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 자본주의 체제와 맞짱 뜨다

[드라마 리뷰] <쩐의 전쟁>

등록 2007.06.05 14:36수정 2007.06.2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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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수목드라마 <쩐의 전쟁>

한 때 잘 나가던 아버지가 한 순간에 무너졌다. 마치 고속성장의 부실과 파탄이 급작스러운 외환위기의 충격으로 나타났듯이. 그리고 그 파산의 책임은 그의 자살로도 청산되지 못하고 대를 이어 빚으로 남는다. 우리가 외환위기 이후 불황의 깊고 어두운 터널을 그 여파로 맞게 되듯이.

그처럼 <쩐의 전쟁>(박인권 원작·이향희 극본·장태유 연출·SBS 수목드라마)의 현실감은 아버지의 죽음이 환기시키는 우리의 암울한 경제적 상황에 대한 상징적 상동성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금나라(박신양 분)의 아버지는 안정적인 중소 경영자에서 자금난과 사채빚으로 졸지에 패가망신하는 비운의 인물이다.

그 아버지가 '카드빚 쓰지 마라'는 유서와 함께 남겨놓은 부채는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돌아온다. 여기서 상속포기 같은 법적 구제를 들먹여봐야 그것이 신체포기각서의 위력을 능가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유능한 애널리스트 금나라의 참혹한 몰락은 극단적이지만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다. 그가 짊어진 것은 개인적 곤경 이전에 시대의 부채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 드라마는 영웅서사의 구조를 갖고 태어났다. 범상한 듯 보이는 인물은 추락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영웅임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추락해 본 자만이 스스로 날개 쓰는 법을 깨달아 저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 수 있는 법이다. 아버지의 죽음 뒤에야 비로소 아들은 진짜 남자가 되어간다.

그렇더라도 그의 추락에는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다. 어떠한 낭만도 감상도 개입할 여지없이 그는 삶의 가장 처참한 밑바닥까지 굴러 떨어진다. 거기서 인간성의 마지막 경계에 맞닥뜨린다. 자존심을 버리고 개처럼 무릎을 꿇을 것인가 아니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지킬 것인가 하는 아슬아슬한 경계 지점에 놓인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시험에서 그는 여느 영웅처럼 도도하고 도전적인 눈빛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는 그 경계에서 가까스로 버티기도 하고 맥없이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노숙자로 전락하여 쓰레기통을 뒤질망정, 돈 많은 허접한 동창에게 무릎을 꿇지는 않는다. 반면 사채업계의 큰손 봉여사(여운계 분)의 계략대로 그 손녀딸인 사랑하는 여자 이차연(김정화 분)을 선택하는 대신 그녀가 던지고 간 지폐를 주워 담는 수모를 무릅쓰기도 한다.

그는 끊임없이 경계 바깥으로 내몰리고, 그를 시험에 들게 하는 사건들의 연쇄 속에 놓인다. 그가 자신 앞에 놓인 시험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예측이 쉽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매 순간 그의 선택이 가져올 극적 반전을 가슴 졸이며 바라볼 수밖에 없다.

금나라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그렇게 두려움과 연민 사이에 놓인다. 나 역시 언제 저렇게 내몰릴지 모른다는 자기 투사에서 오는 두려움과 나는 아직 저 위치는 아니라는 안도에서 오는 그의 비참함과 처절함에 대한 연민. 두려움과 연민의 대상으로서 그가 그 끝 모를 나락에서 어떻게 헤쳐 나올 것인지가 드라마 최대의 관심사가 된다.

