마음을 울린다.

건배 - 칼럼니스트 심연섭의 글로벌 문화 탐험기

심연섭 지음,
중앙M&B, 2006


#심연섭 #건배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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