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끼리만 산에 올라서 혼나는거야”

경기 가평 연인산에서 길을 잘 못 들어 고생한 사연

등록 2007.06.29 20:19수정 2007.06.2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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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산 정상 풍경 ⓒ 이승철

“이 산은 남자들끼리만 오르면 안 되는 산인데. 연인들과 함께 올라야 하는 산이잖아?”
“정말 그러네, 그렇다고 이 나이에 산에서 연인을 구할 수도 없고 어쩌지?”

오르고 있는 산 이름이 로맨틱한 연인산이어서 일행들이 한 마디씩 나누는 농담이었다. 산 정상에 야생화가 많고 철쭉꽃이 만발하는 5월이면 철쭉제를 열기도 하는 산이다.

지난 6월 26일 경기도 가평에 있는 연인산을 찾은 날은 전날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산길 숲속은 싱그러움이 가득했다. 임도를 따라 걷다가 산길로 접어들어 잠깐 걷자 길옆에 핀 싸리나무 꽃들이 한창이다.

“연인산이라 그런가? 싸리나무 꽃도 이 산에서는 제법 멋있는 걸,”

사실 싸리나무 꽃은 예쁘다고 할 수 있는 꽃이 아니다. 푸른 잎 사이에 불규칙하게 피어있는 꽃모양도 그렇고, 무리지어 피어 있는 모습도 썩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날 연인산에서 만난 싸리나무 꽃은 예전의 모습과는 달리 멋스럽고 예쁜 모습이었다. 더구나 한 곳에는 제법 탐스러운 꽃 속에 노린재 한 마리가 꿀이라도 빨고 있는지 꼼짝하지 않고 탐닉하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5월이면 진달래가 만발하여 진달래 터널을 이루던 산길이 지금은 싸리나무 꽃 터널로 바뀌어 있는 모습도 멋스럽다. 길옆 경사진 면에 비슷한 크기로 자란 싸리나무들이 꽃을 활짝 피우고 있는 모습도 여간 고운 모습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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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리꽃과 노린재 한마리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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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에 싸리나무 꽃이 흐드러진 등산로 ⓒ 이승철

“이 산 참 좋은데, 길도 대부분 흙길에 경사도 완만하고.”

무더운 날씨에 1천m가 넘는 산에 오르는 것을 조금 걱정스러워하던 친구도 부드럽고 아름다운 산길이 부담스럽지 않고 흡족한 모양이었다.

“잠깐 쉬어가지.”

그래도 역시 등산은 힘이 든다. 더구나 날씨가 30도 가까이 오른 여름철이 아닌가. 나무그늘 밑에 앉아 땀을 식히며 과일과 물을 마시고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등산로는 계속 오르막길이 아니고 적당히 오르락내리락해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길이었다.

“어이쿠! 죄송해요, 길을 가로막아서.”

그렇게 한참을 올라갔을 때였다. 정말 등산로를 가로막고 앉아서 쉬고 있던 등산객들이 길을 막아 미안하다며 먹고 있던 오이와 당근을 내민다. 40~50대로 보이는 한명의 남성과 4명의 여성등산객들이었다.

“위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이건 참 어이없는 질문이다. 이 사람들은 이 산이 무슨 산인지도 모르고 예까지 올라왔단 말인가.

“연인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그들은 정상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길은 험하지 않느냐? 이것저것을 묻는다. 그들에게 내가 아는 만큼 답변을 해주고 다시 일행들과 함께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조금 올라가다보니 어느새 뒤따라 왔는지 그들이 우리 일행들을 추월하여 앞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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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리꽃도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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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부근에 활짝 피어난 하얀꽃, 이름은? ⓒ 이승철

정상이 가까워지자 경사도 약간 급해졌다. 오른편으로는 명지산 줄기와 저 멀리 화악산이 아스라하게 바라보인다. 줄기줄기 이어진 푸른 산맥 위로 어제 내린 단비로 산뜻하게 맑아진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있는 모습이 정말 환상적이다.

“저 밑에 샘이 보이는데 물 좀 담아가는 게 좋지 않겠어?”

능선 왼쪽 길 바로 아래 바라보이는 샘은 장수샘이었다. 그러나 정상에도 샘이 있는 걸로 기억하고 있는 내가 그냥 올라가자고 했다. 샘은 아무래도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수질이 더 좋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2백여m를 더 올라가자 정상 아래 분지입구에 도착했다. 곧바로 더 나가면 약간 경사진 제법 넓은 분지에 샘이며 쉼터가 마련되어 있는 걸로 기억하는 곳이었다. 내게는 이번이 두 번째 산행이어서 10여 년 전에 처음 올랐을 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오른편으로 2백m를 더 걸어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 오르자 시야가 탁 트이며 시원한 바람이 온몸의 땀을 순식간에 씻어준다. 연인산 정상은 해발 1068m로 경기도에서는 몇 안 되는 1천m 급 산 중 하나다. 정상 표지석에는 검정색 글씨로 '사랑과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쓰여 있었다.

