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04 11:39최종 업데이트 24.03.04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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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2월 12일 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투표하기 위해 줄 선 서울 신당동 유권자들. ⓒ 연합뉴스


숨기려 해도 잘 숨겨지지 않는 게 영부인 리스크다. 왕조시대 이래로 대중은 국가지도자의 배우자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서 억누르려 해도 잘 억눌러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이 리스크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이순자 리스크'와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상관관계다.

'이순자 리스크'가 불거진 것은 1982년 어린이날에 장영자가 어음사기로 구속되면서부터였다. 이순자의 작은아버지 이규광의 처제인 장영자가 자금 사정이 열악한 기업들로부터 채권액의 2배 내지 9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아 7111억 원을 확보한 뒤 시중에 현금으로 유통시킨 이 사건이 터지자, 세상은 대번에 이순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1980년 3월 8일 자 <동아일보>는 물가상승으로 인해 짜장면이 300원에서 400원으로 올랐다고 보도했다. 1981년 8월 18일 자 <동아일보>는 7월 11일의 음식값 자율화 조치로 인해 서울 시내에서 짜장면이 500원으로까지 인상됐다고 전했다. 이런 시절에 어음사기로 7111억 원이 조성됐다. 지금 물가로 환산하면 조 단위의 금액이다. 이 돈이 '이순자와 관련이 있다', '민주정의당(민정당)에 들어갔다' 등의 의혹이 확산됐다.

경제에 대한 정권의 통제가 심한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한 개인의 재주와 수완만으로 금융기관과 기업을 압박해 그만한 규모의 어음사기를 벌이기는 힘들었다. '단군 이래 최대 어음 사기'로 불린 이 사건은 단군 같은 국가지도자나 그 일가족의 비호 없이는 일어나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전두환 정권은 5월 18일에 이규광을 구속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이규광의 위세는 이순자에게서 나오는 것이었으므로, 이미 이순자에게 고정된 세상의 시선을 이규광에게 돌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한 시선을 의식한 결과인지, 5월 20일에 정치근 검찰총장이 청와대에 사전 보고한 뒤 직접 발표한 수사 결과에도 이순자가 거론됐다. 수사 발표문에 "검찰은 이 사건에 있어서 장영자의 형부인 이규광이가 영부인의 숙부라는 관계를 이용하여 은행 등에 청탁 또는 압력을 가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였는지의 여부에 관해 집중 조사하였습니다"라는 대목이 있다. 이순자의 연루를 이 정도로 언급하고 넘어가려 했던 것이다.

그런 미봉책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정권 핵심부에서도 나왔다. 전두환의 정권 창출에서 브레인 역할을 한 허화평·허삼수 두 참모는 12·12쿠데타 주역들을 검찰 발표 이틀 뒤인 1982년 5월 22일 서울 궁정동 안기부장 사무실에 모아놓고 이순자 일족을 약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역적모의'를 벌였다.

허화평·허삼수는 '역적모의' 실패 뒤 전두환과 서먹서먹한 관계를 이어가다가 7개월 만인 1982년 12월 20일 결국 경질됐다. 허화평·허삼수는 이순자 '여사'에 대한 전두환의 비호를 제지하지는 못했지만, 전두환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정국 운영의 컬러를 바꾸도록 하는 데는 일조했다. '서울의 봄'과 5·18 광주에서 나타난 전두환의 폭력성은 1982년 하반기부터 누그러졌다.

대충 봉합한 장영자 사건, 총선에서 전면 재점화
 

1985년 10월 3일 서울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에 참석한 전두환 대통령과 이순자 여사 ⓒ 연합뉴스


전두환은 노태우·이학봉·허문도 등과 함께 정권의 대주주나 다름없는 허화평·허삼수를 숙청하는 방법으로 영부인 리스크에 대한 입장을 정리했다. 장영자 사건으로 이순자가 타격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3년 뒤의 제12대 총선은 그 같은 전두환의 희망을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전두환이 1982년에 대충 봉합한 장영자 사건이 1985년 2·12총선 때 전면적으로 재점화됐던 것이다.

이 선거의 후보자 등록은 1월 28일 마감되고, 이틀 뒤부터 안양·광명·시흥·옹진 등을 필두로 합동연설회가 개시됐다. 이로부터 며칠 사이에 가장 많이 거론된 이슈가 장영자 사건이다. 너무 식상하다는 평이 불과 일주일 만에 나왔을 정도다.

서울 용산구 삼광초등학교 합동연설회 때에서 이런 분위기가 나타났다. 그해 2월 7일 자 <조선일보> 특집기사는 "서울 삼광국민학교에서 열린 마포-용산 지구 합동연설회에 모인 2천여 명의 시민들은 이번 선거의 단골 메뉴인 장영자 여인 사건, 정래혁씨 사건 등에 대한 후보들의 공박에 대해서는 이미 식상한 듯 별 호응이 없었으나 '나는 안 찍어주어도 좋으니 민정당에게만은 표를 찍어주지 말라'는 4개 야당 후보들의 똑같은 발언에는 많은 사람이 박수로 호응"했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불과 며칠 새에 유권자들의 뇌리에 못이 박힐 정도로, 야당 후보들은 장영자 사건과 정권의 관계를 적극 비판했다. 2월 2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이만섭 한국국민당(국민당) 총재는 전날 대구 중·서구 합동연설회 때 "장영자 사건 등의 배후에 권력이 있다고 생각, 내가 조사하자고 제의했으나 민정당은 배후에 권력이 없다며 반대"했다는 비화를 공개했다.

