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04 15:22최종 업데이트 24.03.04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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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에 대해서 잘못된 설명을 해서 논란을 불러 일으킨 행정안전부의 SNS 홍보물 ⓒ 행정안전부

 
공동체의 역사인식을 형성하고 이를 통합하는 데 기여하는 상징적 기호들이 있다. 가정에서는 결혼기념일이나 생일 또는 추억의 장소들이 그런 기능을 하고, 사회나 국가에서는 역사적 사건이나 유적들이 그런 기능을 한다.

한국에서 을미사변, 3·1운동, 8·15 광복, 독립운동, 상하이 임시정부, 독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경술국치,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식계획, 일본제국주의, 기미가요, 일왕(천황), 자위대, 친일파 등의 숫자나 단어는 사회나 국가의 역사인식 혹은 일본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는 상징적 기호로 작용한다. 동북공정이란 단어가 중국에 대한 인식이나 감정을 일으키듯이, 위 단어들은 일본에 대한 인식·감정을 일으키고 한국 국민들을 단결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하에서는 일본과 관련된 그런 기호들을 흔들어대거나 뭉개는 듯한 일들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시마네현의 독도 강탈 118주년을 기념하는 지난해 2월 22일 '다케시마의 날'에는 국군이 자위대와 함께 독도 인근에서 한미일 미사일 방어훈련을 실시했다.

경술국치 113주년인 지난해 8월 29일에는 국군이 자위대와 더불어 제주 남방에서 동일한 훈련을 벌였다. 을사늑약 118주년인 지난해 11월 17일에는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스탠퍼드대학에서 공동 좌담회를 열었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부정적 기억이 떠오르는 날마다 한·일 협력의 이미지가 연거푸 연출됐던 것이다.

또 한국인들이 싫어하는 대상이 한국에 가까이 다가오고, 한국인들이 싫어하는 주장이 갑자기 귀에 박히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2월 16일에 이어 올해 2월 14일에도 일왕의 생일파티가 서울에서 열리고 여기서 기미가요가 연주됐다.

지난해 12월에는 '독도는 분쟁 중'이라는 일본 주장을 담은 국방부의 <정신전력 기본교재>가 배포됐다가 회수됐다. 배포하는 과정보다 회수하는 과정에서 '독도는 분쟁 중'이라는 메시지가 훨씬 강하게 각인됐다. 

이번 3·1절을 전후해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윤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은 파트너' 발언을 작년에 이어 2년 연속으로 했다. 또 자위대를 연상시키는 글자 배열을 등 뒤에 두고 기념사를 낭독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행정안전부의 황당한 역사 왜곡 홍보물

3·1절 전날에는 더 황당한 일이 있었다. 행정안전부가 상하이 임시정부가 아닌 하얼빈 임시정부를 운운하는 3·1절 홍보물을 업로드했다가 삭제한 일이다.

'3·1운동'이라는 제목하에 카드뉴스 형식으로 작성된 이 홍보물은 "1919년 3월 1일, 만주 하얼빈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선언과 동시에 만주, 한국, 일본 등에서 일어난 대규모 항일 독립운동입니다"이라는 설명문을 담았다. 임시정부 수립 이전에 민족대표 33인의 주도로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이 발표된 사실과 동떨어진 홍보물이다. 또 임시정부의 거점을 상하이가 아닌 만주 하얼빈으로 잘못 설명하기까지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정식 명칭 대신에 상하이 임시정부라는 편의상의 명칭을 사용하는 한국인이 훨씬 많다. 그 정도로 대다수 한국인들은 '임시정부' 하면 '상하이'를 떠올린다. 그런데도 하얼빈 임시정부를 운운하는 홍보물을 제작했던 것이다.

'임시정부' 하면 상하이 외에 한성과 블라디보스토크도 떠올리는 한국인들이 상당수 있다. 하지만 '임시정부'와 함께 '하얼빈'을 연상하는 한국인은 전혀 없다.

이런 일들은 한국인들이 뇌리에 각인된 상징적 기호들에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아무리 확고하게 각인된 기호일지라도,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면 기호가 흐릿해지거나 지워질 수도 있다. 을미사변, 3·1, 8·15 같은 위의 기호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인들의 대일 역사인식에 영향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실패한 중국 군벌의 '하얼빈 임시정부' 
 

장쉐량 ⓒ 위키미디어 공용

 
'하얼빈 임시정부' 이야기는 언뜻 황당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일본인들이 바라는 코드가 숨어 있다. 실제로 중국 역사에 존재했던 하얼빈 임시정부의 두 주역들이 그 뒤 어떻게 됐는가를 살펴보면, 하얼빈 임시정부를 운운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띠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은 1931년 9월 18일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이듬해 3월 1일에 만주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 같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인물이 만주 군벌인 장쉐량(장학량, 1898~2001)이다.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위기에 몰린 장쉐량이 장쭤샹(장작상, 1881~1949)과 함께 하얼빈에 세운 것이 지린성(길림성)임시정부다. 3·1운동 뒤에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웠듯이, 만주사변 뒤에 장쉐량과 장쭤샹은 하얼빈에 지린성임시정부를 세우고자 했다.

