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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과 내용 모두 '폼생폼사'

끝까지 폼나게 간 영화 <달콤한 인생>

05.04.07 05:58최종업데이트05.04.0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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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감독은 지금까지 <조용한 가족> <반칙왕> <장화, 홍련>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해 왔다. 특히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는 것이 한눈에 확인되는 색감, 조명 등 시각적인 요소는 김지운 영화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스타일 - 역시! 김지운

▲ 폼나는 조직 이인자 선우가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지옥 같은 여정. 돌이킬 수 없는 그는 끝까지, 폼나게 간다.
ⓒ 봄
<달콤한 인생> 역시 공들인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 영화다. 느와르 특유의 어두움은 극적인 명암 대비의 조명으로 표현된다. 또한 소품과 배경 인테리어의 색감은 등장인물의 심리와 처지에 적확하게 부합되면서 아주 세련된 화면을 제공한다.

주인공 선우(이병헌 분)가 1인자(강 사장, 김영철 분)에게 신임 받는 오른팔일 때는 호텔 스카이 라운지의 세련된 붉은 색조가, 넘버투의 화려함 뒤 해결사의 개 같은 일상은 스카이 라운지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퀴퀴하고 습한 통로의 음습함이 화면을 지배한다. 또 천국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선우는 회색이 도는 황토빛 진흙의 질감과 색감으로, 자신이 왜 이렇게 됐는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가해함과 어떻게 해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막막함은 황량한 사막과 같은 거친 입자로 표현된다.

극단적인 명암 대비, 붉은 핏빛과 검은 어두움은 느와르 감독이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관용적인 이미지이지만, 김지운 감독의 손을 거친 빛과 색은 어느 느와르보다 세련된 화면을 자랑한다.

<달콤한 인생>의 세련된 느와르 특유의 화면이 더욱 마음에 드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듯 등장인물의 상황과 심리에 적확하게 맞아떨어진다는 데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주제는 영화 메인 카피이기도 한 '돌이킬 수 없다면, 끝까지 폼나게 간다!'라고 할 수 있는데,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형식미는 '폼생폼사'라는 이 영화의 주제 의식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 인물들- 이병헌에게 '뻑' 가다

<달콤한 인생>의 또 다른 매력을 꼽자면, 역시나 배우들이다. 주인공 선우 역의 이병헌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비정한 조직원과 여자 앞에서 제대로 말도 못하는, 사랑 한번 못해 본 순진한 청년을 오가며, 자신이 지옥에 떨어진 이유를 알기 위해 동료들을 무차별 살상하는 폭력배와 "왜 나에게 이렇게 했나요?"라고 울부짖으며 투정하는 무력한 아들을 오가며, 극단의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보는 내내 이병헌 영화 찍느라 정말 고생했겠다 싶은데, 그 고생이 한 신도 묻히지 않고 모두가 관객과 대화를 하는 걸 보니 고생도 할 만하겠단 생각이 든다. 아마도 <달콤한 인생>을 보고 이병헌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자 아무도 없으리라. 사실 <번지점프를 하다>를 보며 이병헌이 참 달콤한(!) 배우란 생각은 했었지만 왠지 정이 가지 않았는데, 난 이 영화를 보고 한마디로 배우 이병헌에게 '뻑' 갔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오로지 이미 공인된 매력남 이병헌에게만 기대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화면에 등장하는 시간이 몇 분이 됐든 간에 제 역할을 충실히 함으로써 배역이 가지는 성격을 충분히 보여 준다.

보스 역의 김영철은 보스 특유의 위엄과 카리스마, 비정함과 더불어 쪼잔함과 질투, 무모함을 아낌없이 보여주며 자신의 매력을 한껏 과시한다.

어디 김영철뿐이랴. 마치 평생 모짜르트를 시기하며 살아야 했던 살리에르처럼 늘상 선우와 비교당하고 무시당하면서 비열함을 키워왔던 문실장 역의 김뢰하는 <살인의 추억>에서 보여준 감칠맛 나는 연기 그 이상을 보여준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늘 덜 떨어진 아저씨나 우유부단하고 특징이 없어서 존재감조차 느낄 수 없는 배역만 맡았던 이기영은 사람 죽이는 것을 닭 모가지 비트는 것보다 더 쉽게 여기는 듯, 아니 아예 그런 생각조차 없는 듯한 비정을 넘어선 무심함의 극단을 달리는 암살자 오무성을 멋들어지게 연기한다.

또 무기밀매 중간 접선책 명구 역의 오달수는 요즘 가장 잘나가는 조연배우(!)라는 명성에 걸맞게 출연 시간이 몇분 되지 않는 비중 적은 조역임에도 불구하고 연기에서 빛이 난다.

이 외에도 무기밀매 조직 보스 역의 김해곤이나 시트콤에서 가볍게 얼굴을 비쳤던 진구가 분한 선우의 충복 민기 등 빛나는 조연은 수도 없이 많다.