훗날 1992년 대선에서 6.4%를 득표하게 될 신민당의 박찬종 후보는 부산 중구·동구·영도구 합동연설회 때 '민정당이 장영자 돈을 쓰지 않았느냐'는 발언을 했다. 2월 4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그는 2일 남일국민학교 유세장에서 "이 정권이 장영자 사건 등 각종 금융부정사건을 통해 2조 원을 털어먹었으니, 유권자들은 1인당 2천만 원씩 받고서 민정당에게 표를 찍어주라"고 호소했다.

서울 성동구에서 민주한국당(민한당) 후보로 출마한 조세형(1931~2009)은 이런 발언도 했다. 2월 6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그는 무학초등학교 합동연설회장에서 "내가 지난 10년간 꼭 보고 싶은 낯짝이 3개 있는데"라고 한 뒤 "그것은 김대중 씨를 납치해 동해 바다에 처넣어 죽이려 했던 자, 광주사태를 지휘한 자, 장영자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한 자의 낯짝"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낯짝들이 세 개가 되려면 "광주사태를 지휘한 자"와 "장영자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한 자"가 각각 별개가 되어야 한다. 전두환과 이순자를 포함한 3개의 낯짝이 연상되도록 발언을 했던 것이다.

'영부인 리스크' 숨기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보여준 1985년
 

1985년 2월 7일 자 <경향신문>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3년 전에 덮었다고 생각한 영부인 리스크가 총선의 최대 이슈로 떠올랐으니, 전두환 정권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을 더욱 당황시킨 것은 여당 2중대이자 위성정당인 민한당과 국민당의 태도였다. 이들마저 장영자 이슈의 '쏠쏠함'에 매료돼 있었다. 닷새 앞으로 다가온 투표일을 앞두고 각 정당들이 마무리 전략을 마련 중이라는 2월 7일 자 <경향신문> 톱기사는 이렇게 보도했다.

"민한당은 이번 합동유세 결과를 중간 분석한 결과, 서울·부산 등 대도시의 경우 정치문제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경제문제에서는 장영자 사건 등 대형 금융 부조리 사건의 빈발에 대한 공세가 국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으며, 지방의 중소 도시나 농촌의 경우 지방경제의 활성화와 소·돼지값, 추(秋)·하(夏) 곡가 문제 등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판단, 대정부·여당 공세를 이런 측면에서 집중 강화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정통 야당인 신한민주당(신민당)은 물론이고 관제 야당들까지 영부인 이슈를 제기하는 당혹스러운 상황 앞에서 민정당은 너무 허술한 논리로 대응했다. 장영자 사건이 박정희 정권 때의 부조리가 낳은 산물이라는 식의 대응을 보인 것이다.

위 2월 4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서울 강남구에서 신정사회당 후보로 출마한 고정훈 전 조선일보사 논설위원은 "민정당이 컴퓨터와 전자두뇌까지 동원해서 야당의 공격을 방어하라는 자료를 보면 대형 부정사건이 박 정권 때 곪은 것이라고 하는데, 장영자가 육영수 여사의 친척이고 김철호가 육영수 여사 아버지의 심복이냐"고 비판했다. 장영자가 이순자가 아닌 육영수 쪽 사람이냐는 말로 민정당의 논리를 반박했던 것이다.

이 선거에서 전두환 정권은 장영자 사건과 영부인 리스크의 늪에 빠졌다. 2월 8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전북 무주·진안·장수에서 민한당 후보로 출마한 오상현은 "현 정권이 장영자 사건과 의령 총기사고 등 각종 사건사고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끝낸다고 끝낸 영부인 리스크가 꽤나 질기게 이어졌던 것이다.

2·12 총선은 1960년 5·16 쿠데타 이후로 가장 높은 84.6%의 투표율을 기록한 선거다. 이 선거로 민정당은 많은 것을 잃었다. 총 276석 중에서 148석을 얻어 과반 의석은 확보했지만, 득표율은 과반에 훨씬 못 미치는 35.2%였다. 전국구(비례대표) 의석 배분 방식 덕분에 과반수를 차지했을 뿐이다.

영부인 리스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이 선거는 위성정당인 민한당을 몰락시켜 민정당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정통 야당인 김대중·김영삼의 신민당을 거대 야당으로 만들어줬다. 이를 발판으로 신민당은 전두환 정권을 거세게 몰아붙여 1987년 6월항쟁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

6월항쟁의 초석이 된 1985년 총선의 핵심 이슈가 장영자 사건과 영부인 리스크였고 이것이 유권자들의 정권심판론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는 점은 영부인 리스크를 숨기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준다. 이순자 리스크를 봉합한 채로 근 3년 가까이 시간을 끈 것이 전두환 정권의 패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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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4.10 총선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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