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바닷가, 오포우테레 비치

[뉴질랜드 여행기 27] 코로만델 반도의 알려지지 않은 바닷가 몇 곳 ③

등록 2007.06.01 14:56수정 2007.06.0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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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의 코로만델 반도 일주 여행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이번 2박 3일간의 짧은 여행이 여행정보 안내책자에서 코로만델 반도를 묘사하는데 사용한 다음과 같은 네 개의 형용사의 진위를 확인하는 여정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다듬지 않은(rustic), 편안한(relaxed), 장엄한(magnificent), 그리고 훼손되지 않은(unspoiled).

이미 지난 글들을 통하여 나는 이러한 형용사들이 과장이 아닌 실제에 입각한 사실이었음을 밝혔다. 드라이빙 크릭 레일웨이에서 바라본 '장엄한' 풍경과 캐씨드럴 코브에서 마주친 '훼손되지 않은' 대자연의 모습, 그리고 핫 워터 비치에서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던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가 그것을 웅변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여행정보 안내책자에서 가장 먼저 내세웠던 '다듬지 않은(rustic)' 코로만델 반도를 확인하는 것만이 남아 있는 셈이다.

'다듬지 않은' 풍경이란 어떤 풍경을 말하는 것일까? 짐작건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닿았더라도 아주 최소한일 뿐이어서 야생의 상태를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풍경일 터이다.

그렇다면 여행 둘째 날 비포장도로를 30여 분 동안 달려가서 마주했던 무인지경의 호젓한 바닷가 오피토 비치(Opito Beach)가 어쩌면 그런 풍경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호젓한 바닷가에도 집이 두 채나 있었으니 섣불리 단언하기 힘들었다. 그보다 더 적막하고 인적 드문 야생의 풍경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런 풍경이 정말 있었다. 핫 워터 비치에서 소금 온천을 즐길 수 없게 됨에 따라 시간 여유가 생긴 여행 셋째 날 오후, 우리는 드디어 그러한 '다듬지 않은' 코로만델의 풍경을 오포우테레 비치(Opoutere Beach)에서 만난 것이다. 그건, 우리가 놓친 소금 온천 대신 주어진 축복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야생의 바닷가, 오포우테레 비치

핫 워터 비치를 출발해서 25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던 우리는, 코로만델 반도 동남부 지역의 중심도시인 팡가마타(Whangamata)를 약 20km 앞두고서 좌측으로 갈라지는 도로를 만났다. 구불구불 이어지고 절반쯤은 비포장도로인 그 길로 접어들어 10분 정도를 달리자 널따란 공터가 나타났다. 차가 한 대도 서 있지 않았지만 오포우테레 비치를 찾아오는 이들을 위한 주차장임을 나는 바로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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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포우테레 비치로 가기 위해서 건너야 하는 나무 다리. 돌아나오는 길에 찍은 사진이라서, 바닷가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는 쪽으로 가야 나온다. ⓒ 정철용

그곳에서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바닷가로 가려면 맹그로브가 자라나고 있는 갯벌 위에 놓여 있는 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 하지만 다리를 건넜다고 해서 바로 해변이 펼쳐지는 것도 아니었다. 10분 정도 키 큰 나무들과 작은 관목들이 빽빽하게 뒤섞여 자라고 있는 숲을 통과해야 했다.

숲의 꼭대기를 덮고 있는 키 큰 나무들의 우듬지 잎사귀에 부딪힌 오후의 봄 햇살이 마치 비듬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는 숲은 고요했다. 앞서 가는 나와 뒤처져 따라오는 아내와 딸아이의 발걸음 소리만이 적막을 깨뜨릴 뿐이었다. 아니, 가만히 발걸음을 멈추고 있으면 가늘게 새 소리도 들렸다. 인적 드문 이곳에 나타난 우리 세 사람을 경계하느라 한껏 낮춘 목소리로 우는 것이리라.

드디어 내 시야에 모래 언덕 너머로 짙푸른 바다가 들어왔다. 5km에 달한다는 길고 하얀 모래밭도 눈부시게 펼쳐졌다. 시선을 어디에 두든 빽빽한 나무들에 가로막히고 마는 숲에서 나와 어느 방향도 시야가 거칠 것 하나 없는 푸른 바다와 눈부신 모래밭을 만나는 일이란 얼마나 상쾌한 경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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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바닷가에서는 햇빛과 파도와 바람과 모래가 함께 합심하여 시간을 정지시켜 놓은 듯했다. ⓒ 정철용

내 시선이 가 닿는 곳 그 어디에서도 인공의 흔적이 보이지 않을 듯했던 이 바닷가에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이 하나 눈에 띄었다. 뉴질랜드 환경보존부에서 모래 언덕에 세워놓은 안내판이었다. 바람으로 인한 침식을 막기 위하여 모래 언덕에 심어 놓은 풀들을 보호하자는 안내판 너머 모래 언덕에는 풀들과 꽃들이 자라고 있었다.

