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평에서 쓴 어느 생명주의자의 옥중 편지

양홍관의 <생명, 꽃 피어나는 소식>

등록 2007.06.05 09:23수정 2007.06.05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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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홍관의 책 ‘생명, 꽃 피어나는 소식’ ⓒ 한길

양홍관의 책 <생명, 꽃 피어 나는 소식>을 받아 읽었습니다. 김철성님의 예쁜 그림까지 곁들여진 책은 그가 7년여의 옥중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글을 모은 책입니다.

그가 한때 옥고를 치렀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과연 그 안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일을 대놓고 물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피차 주고받기 거북하고, 돌아보기도 괴로운 기억들이었으니까 그저 '고생 많이 했구나'라고 마음속으로만 가늠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펴낸 책을 읽으며 그 말 못할 궁금증을 늦게나마 씻어낼 수 있었습니다.

"안에 갇힌 사람은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키느라 힘들었고, 밖에 있는 사람은 갇힌 사람을 걱정하며, 살림을 꾸려나가자니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안팎으로 힘들던 시절에 그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띄운 이 영어(囹圄)의 글발들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보내던 그의 외침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동학의 횃불이 활활 타오르던 정읍에서 태어나, 천주교 종단의 동성고교를 나와, 민족혼이 불타는 흥사단을 거쳐, 동국대에서 불교를 아우르는 그의 생각들은 그만큼 다채롭고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나는 이 책을 읽어가며, 매사에 긍정적이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결코 굽힘이 없는 그의 의지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성품은 의롭지 못한 것에 맞설 때는 겨울바람처럼 준엄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대할 때면 봄볕처럼 다사로워 세상 만물을 다 품으려는 '포월'의 면면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책장을 덮고, 마침 허세욱 열사 49제가 있었던 모란 민주열사 묘역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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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열사 묘소를 찾은 양홍관 ⓒ 서희정

- 꽤 시간이 지난 일인데 책을 내게 된 동기는?
"1998년 광복절 특사로 옥에서 나오며 몇 가지 다짐을 한 바가 있다. 무엇보다 내가 지닌 신념을 대중과 함께 나누며, 생활 속에서 실천해 나가고자 스스로와 약속했다. 7년여 동안 옥중에서 화두로 잡았던 생명, 협동, 평화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노동자생산협동조합, 팔당 생명 생활협동조합, 생명 축제, 마음 운동 등 내 나름대로 애를 써 왔다. 이제 출옥 후 10년이 되는 지점에서 옥중에서 쓴 글들을 되읽으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생각을 같이하기를 바라는 분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신념이라는 문제라니 생각난다. 책을 관류하는 주체사상과 생명사상에 대한 만남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1986년 당시 다니던 대학에서 총학 운영위원, 학회 연합회장 등을 맡으며 선도적 투쟁에 앞장섰다. 그 가운데서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론을 바탕으로 한 운동의 전위와 선도 역할이 우리네 상황과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운동의 전위는 선도 세력이 아니라, 국민 대중이 주체여야 하며, 운동가는 그룰 지원하고, 봉사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문건을 통해 처음 주체사상을 접하였는데, 철학도였던 나는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결정한다'는 주체사상을 철학적 테제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런 주체 의식은 우리 사회와 민족적 자주의식과 잇대어지며 흥사단에 들어가 민족주의적 경향을 얻는다.

그러던 중, 1988년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안기부에 끌려가 20일간 고생을 하고, 6개월간 옥에 갇혀 지냈다. 이때 '신과학운동'이나 동학 관련 서적을 탐독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환경과 생태에 대한 관심이 커져갔다. 제정구 의원의 권유로 장일순님을 만나고, 또 김지하 시인의 생명사상 등에도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김지하 시인을 비롯해 많은 민주 인사들이 출옥 후 생명 사상 등을 주장하며, 날카롭게 대치되던 민중 항쟁의 각이 무뎌지고, 전선이 혼미해지는 상태에서 적잖은 논란과 비판이 없지 않았다. 주체사상가에서 생명운동가로 변모한 것도 그런 연장에서 받아들여야 하는가?
"궁극적으로 주체사상과 생명사상은 배치되거나, 대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생명사상이 주체사상을 '포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생명사상은 인간을 우주적 존재로 인식하고 서로를 '섬기고 모셔야' 하는 존재임을 뜻한다. 모든 것을 포용하되, 이를 방해하는 독재 정권이나 폭력적 사회구조를 극복해내는 것도 (넓은 의미의) 생명사상이라 본다.