동북쪽으로는 골짜기 건너 명지산이 지척이고, 그 너머로 화악산이 흰 구름 아래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실감케 하는 풍경이다. 남서쪽으로는 연인산 줄기의 다른 봉우리를 건너 우람한 운악산도 바라보인다.

정상 바로 아래 분지의 모습은 옛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쉼터며 각종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던 곳은 모두 없어지고 대신 야생화들이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에 있었던 야외공연장 같은 시설도 모두 없어져 전보다 훨씬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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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본과 하늘 풍경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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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구름의 조화 ⓒ 이승철

정상 주변에는 이름 모를 하얀 꽃들이 탐스럽게 피어 있어서 하늘에 뜬 하얀 뭉게구름과 멋진 조화를 이룬다. 정상에 오른 기념으로 일행들의 사진을 찍고 나자 세 사람의 일행이 저 아래 나무그늘 밑에서 간식을 먹자고 한다.

그러나 다른 일행 한명은 샘이 있다는 분지 쪽으로 돌아서 가자고 한다. 그래서 우선 세 명의 일행은 바로 아래 나무그늘에서 쉬며 기다리기로 하고, 다른 일행 한명과 나는 분지를 돌아 세 명의 일행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지점에 도착해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 핸드폰들을 소지하고 있어서 연락해 보니 그들은 장수샘에서 기다리겠노라고 한다. 우리들도 그들을 뒤쫓아 부지런히 내려갔다.

이정표가 서있는 세 갈래 길에서 앞서가는 친구에게 지금 가는 길이 맞느냐고 물으니 확실하단다. 그런데 내려가면서 살펴보니 올라올 때의 길과 느낌이 다르다. 이미 5백여m는 내려간 것 같은데 있어야할 문제의 장수샘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길을 잘 못 든 것이 분명했다. 다시 되돌아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앞서간 일행들을 뒤쫓느라 무리를 했는지 다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며 올라가는 것이 무척 힘에 부치는 것이 아닌가. 어렵사리 오르막길을 올라 다시 세 갈래 길에 도착하니 상당히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장수샘에서 기다리고 있을 세 명의 친구들을 생각하며 이번에는 왼쪽 능선 길로 방향을 바꿔 부지런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웬걸, 다리에 힘이 빠져서인지 내리막길에서 두 번이나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행이 흙길이어서 손바닥과 엉덩이에 흙칠을 하고 다치지는 않았지만 위험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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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분지 가운데에 있는 쉼터의 느티나무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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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부근의 야생화 군락지 ⓒ 이승철

장수샘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어야할 다른 친구들이 보이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고 그냥 내려가지는 않았을 텐데 이상했다. 다시 핸드폰으로 연락해보니 장수샘이 보이지 않아 그냥 계속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들도 우리처럼 내려가는 길을 잘못 든 것이었다.

연인산으로 오를 때 우리 일행이 잡은 코스는 소망능선이었다. 그런데 지금 세 명의 친구들이 내려가고 있는 길은 장수능선 길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대로 내려가야지. 그들 세 명의 친구들은 이미 산 아래 쪽으로 너무 멀리 내려간 것이다.

뒤돌아 올랐다가 이쪽 능선으로 방향을 바꿔 내려오기는 더욱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로 내려가 임도를 따라 다시 승용차를 세워둔 백둔리 근처 임도까지 걸어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도 오르막길이 아니어서 체력소모는 적겠지만 거리가 멀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 두 사람은 장수 샘에서 식수를 보충한 다음 흐르는 물에 흙 범벅이 된 손을 씻고 간식을 먹었다. 이제 마음 급할 일은 없었다. 앞서간 그들보다 우리는 천천히 걸어 내려가도 훨씬 먼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 세 명의 친구들이 무더위에 너무 지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수시로 안부전화를 했는데 다행이 그들은 무사히 잘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승용차를 세워둔 백둔리 임도 입구에 도착하여 1시간 쯤 기다렸을 때 세 명의 친구들이 저만큼 임도위에 나타났다.

“어이! 친구들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와서 반가워!”

우리들이 두 손을 흔들어 주자 그들도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처럼 몹시 지친 표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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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바라본 명지산과 그 뒤로 멀리 보이는 화악산 ⓒ 이승철

“연인산을 남자들끼리만 올랐기 때문에 혼나는 거야. 허허허”

비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이렇게 농담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산이 주는 여유로움인지도 모른다. 승용차를 몰고 내려와 식당을 찾아든 일행들은 우선 시원한 맥주 한잔씩으로 갈증과 피로를 씻어 내렸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 5시. 점심은 간식으로 완전히 거르고, 얼큰한 민물매운탕으로 먹은 저녁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술잔이 몇 잔 오고가자 불과 조금 전의 고생스러웠던 산행은 벌써 기분 좋은 추억으로 변했다.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 다음부터는 개인행동 절대 금지다. 다섯 걸음 이상은 단체행동이야, 알았나?”

다섯 명으로 늘어난 이름도 없는 우리산악회의 3년차 고참 등산멤버의 엄명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연인산 #오르막길 #내리막길 #능선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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