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이 안겨준 국가 기틀의 시금석

[태종 이방원 106]조상을 모셔라

등록 2007.06.17 15:45수정 2007.06.18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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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이변에 백성과 임금은 공포에 떨었다

기상이변은 계속되었다. 길주의 마른하늘에 잿빛 비가 내리는가 하면 기장 앞바다의 바다가 붉게 물들었다. 임을포(林乙浦)에서 가을포(加乙浦)에 이르는 '바다가 적색(赤色)으로 변하여 바닷물이 죽(粥)과 같고 복어와 잡어가 모두 죽어서 물위로 떠오르고 있다'고 보고하는 경상도관찰사는 걱정 이상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오늘날의 과학으로 해석하면 황사현상과 바닷물의 플랑크톤이 이상 증식하면서 발생하는 적조 현상이지만 당시에는 임금과 백성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임금이 잘못하여 하늘에서 벌을 내리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백성들은 가뭄으로 고통을 받고 태종 이방원은 가슴이 타들어 가고 있는데 지신사 황희가 거지 행색의 중을 데리고 들어왔다.

"이 자는 장원심(長願心)이라는 중이온데 남이 굶고 있으면 밥을 빌어다 먹이고, 추위에 떠는 것을 보면 옷을 벗어 주었으며 병들어 있는 자를 보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구휼하였고, 죽어서도 주인이 없는 자는 반드시 묻어 주어 거리의 아이들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자가 없습니다."

"가상하구나."

"이자가 흥천사에 들어가 사리전에 기도를 드리면 비를 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평소 같으면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누구를 속이려 드느냐?'하고 불호령을 내려 내칠 일이지만 현재 상황은 그것이 아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흥천사라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흥천사는 서모 신덕왕후의 능참사찰이 아닌가? 무슨 말이 어떻게 번질지 불길했다.

"비가 내린다면 천만 다행이지만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신덕왕후 강씨가 저주를 퍼부어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할 것 아닌가?"

그러나 그런 것을 따질 경황이 없었다. 태종 이방원은 장원심으로 하여금 흥천사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허락했다. 그런데 신통방통하고 귀신이 곡할 일이 벌어졌다. 장원심이 기도한 이튿날 비가 내린 것이다. 신하들의 시선이 중 장원심에게 쏠렸고 백성들의 관심이 불교에 집중되었다.

비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다

진퇴양난이었다. 중 장원심에게 관심을 보이면 지금까지 추진해왔던 불교개혁이 탄력을 잃을 것이고 관심 밖으로 밀어내면 백성들의 원망이 두려웠다. 고민하던 태종 이방원이 지신사 황희를 불렀다.

"비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다. 중 장원심의 자비행이 가상하니 후히 상을 주어 돌려보내도록 하라."

비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지 중 장원심의 신통력으로 내린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또한 상을 주는 것도 비를 내리게 한 기도력을 높이 산 것이 아니라 장원심의 평소 자비를 치하한다는 것이다. 황희는 중 장원심에게 저포(苧布) 1필, 정포(正布) 25필, 미두(米豆) 20석을 내려 주어 돌려보냈다. 기층민들의 구휼에 힘쓰라는 것이다.

가뭄이 극성을 부리고 장원심이 신통력을 발휘했다고 불교개혁을 멈출 수 없었다. 지신사 황희, 서운관 제조 유양우, 대사헌 김첨 그리고 이조 판서 이직을 불렀다.

"부처의 도(道)는 허와 실을(虛實) 알기가 어렵다. 지금 이러한 가뭄은 하늘이 나를 견책(譴責)하는 것이다. 기우제를 지내는 것은 비록 전(典)이 아닐지라도 하늘에 내 뜻을 보이고자 함이다. 궁궐과 가까운 곳에 인소전을 지어 내가 아침저녁으로 봉사(奉祀)하기를 평시(平時)와 같이 하고자 하니 진전을 정성들여 짓고 정하게 제사를 마련하도록 하라."-<태종실록>

부처에게 비는 것보다 조상에게 빌겠다

인소전(仁昭殿)은 태조 이성계의 비(妃)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태종 8년(1408)에 태조가 승하하자 이름을 문소전(文昭殿)이라 고치고 태조와 신의왕후를 같이 모신 사당이다. 비가 오지 않으면 명산대천의 잡신에게 빌 것이 아니라 조상에게 빌겠다는 뜻이다.