또한 모든 생명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본능적 이기심이 있는데, 이것을 '사랑'으로 극복해야 한다. 사랑이란, 사람과 사람이, 생명과 생명이 서로를 살리고 모시는 관계성의 성찰에서 이루어진다."

"우주는 생명 유기체이다"라는 원리로 인하여 물질과 물질과의 관계를, 의식과 물질과의 관계를,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를 동격의 생명과 생명과의 관계로 전환함으로써 영원한 삶,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며, 사랑을 갖게 되었다오.- 본문 25쪽 '우주는 생명 유기체' 중에서

-종교에서 흔히 말하는 '사랑'은 헌신과 희생을 강조하는 일방성에 있는데, 지금 말하는 '사랑'은 상호 소통하고 협동하는 '관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동안 해 온 생명살림연대, 생활협동조합, 지역 활동 등도 이러한 소통과 협동으로서의 관계성, 즉 '사랑'에 근거하고 있나?
"그렇다. 한 사회에서도 그 구성원이 서로를 존중하고 소통하며, 서로 협동하는 관계성을 통해 그를 억압하는 폭력적 힘에 대해 싸워야 한다. 모든 존재는 관계성, 의식성, 창조성, 자주성, 통일성의 본질적 특성을 지닌다. (이런 점에서 주체사상과 생명사상은 그다지 멀지 않다)."

-생명사상이 지닌 '사랑'과 폭력의 극복이라는 말에 연관하여 묻겠다. 성 고문에 대해 책 속에도 언급된 바가 있는데, 그 일의 전말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 일은 2004년, 야당의 대정부질문에서 '국회 내 간첩' 운운하며, 이철우 의원을 지목한 데서 발단이 되었다. 이철우 의원에 대한 사상적 검증으로 비화되며, 과거 그를 '조국통일 애국전선' 조직에 가입을 권유한 일로 내 문제가 불거졌다. 그 과정에서 지난 날, '민족해방 애국전선'을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이라는 허상의 조직으로 왜곡한 당시 안기부의 행각은 고문에 의해 날조된 것임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 고문의 근거로서, 당시 안기부 수사관들에 의해 '사장'으로 불리던 정형근 의원의 '귀두치기' 등을 KBS 라디오와의 대담에서 공개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정형근 의원은 나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하여, 현재 검찰에서 조사가 진행 중이다. 얼마 전에도 검찰에 들어가 피고소인으로 조사를 받고 왔다."

-고문 사실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시 '손가락 비틀기', '눈알 찌르기'등의 다른 고문도 받았지만, 특히 '귀두치기' 고문에 대해서는 견딜 수 없는 인간적 모멸감을 느껴, 당시 고문을 한 사람을 각별히 기억해 두었다. 나중에 수사관에게 물으니, 자기네 '사장'이라고 말하여 그가 당시 수사의 책임자임을 알고 있었다. 이번 검찰 조사에서도 당시 내가 최후진술과정에서 이미 '귀두치기'등의 고문 받은 사실을 진술하였으며, 그런 사실을 2년 후 옥중에서 아내에게 쓴 편지에 적었고, 변호사 접견과정에서 성 고문 사실을 진술하여 변호 조서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사실 등으로 이런 주장이 돌발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진술한 사실임을 밝혔다."

