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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타운(잘란 프탈링) 입구
 차이나타운(잘란 프탈링) 입구
ⓒ 안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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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타운을 돌아보기 전 배를 채우기로 했다. 우리가 찾는 식당은 차이나타운 중심가와는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핸드폰 앱에 의지해 걷다 모퉁이를 돌자 가게 이름을 보기도 전 제대로 찾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대고 있었고, 그들을 헤치고 가게 앞으로 가자 번호표를 뽑을 수 있는 기계와 메뉴판, 주문표와 연필들이 놓여 있었다.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는 사이 메뉴를 골라 주문표에 기재하면 된다.

안내 표지판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다들 그러고 있으니 눈치껏 따라 하게 된다. 물론 기다리는 동안 다른 일을 하다 자리에 착석하면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개인의 성격과 가게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인가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말레이시아에 왔으니 나시 르막을 먹어야겠지?"
"나시 뭐? 나시 고랭은 나도 아는데...."


메뉴를 뒤적이던 동행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말레이시아 음식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이 집이 '창펀(Cheng Fun)' 맛집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뚱한 표정의 나를 흘끔 쳐다본 일행이 고개를 흔들고 주문표에 음식을 적기 시작했다.

"음료는 어떻게 할 거야? 난 레몬 실론티 마실 건데?"

메뉴표에는 'KOPI', 'KOPI-O', 'KOPI-C'같은 비슷하고 다른 이름들이 돌림노래처럼 적혀 있다. 커피와 연유, 설탕의 배합 비율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 것 같지만 자세한 설명은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몰라. 모를 땐 3번으로 찍어야지. 무조건 3번 아이스."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원하는 메뉴를 적은 주문표를 직원에게 전달한 덕분에 음식은 예상보다 일찍 테이블에 도착했다. 음료를 담은 유리잔은 뜨거움 그 자체다. 미리 시원하게 만들어 놓은 음료가 아니라 주문과 동시에 뜨겁게 만들어 원하는 이의 잔에 얼음을 잔뜩 넣어준다. 찬 음료를 즐겨 마시지 않는 말레이인들이 이방인들을 위해 고안한 방식인 것 같다. 얼음의 양이 많아 조금만 휘저어주면 차갑게 변한다.

"음료는 어때? 내 레몬 실론티는 최고야."
"Kopi C는 뭐랄까. 깨달음을 주는 맛이야. 단맛으로 신경을 각성시킬 수도 있다는 큰 깨달음."

 
창펀과 나시 르막 얌 고랭
▲ 쿠알라룸푸르의 맛 창펀과 나시 르막 얌 고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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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이 선택한 '나시 르막 얌 고랭(Nasi Lemak Ayam Goreng)'은 메뉴 이름에 걸맞게 튀긴 닭다리(Ayam) 하나가 떡하니 올라와 있다. 커다란 접시 위에 코코넛 밀크를 넣어 지은 밥(Nasi)과 멸치 튀김, 소스를 넣어 무친 야채, 땅콩과 계란, 삼발소스가 담겨 있다. 삼발 소스는 고추와 새우페이스트를 기본으로 하는데 집마다 맛이 다르다. 우리나라의 고추장 정도의 역할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창편은 쌀로 만든 피 위에 소스가 끼얹어 있었다.

"나시 르막이 말레이시아의 전통 음식이라고 하면, 이 창펀은 뭔가 중국과 인도계의 혼합이야. 카레 맛이 나. 이거 진짜 맛있어. 이 가게가 우리 동네에 있었으면 난 매일 올 거야."

창펀의 맛에 빠져 허우적대는 내가 말했다. 외국 음식을 먹으며 기대하는 것은 '모르는 맛'이 줄 수 있는 쾌감이다. 쫄깃한 식감 사이로 소스의 맛이 입에 착착 붙는다. 닭다리를 분해하느라 분주하던 동행이 얼른 창펀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네. 카레 맛이 나네. 그런데 여긴 중국인 거리 아니야? 왜 인도의 맛이 섞인 거지?"
"말레이시아에 대규모 중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된 것이 1820년대야. 인도인 노동자가 유입된 것은 1870년대고.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에 두 문화가 만난 거야. 150년 정도면 음식 아니라 뭐가 어우러졌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잖아?"