풀들은 누렇게 말라서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뿌리가 아직 살아 있는 강인한 풀이었고 꽃들은 미세한 모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태양을 닮은 색깔과 코끝으로 전해져 오는 향기가 숲이나 공원에서 만나는 것들보다 더 강렬한 야생화였다. 풀들은 환경보존부의 직원들이 일부러 심은 것일 테지만 꽃들은 저절로 피어난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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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언덕에서 흔들리고 있는 풀들과 꽃들과 더불어 나도 흔들렸다. ⓒ 정철용

모래 언덕에서 흔들리고 있는 풀들과 꽃들처럼 나도 바닷바람을 맞으며 오래 흔들렸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흔들려도 인간의 옷을 벗지 못할 것이며 야생에 도달하지도 못할 것이었다. 햇빛과 파도와 바람과 모래가 함께 합심하여 시간을 정지시켜 놓은 듯한 야생의 바닷가에서 오로지 우리 세 사람만이 야생이 아닌 인간이었다. 그 깨달음이 슬픔으로 번지기 전에 나는 떠나야 했다.

돌아 나오기 위하여 다시 들어간 숲에서 우리는 덤불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토끼의 순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딸아이 동윤이의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겁을 집어먹은 토끼는 재빨리 도망쳐서 다른 덤불 속으로 숨었다. 동윤이는 그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으나 나오지 않아서 결국 돌아섰다.

동윤이의 아쉬움이 놓쳐버린 토끼에 있었다면 나의 아쉬움은 이렇게 잠시 동안만 머물다 가는 야생의 바닷가에 있었다. 숲의 곳곳에 거미들이 쳐놓은 거미줄에 내 아쉬운 마음이 자주 걸렸다. 그렇게 아쉬운 마음만 남겨두고 우리는 떠났다. 우리가 떠나서 오포우테레 비치는 다시 순수한 야생을 회복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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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마음을 숲속의 거미줄에 걸어놓고 나는 떠났다. ⓒ 정철용

오포우테레 비치는 훗날 언젠가 다시 찾아왔을 때에도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반겨줄 것인가. 5km에 이르는 바닷가와 그 바닷가로 이어지는 숲과 바닷새들이 서식하는 그 주변 갯벌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 일대는 환경보존부에 의해서 개발이 금지된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니 그럴지도 모르리라.

그러나 이 바닷가에 닿기 전 잠깐 들렀던 작은 마을 파우아누이(Pauanui)를 생각하니 그렇게 낙관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우아누이는 첫눈에 보기에는 깨끗한 거리와 특색있게 지은 새집들이 눈에 많이 띄어서 참으로 호감이 간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곳의 여행자정보 안내센터에서 집어온 마을 소개 책자를 읽어 내려가자, 나의 호감은 금세 씁쓸한 반감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 책자에 따르면, 최근에 개발된 파우아누이는 코로만델 반도의 여러 휴양마을 중에서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인데, 상주 인구는 1000명이 채 안 되지만 집은 2000채가 넘는다고 한다. 이것은, 집들의 절반 이상이 오클랜드 부유층의 별장으로 지어진 것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보통 주말에는 1500명 정도까지 유동 인구가 늘어나고, 본격적인 휴가철에는 평소의 열 배도 더 되는 1만2000명이 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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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아누이에서 보았던 이 독특한 디자인의 집도 결국은 돈 많은 어느 오클랜더의 별장일 것이다. ⓒ 정철용

이 마을에서 오포우테레 비치까지는 차로 겨우 30분 정도밖에 안 걸리니, 휴가철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오포우테레 비치를 다녀올 터인데, 그 몸살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그냥 조용히 왔다가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난다면 그래도 다행이련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휴가철인 여름 몇 달 동안은 오포우테레 비치에 환경보존부의 직원 하나가 감시인으로 늘 상주하는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 터였다. 사람들의 손길로부터 야생의 바닷가를 보존하기 위하여 사람을 두어 감시해야 하는 역설이 가슴에 맺혔다.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인적 드문 자연마저도 보존하기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포우테레 비치를 출발해 또 다른 휴양마을인 오네마네(Onemane)와 제법 번화한 작은 도시인 팡가마타(Whangamata)와 아직도 금을 채굴하는 금광 도시인 와이히(Waihi)에도 들렀다. 그러나 오포우테레 비치에서 이미 가장 멋진 풍경을 보고 온 우리의 눈을 사로잡을만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저녁 7시 무렵, 오클랜드의 우리 집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는 우리의 신발과 옷의 주머니에서 모래 한 줌이 떨어져 내렸다. 아마도 그 모래들은 우리가 2박 3일 동안 누볐던 코로만델 반도의 곳곳에서 조금씩 묻어온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그것이 오포우테레 비치의 모래라고 믿기로 했다. 아쉬워하면서 떠난 우리를 위하여 야생의 바닷가가 우리의 신발 속에, 옷의 주머니 속에 우리 몰래 넣어준 선물이라고.

덧붙이는 글 | 2004년 9월에 다녀온 코로만델 반도 여행기를 이번 일곱번째 이야기로 매듭을 짓습니다. 이어지는 뉴질랜드 여행기는 2005년 10월 초에 다녀온 뉴질랜드 북섬의 동남쪽 해안지역 이야기로 만나뵙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2004년 9월에 다녀온 코로만델 반도 여행기를 이번 일곱번째 이야기로 매듭을 짓습니다. 이어지는 뉴질랜드 여행기는 2005년 10월 초에 다녀온 뉴질랜드 북섬의 동남쪽 해안지역 이야기로 만나뵙겠습니다.
#오포우테레 비치 #뉴질랜드 #코로만델 반도 #바닷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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