92년 9월 12일, 추석 다음 날로 기억됩니다. 당신과 아이를 두고 남산으로 초대(?)되어 갈 때 죽기보다는 살아 이기리라. 그리고 역사에 증언하리라 라고 두 주먹, 굳세게 쥐었답니다. 2년이 지난 지금!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었던 성 고문과 모욕, 그리고 육체가 있음이 혐오해지는 구타와 손가락 비틀기… 지금도 수시로 꿈에서 쫓고 쫓기는 일들이 벌어지고, 남산 지하실에서 신음하며 반쯤 죽어 있는 저를 만난답니다. - 본문 246쪽 '비어 있음을 간직한 채로 충만함' 중에서

-그 말이 사실이라면, 고문을 받은 사람은 현재 '명예훼손혐의'로 고발되어 있고, 고문을 한 사람은 오히려 고발을 하고 있는 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고문 받은 사실에 대한 대응 의사는 없는가?
"심한 고문을 겪은 사람은 고문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꺼리는 법이다. 지나간 악몽이 다시 논란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고문이다. 또한 당시 고문을 한 사람들도 당시 군사정권의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내 싸움의 대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앞으로 활동 계획이 있다면?
"세 가지 일에 힘쓰고자 한다. 첫째는 생명 살림의 사상문화운동에 미력이나마 힘을 더하고 싶다. 두 번째로는 협동조합 운동을 통해 생산현장과 소비자들이 함께 소유하고, 운용하며, 나누는 네트워크 살림망을 만들고 싶다. 끝으로 온갖 폭력과 독재에 맞서는 평화운동을 위해, '생명 협동 평화재단'을 마련하기 위해 뜻을 모으고 있다."

-이번 책을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했다는데?
"2007년 6월 16일에 '봉인사 한길정진원'(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2리 소재)에서 독자들과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누구나 함께 하실 수가 있는데, 미리 예약을 해 주신 100분에게는 이번 책에 좋은 그림을 그려 주신 김철성님이 직접 그림을 그린 부채를 나눠 드리려 한다. 마침 단옷날을 맞아, 전통 풍속을 살려 '제호탕(전통차) 나누기', '창포물에 머리감기' 등의 행사도 한다. 함께 하실 분들은 이메일로 알려 주시면 된다." (이메일 san40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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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홍관 님(왼편)과의 대담 ⓒ 서희정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설 때는, 민주 열사들이 누운 모란 공원묘역이 어느 덧 땅거미에 덮여가고 있었습니다. 모든 걸 지우고 잊게 하는 것이 세월이라지만, 때로는 잊어서는 안 될 것들도 우리 곁에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곁에서 바라보던 양홍관은 늘 모든 걸 포용하는 부드러운 힘을 느끼게 했습니다. 지난한 지역 활동 중에도 늘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라며 얼굴에 떠올리던 그의 웃음이야말로, 부드러움이 지닌 힘, 바로 그가 말하는 생명, 평화, 협동의 힘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비록 0.72평의 좁은 옥중에서 쓴 글이지만, 그가 품은 담대하고 너른 생각의 폭과 깊이는 우주와 맞닿는 자유를 느끼게 합니다. 눈앞의 이해와 편견에 붙들려 넓은 세상에서도 좁게 갇혀 지내는 일상에서, 이웃과 세상을 '도울' '생명주의자 양홍관'의 이번 책이 좀더 넓은 사랑과 정대한 평화의 바다로 나아가게 하는 돛과 전망대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저자 소개] 양홍관이 지나온 길

1959년 정북 정읍 출생.
1978년 서울 동성고 졸업.
1987년 전대협 1기 동국대 대표
1988년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 선고
1992년 ‘민족해방애국전선’사건으로 징역 12년 선고
1998년 광복절 특사로 7년만에 가석방
2000년 남양주, 양평에서 생명살림운동에 참여
남양주 세계야외공연축제 시민추진 대표 및 팔당생명살림 생활협동조합 이사장 역임
2003년 사면복권
2004년 생태농장 초록향기 농장지기
2006년 민주노동당 남양주시장 후보

현재 생명살림 마음문화원 이사장
생명.협동.평화 재단 준비모임 대표
생태 산촌 만들기 운영위원(사)
생명평화결사 운영위원
6.15 공동선언 실천 경기본부 공동대표 및 운영위원
/ 양홍관의 자서 중에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추후 '남양주뉴스'에도 실리게 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추후 '남양주뉴스'에도 실리게 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생명, 꽃피어나는 소식 - 생명주의자 양홍관 0.72평에서 보낸 편지

양홍관 지음, 김철성 그림,
한길(봉인사), 2007


#양홍관 #정형근 #주체사상 #생명사상 #김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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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면 광대울에서, 텃밭을 일구며 틈이 나면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http://sigo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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