1931년 10월 14일 자 <동아일보> 1면 하단은 "장작상 씨와 장학량 씨가 협의한 결과, 길림성임시정부를 합이빈(哈爾賓)에 조직하기로 되어 목하(目下) 착착 진행 중"이라면서 하얼빈에 조직된 임시정부의 참모장·재무청장·민정청장·농공청장·경무서장 등의 이름을 열거했다.

그러나 가정부(假政府)로도 표기된 하얼빈 임시정부는 결국 해프닝이 됐다. 같은 편이었다가 친일파로 변신한 장하이펑(장해붕)의 군대에 밀려 며칠 뒤부터 힘을 잃었다. 그달 22일 자 <조선일보> 1면 중간은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아래의 "되엿다"을 '되었던'으로 바꿔 읽어야 문맥이 맞을 듯하다.

"장학량, 장작상 양씨(兩氏)가 궁여의 일책(一策)으로 하르빈에 설립 준비가 완전히 되엿다 길림성가정부(假政府)는 19일 해붕군(軍)의 제제합이(齊齊哈爾) 입성에 공포를 늣기고 요인이 도망하여 실현 불가능에 함(陷)하엿다."

친일파 장해붕 군대의 공격으로 실현 불가능 단계로 함몰된 하얼빈 임시정부는 그 뒤로도 불상사와 치욕을 겪었다. 임시정부의 주역인 장쉐량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을 부활시켜 일본에 맞서고자 시안(서안)에서 국민당의 장제스(장개석)을 압박하고 감금했다가 역공을 당해 10년 금고형을 받았다. 1949년에 대만으로 옮겨진 그는 1990년에야 연금에서 해제됐다.

또 다른 주역인 장쭤샹은 임시정부 수립 얼마 뒤 친일을 선언했다. 1932년 1월 8일자 <동아일보> 1면 중간은 "장작상은 장학량과 일본 측이 절대로 융화할 희망이 업고, 그러타 하여 궤멸의 일도(一途)에 재(在)한 장학량과 운명을 가티할 것이 아니라, 여하케나 국면 전회(轉回)를 도(圖)하랴고 고뇌한 결과, 절대 친일을 표방한 북방 신정권 수립에 착수"했다고 보도했다.

일본과 손잡을 가망이 없는 장쉐량과 운명을 같이했다가는 궤멸의 한 길로 갈 수밖에 없으므로 국면 전환을 도모하고자 '고뇌' 끝에 절대 친일을 표방했다는 것이다. 장해붕 군대에 패배한 것이 그 정도의 충격을 줬던 것이다.

이처럼 중국 군벌이 세운 하얼빈 임시정부는 일본의 만주침략 과정에서 일어난 일종의 해프닝이다. 임시정부 선포 얼마 뒤 허망하게 무너진 두 주역 중 하나는 절대 친일로 돌아서고 또 하나는 일본에 맞서다 근 60년간이나 감금됐다.

하얼빈 임시정부의 역사는 일본인이 볼 때는 통쾌한 역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볼 때는 치욕과 통탄의 역사다. 제3자가 볼 때는 안타까운 역사가 될 수도 있고 엉성한 역사가 될 수도 있다.

3·1운동은 자주독립의 결과로 곧바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일대 사건이다. 지금보다 교통·통신이 덜 발달했던 시기에 전국 곳곳의 민중들이 평화적 방법으로 거의 동시에 일어나 제국주의 반대를 외친 사건은 전 세계를 감동시켰을 뿐 아니라 일본마저 당황케 만들었다. 그 누구도 한국인들이 패배했다고 평하지 않은 한민족 승리의 역사였다. 이 힘은 독립운동을 지속시키고 국제사회가 한국 독립을 지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승리의 역사로 볼 수 없는 하얼빈 임시정부를 3.1운동과 연결시킨 것은, 실수라고 할지라도 윤석열 정부가 3·1운동의 의의를 폄훼한 셈이 된다.

추억이 사람들을 묶듯이, 역사는 사회나 국가를 통합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지금 윤석열 정권하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한국인들의 기억을 훼손하며 흔들고 있다. 이는 일본의 죄악에 대한 한국인들의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고, 일본에 맞서 싸운 한국인들의 자주독립 의지를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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