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쌀밥에 날계란 하나, 추억이라는 양념 한 숟가락

유학생 시절 먹던 그시절 그 맛-1

등록 2007.06.08 14:44수정 2007.06.09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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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잡곡밥을 먹어야 하는 남편 탓에 하얀 쌀밥을 먹을 기회가 거의 없다. 물론, 잡곡밥이 훨씬 몸에 좋다는 사실은 알고 있고 인정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몸에 좋은 음식보다는 입에 맛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아무리 몸에 좋다는 음식도 맛이 없으면 잘 먹지 않고, 소위 몸에 안 좋다는 불량식품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서 남편의 잔소리를 듣곤 한다.

오늘 드디어 쌀밥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깜박 잊고 잡곡을 불려놓지 않았는데 바로 밥을 먹어야 하기에 이참에 하얀 쌀밥을 했다. 그렇게 김이 모락모락나는 하얀 쌀밥을 보니, 옛날 처음 유학생 시절 기숙사에서 먹던 계란밥이 생각났다.

하얀 쌀밥 한 그릇을 퍼놓고 냉장고 문을 열고 날달걀 하나를 깼다. 노른자 색깔이 선명한 것이 그 시절의 그 맛을 생각나게 했다. 간장을 한 숟가락 넣고 비볐다. 달걀이 채 익지 않아서 질척질척해진 계란밥은 사실 맛있는 음식이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학교 기숙사 식당에서 매일 기름지고 느끼한 음식만 먹던 시절에는 컵라면 하나, 계란밥 한 숟가락이 너무도 그리웠다. 기숙사에 사는 유학생이 어디 전기밥솥이 있었겠는가?

다행히 가족이 모두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밥솥과 쌀이 있어서, 작은 전기밥솥에 하얀 쌀밥을 해서는 기숙사 식당에서 아침 식사 때 스크램블에 넣는 달걀을 하나 얻고, 전에 학교 앞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가져온 간장 한 봉지를 넣고 비볐다. 그럼, 어디서 모였는지 4-5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각자 숟가락 하나씩 들고 나타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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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한 하얀 쌀밥에 날달걀과 간장을 넣고 비빈 계란밥 ⓒ 구은희

김치도 다른 아무 반찬도 없이, 하얀 쌀밥에 날달걀하고 간장 넣고 비빈 그 밥이 그리 맛이 있었을 리 없지만, 그 당시는 그것이 최고의 식사였다. 힘든 유학생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처럼 그때의 그 맛도 지금은 그리운 맛이 되었다.

필자는 어르신들께서 꽁보리밥에 된장찌개를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게 뭐가 맛있을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분들 역시 진짜로 그것이 맛있기보다는, 추억이 담겨 있어서 맛있게 느끼신 것이라는 것을 계란밥을 비비면서 깨달았다.

옆에서 필자가 계란밥을 만들고 그것을 아무 반찬도 없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던 남편이 한마디 한다.

"그게 맛있어? 맛있는 반찬 다 놔두고 웬 청승이야?"

아무래도 좋다. 오늘만큼은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행복하다. 추억이라는 양념이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다. 가끔 입맛이 없을 때 그 시절 그 맛을 느껴보는 것도 나른한 봄날을 이기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 맛은 그 시절 그 추억의 시간을 지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독특한 맛일 것이다. 남편에게는 청승으로 보이는 계란밥을 맛있게 먹는 필자처럼, 각자에게는 추억이라는 양념이 가져다주는 그리움의 맛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구은희 기자는 미국 실리콘밸리 지역 어드로이트 칼리지 학장이자 교수, 시인입니다.

덧붙이는 글 구은희 기자는 미국 실리콘밸리 지역 어드로이트 칼리지 학장이자 교수, 시인입니다.
#날계란 #쌀밥 #비빔밥 #유학생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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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한국어 및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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