라루트 전쟁의 무대 

1820년 쿠알라룸푸르로부터 남쪽으로 60Km 정도 떨어진 루쿳이라는 곳에서 발견된 주석광산에 한 무리의 중국인 광부들이 도착한다. 그것을 시작으로 쿠알라룸푸르의 암팡 지역 주석 광산으로도 중국인들이 모여든다. 광산 때문이라고 해도 광부만 오지는 않는다. 그들의 먹을 것과 잘 곳, 필요한 물품을 파는 상인들도 함께 따라온다. 그들이 정착한 곳이 차이나타운이다.

이 지역을 다스리던 술탄은 주석 채광 사업권을 영국인 사업가에게 넘기고 그 대가를 챙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대규모로 유입되는 인구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본토에서 먼 곳까지 흘러나온 중국인 노동자들은 출신지 별로 파벌을 지어 뭉치기 시작한다.

중국인 노동자들의 파벌은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성장한다. 야쿠자 세력이 국회의원들과 손을 잡듯 중국인 파벌들은 술탄국의 귀족들과 결탁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엇비슷한 크기의 파벌들 뒤에 비슷한 크기의 귀족들의 엄호가 있었다는 점이다. 1861년 드디어 파벌들 간의 싸움이 시작된다(Larut Wars).

당시 영국은 쿠알라룸푸르의 술탄들에게 부분적인 행정 자치권을 인정해 줄 정도로 유연한 통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중국계 파벌 간의 싸움이 벌어지자 술탄의 정치력이 보잘것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영국의 자본가들은 영국 식민 당국의 개입을 요구한다. 영국 주지사의 개입으로 싸움을 중지하고 보상금을 지불하는 선에서 사건은 일단락된 것 같아 보였다.

1871년 술탄이 사망하자 후계자 문제가 벌어진다. 다음 술탄으로 물망에 오른 두 사람 뒤에 중국계 파벌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1873년 양측은 한 판 맞짱을 뜬다. 광산에서 벌어진 싸움이라 곡괭이와 삽 같은 것이 주를 이뤘을 것 같지만, 천만에. 싱가포르와 중국에서 들여온 총과 병력이 동원된다.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이 파벌들과 아무 관련 없는 숱한 말레이인들이 이 전쟁 중 피해를 입는다.

다시 영국이 나서서 1874년 팡코르 조약(Pangkor Treaty)을 맺는다.  영국은 술탄을 선택해 자리에 앉혔고, 조세권 등 술탄이 가지고 있던 행정적인 권한을 박탈됐다. 말레이 종교와 관습에 관한 문제 외의 모든 것은 파견된 영국 관리의 결정에 따라야 했다. 즉 이 조약으로 말레이에 대한 영국의 통치가 합법화된 것이다. 

"라루트 전쟁이라고도 하고 슬랑오르 내전이라고도 하는 그 삼합회인지 야쿠자 인지 하여간 조폭 같은 사람들이 싸웠던 무대가 바로 여기 차이나타운이야."

법은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술탄이라면 법 따위는 필요 없다. 자기 마음대로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권력의 가장 끝, 자신의 노동을 팔아 먹고 살 수밖에 없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법은 최후의 보루다. 그야말로 정당하고 공평하게 집행되어야 한다.

한때 이 거리의 법으로 통용됐을 중국 조직들의 힘은 중국 조직원들의 안위를 위해 집행되었을 것이다.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그렇다면 나처럼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법은 제대로 서 있는 것일까?
 
상호는 밝히고 싶지 않았으나 너무 맛있어서 한국에 분점을 내달라는 의미로 한 컷.
▲ 포 카우 하이남 코피타암 상호는 밝히고 싶지 않았으나 너무 맛있어서 한국에 분점을 내달라는 의미로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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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참고 문헌 : <동남아시아 도시들의 진화 : 인간과 문화를 품은 바닷길 열두개의 거점들>(한광야,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동남아시아사>(소병국, 책과함께)
- 이 기사는 지안의 브런치(https://brunch.co.kr/@zian/334)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태그:#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동남아여행,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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