▲ 김지운 감독의 '폼생폼사'를 든든히 받쳐주는 것은 주연배우 이병헌을 비롯한 배우들의 폼나는 연기. 특히 백상파 보스 역을 맡은 황정민의 연기는 실로 눈부시다.
ⓒ 이영주
그러나 <달콤한 인생> 최고의 조역을 꼽으라면 나는(아마 다른 관객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백상파 보스 역을 맡은 황정민을 꼽겠다. <로드무비>의 인상적인 동성애자 대식으로 처음 스크린에 얼굴을 알린, 그러나 연극판에서는 이미 짜하게 소문난 연기파 배우 황정민은 <달콤한 인생>에서 선우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계기를 제공하는 비열한 양아치 보스로 분했다.

이전에도 연기를 잘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백사장은 이전까지 영화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황정민 연기의 또 다른 정점을 보여준다. 이전까지 황정민은 비열한 지식인이 제격인(<바람난 가족>의 영작) 배우라고만 생각했던 내 얕은 영화 감상 경험의 뒤통수를 내리쳤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 영화에서 황정민은 마치 신내림을 받은 무당 같았다.

느와르도 한국에서 만들면 다른가?- 선(禪)의 느와르

느와르라고 하면 보통 홍콩영화를 떠올린다. <영웅본색> <첩혈쌍웅> <천장지구> 등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 알란 탐 등이 쌍권총을 휘두르고 바바리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싸우던 그 영화들.

<달콤한 인생>의 선우 역시 마치 주윤발처럼 깔끔한 턱시도 차림이 잘 어울리는 조직원을 멋지게 연기한다. 쌍권총은 아니지만 현란한 총격술과 발차기, 17 대 1의 격투기, 깊은 구덩이에 생매장을 당하고도 꾸역꾸역 땅 위로 기어올라오기, 칼로 배를 쑤셔 피가 철철 나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남기, 머리에 총맞고도 살아남아 멋진 최후 맞이하기 등 현실성 없는 느와르의 공식을 따른다.

사실 느와르 영화 보면서 저런 게 가능하냐고, 리얼리티가 떨어진다고 이야기하려면 차라리 느와르 영화는 안 보는 게 현명하다. 이렇듯 느와르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는 듯하는 <달콤한 인생>은, 그러나 사뭇 느와르와는 전혀 다른 전개로 보는 이의 허를 찌른다.

영화의 프롤로그.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여주며 이병헌의 목소리가 흐른다.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저기 보이는 것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입니까, 나뭇잎이 움직이는 것입니까?"
스승이 대답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그것을 보는 너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이게 웬 선문답이냐고? 그렇다. <달콤한 인생>은 선문답으로 시작해서 선문답으로 끝나는 선(禪)의 영화다. 영화의 에필로그, 이병헌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왜 울고 있느냐"
"꿈을 꾸었습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너무나 황홀한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느냐?"
"현실에선 누릴 수 없는 달콤한 꿈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선문답이란 것은 선불교 선사들의 수행 방식 중 하나다. 선문답은 우리가 절대적이라 생각하는 인과법칙을 깨는, 말 그대로 언어의 구조를 깨는 문답법이다. 진리라는 것이 언어와 과학 그 너머에 있다는 얘기다.

<달콤한 인생>이 취한 선문답이라는 이야기 방식은 느와르의 공식을 완전히 허물어뜨린다. 원래 느와르라는 것이 사랑과 배신, 분노와 복수, 죽음으로 이어지는 비장미가 존재의 이유가 되는 장르다. 따라서 느와르는 정확한 원인이 있고 그에 따른 행동과 결론이 뒤따른다.
그러나 <달콤한 인생>에서 "왜?"라는 물음은 의미가 없다. 이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왜 선우에게 갑자기 지옥이 닥쳤는지 묻는다. 영화 종반부 보스에게 총을 겨누며 선우는 절규한다.

"내게 왜 그랬어요?"

사실 이유는 없다. 아니, 중요하지 않다. 선우가 보스의 여자를 탐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강사장의 말대로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가족과 조직이라는 세계의 특징이 한번 결정하면 그것이 설사 잘못된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가던 길로 쭉 가야 한다. 선우가 그 이유를 알았다고 해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서로의 욕망이 뒤엉켜 사건이 일어나고 돌이킬 수가 없다. 돌이킬 수 없다면 폼나게 가라, 그것만이 이 영화가 던지는 유일한 답이다. 여기에서 누구에게 이 사건의 책임이 있는지 인과관계를 밝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폼생폼사의 수컷 세계에서 일어나는 비장한 전투(아주 엄청난 의미가 있을 것처럼 보이는)가 실은 그렇다 할 이유가 없는, 무슨 맥주광고에 나오는 카피처럼 '그냥' 벌어진 무상한 일일 뿐이라는 것.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영화 <달콤한 인생>은 결코 달콤하지 않은 지옥에 떨어진 선우의 인생을 뒤집는 역설적인 제목 같기도 하지만, 또한 에필로그의 꿈 이야기처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무의미한 제목일 수도 있다.

생각해 보니 김지운 감독, 정말 끝까지 폼생폼사다. 세련된 스타일로 형식에서 폼을 잡고 선문답으로 그럴듯한 내용이 있는 것처럼 폼을 잡는다. 사실, 돌이킬 수 없어서 설명할 수 없어서 폼나게 간 건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 홈페이지에 4월 5일 실었던 글입니다.

2005-04-07 12:39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개인 홈페이지에 4월 5일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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