태종 이방원은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에 대하여 생모 이상의 애틋한 정을 갖고 있었다. 하늘처럼 받들던 지아비를 제2의 여인에게 빼앗기고 숨 한 번 크게 쉬어보지 못했던 여자. 줄줄이 태어난 자식들에게 버릇없는 군인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노심초사했던 어머니. 지아비가 임금이 되고 두 아들이 왕이 되었지만 부귀영화를 누려 보지 못한 여인.

그러한 생을 살다간 어머니가 항상 가슴에 맺혀있었다. 그 어머니에게 아들이 왕이 되어 아침저녁으로 봉사(奉祀)드리면 어여삐 봐줄 것만 같았다.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고통을 짊어지고 힘들어 하는 자신의 짐을 조금은 덜어줄 것만 같았다. 실체가 없는 허무맹랑한 잡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보다 큰 감동으로 되돌려 줄 것만 같았다.

인소전을 세운 태종 이방원은 진전(眞殿) 봉사만큼은 직접 챙겼고 전국의 각 고을에 사직단을 세워 고을 수령들로 하여금 봉사(奉祀) 하도록 했다. 이로부터 군주를 후손으로 둔 조상신은 궁궐로 들어 왔고 개인은 신주(神主)라는 이름 하에 가정으로 들어왔다. 가뭄이라는 시련이 조상을 숭배하는 유교국가의 시금석이 된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유교국가 탄생이다. 이 때부터 조상의 위패를 모신 가로 6cm 세로 25cm 밤나무로 만든 사판(祠板)은 각 가정의 귀중한 물건이 되었다. 그 어떤 가보(家寶)보다도 소중히 모시는 대상이 된 것이다. 훗날 조일전쟁(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쟁 시기 피난 갈 때 다른 가재도구는 다 버렸지만 신주는 꼭 챙겼다.

의녀의 탄생

인소전을 지어 큰 물줄기를 제시한 태종 이방원은 가뭄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흉흉한 민심을 다잡기 위하여 대책을 내놓았다. 가뭄으로 가정이 해체되고 뿔뿔이 흩어져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백성들을 제생원(濟生院)에 모아 보살피도록 의정부(議政府)에 지시했다.

"환과고독(鰥寡孤獨)과 독질(篤疾), 폐질자(廢疾者), 실업(失業)한 백성들이 어찌 추위에 얼고 배고픔에 주려 비명에 죽는 자가 없겠느냐? 내가 매우 불쌍히 여긴다. 한양부와 유휴사는 물론 오부(五部)에 빠짐없이 알려 불쌍한 백성들을 거두어 보살피도록 하라."-<태종실록>

환가고독(鰥寡孤獨)은 홀아비, 과부, 고아와 자식이 없는 늙은이를 말한다. 600여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노숙자가 넘쳐나고 독거노인의 시신이 사후 몇 개월 만에 발견되는 현실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명을 받은 지제생원사(知濟生院事) 허도는 즉각 실행에 들어갔고 덧붙여 의견을 내놓았다.

"부인이 병이 있는데도 남자 의원으로 하여금 진맥하려 하면 그 병을 보이기 부끄러워 끝내는 보이지 않고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제생원과 궁사(宮司)의 동녀(童女) 중에서 10여명을 골라 맥경(脈經)과 침구(針灸)의 법(法)을 가르쳐 이들로 하여금 부인들을 치료하게 하면 보탬이 될 것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제생원(濟生院)에 명하여 나이어린 여자 어린이로 하여금 의약(醫藥)을 가르치게 하였다. 교육 대상자는 천출이었기 때문에 학문적인 기초가 부족하여 필수적인 의약과 산부인과에 관한 의술을 주로 가르쳤다. 의녀(醫女)의 출현이다.
#인소전 #의녀 #환가고독 #제생원 #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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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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