그의 추락이 바닥을 치는 순간, 그가 쓰레기통 속 쥐약 묻힌 빵을 먹고 죽었다 깨어난 순간, 추락에서 비상으로 영웅서사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그를 재기와 비상으로 이끄는 것은 그가 경계의 바깥으로 내몰릴수록, 점점 비루해지고 하찮아질수록 그 안에서 폭발할 듯 꿈틀대는 오기와 원한이다. 드디어 금나라의 대반격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웅이 뒹구는 곳은 어떤 이상이나 신념이 지배하는 고결하고 우아한 세계가 아니다. 어떤 영광도 명분도 존재하지 않는, 날것의 욕동들이 부딪치고 엉켜있는 진흙탕 싸움판이다. 그 곳은 추악과 불결을 가리는 어떠한 베일도 없이 그 자체가 적나라하게 표면에 떠오르는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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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금나라가 그런 사채업계에 뛰어들어 물불 안 가리고 무자비한 싸움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미 더 이상은 비천해질 수 없는 비천해질 대로 비천해진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자신의 미래를 저당 잡힌 인생이었던 것이다. 그가 아무리 정도(?)를 걷는 사채업계의 전설 독고철(신구 분)의 문하에 든다 해도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철저하게 밑바닥을 휩쓸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필요한 누구든 그 밑에 들어가고, 사채빚을 회수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악랄한 사채업자에게 빌붙고 조폭 두목에게도 고개를 조아리며, 존경하는 스승과 가여운 그의 딸 서주희(박진희 분)에게마저 자신의 본색을 감추지 않는다.

남보다 약간 좋은 머리에 깡과 악으로, 근성과 배짱과 맷집으로, 여기에 뻥과 구라까지. 죽음도 두려워 않는 그는 비열함과 사악함마저 끌어안는다.

이처럼 그는 자신을 바닥까지 내몬 그 세계에서 도망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세계의 중심을 향해 돌진해가는 것이다. 이는 그가 절대빈곤의 밑바닥에서 맨몸으로 일어서기 위해 마지못해 선택하는 단순한 생존투쟁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단지 돈에 한 맺힌 사람이 꿈꾸는 돈에 대한 집착과 야망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체제에 대한 복수다. 그 체제와 온전히 하나가 됨으로써만 그 체제의 중심에 파열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러한 형태의 복수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사채업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채업자가 되기 위해 살아난 것이다. 그가 죽음을 넘어 이 잔인한 세계에 맞서 택하는 길은 스스로가 '돈신'이 되는 것이다. 자신을 철저히 망가뜨리고 억압했던 돈에 맞서 그 돈을 거꾸로 지배할 수 있는 돈신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돈신이 됨으로써 궁극적으로 돈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그의 원한과 복수가 단지 악덕 사채업자 마동포(이원종 분)나 봉여사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데서 명확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쩐의 전쟁'은 쩐을 둘러싼 전쟁이 아니라 바로 그 '쩐과의 전쟁'이다. 자본주의의 유일무이한 절대지존 쩐과의 전쟁인 것이다. 자본주의의 가장 최고의 가치이면서 동시에 가장 더럽고 구린 것, 가장 직접적이고 즉물적인 동시에 모든 사물의 가치를 동일자로 치환하는 고도로 추상적인 것, 돈이라는 표상의 이러한 이중성이야말로 금나라가 펼치는 '돈과의 전쟁'의 확장된 의미를 설명해준다.

정말로 그의 싸움은 사채업계 내부의 이전투구에 국한되지 않는, 현재의 금융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겨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본주의의 가장 추악하면서도 허약한 심장부를 향해 공격의 화살을 빼든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숙적 마동포나 봉여사의 대리인 하우성(신동욱 분)과의 대결은 그가 사채업자로 성공하는 데 필수적인 단계적 수순이 될 것이다. 이제 서서히 드러나는 사각의 멜로라인은 네 사람의 서로 완전히 다른 포지션으로 인하여 금나라의 행보를 가로막기도 하고 부추기기도 할 것이다.

착한 사채업자가 되고자 나선 이차연과 양심이라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는 서주희, 두 여인의 대척점에 있는 신사적인 냉혈한 하우성, 이 세 사람 모두와 다른 지점에서 이들 사이를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금나라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한발 한발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그의 전쟁이 결국 패배로 끝나리라는 불길한 예감은 어쩔 수가 없다. 그것은 필패가 예견된 개인과 세계의 '맞짱'이기 때문이다. 체제 내로 돌진하여 체제 중심에서 파열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정확히 자멸의 몸짓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는 사채업자의 종말, 종국에 실패하거나 혹은 돈의 노예가 되거나. 그는 자신이 스스로 그 본보기가 되어 장렬한 최후로써 체제의 한계를 증거할 것이다. 금나라의 영웅서사가 비극성을 띨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쩐의 전쟁 #박신양 #박진희 #사채업자 #수목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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