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집의 원형

집의 원형은 한글이다
서정으로 쌓은 초가집 안채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ㅁ자이고
가족수나 살림살이에 따라
ㄱㄴㄷㅁ자로 집의 유형이 달라진다
ㄱㄴㄷㅁ자인 집채 어깨와 등줄기는
기둥이나 대들보인 ㅣ, ㅡ와 어울려
가정의 원형인 ㅇ이 된다
집과 건물
그 뼈대와 지붕은 모두 한글이다
밤마다 반짝이는 저 우주의 바탕도
모두 ㅇ이다

 
 
박종현 시인이 펴낸 새 시집 <한글 날다>(실천문학사 간)에 실려 있는, 재미있는 시다. 아파트나 빌딩이 아니라, 진짜 우리나라의 집 형태를 보고 ㄱ, ㄴ, ㄷ, ㅁ자(字)형이라고 하는데, 시인은 이를 한글 모양으로 잘 형상화 해놓았다.

시인은 그런 집 위에 밤마다 반짝이는 저 우주의 바탕도 모두 ㅇ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우리의 집과 한글은 하늘(천)과 땅(지)과 사람(인)이 하나로 귀결되고 있는 것을 시로서 보여주고 있다.

이 시처럼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한글' 관련 작품이 많다. 시집은 모두 4부로 나뉘어져 있고, 한글 관련 시들은 '한글 피다'와 '한글 헐다', '한글 날다'로 묶었고, 나머지 시들이 모아져 있다.

"꼭지만 남은 옛이응", "사막의 꽃", "한글의 관자놀이엔 관자가 산다" 등 시들은 '한글 피다'로, "속이 헌", "꽤액꽤액 롱 패딩", "오렌지 와인에는 오렌지향이 없다" 등 시들은 '한글 헐다'로, "은행잎 투사", "붉은 예서체", "대추나무 시집보내기", "ㅊ자 모기 화석" 등 시들은 '한글 날다'로 묶어져 있다.

시인은 모든 사물과 형체를 한글로 해석하려 한다. 늙은 어머니가 목욕하실 때 등을 밀어드리며 보게 된 어머니의 유두(乳頭)를 "꼭지만 남은 옛이응"으로 표현했다.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 그 젖을 빨며 자랐던 시인은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이제 빈 껍질만 남은 어머니를 떠올렸다. 병약하신 어머니의 목욕을 도우며 보게 된, 까맣게 시든 젖꼭지를 본 아들의 심정은 어떠할지 짐작이 된다. 가슴이 메인다.

"오랜만에 어머니 등을 밀어드렸다 / 욕조 귀퉁이 낮고 둥글게 쪼그려 앉으신 어머니 / 때수건한테 물려줄 한 겹 때마저 / 남아 있지 않는 야윈 몸 / 연신 개운타 개운타 외치신다 / (중략) / 욕실 문 나서는 아흔의 어머니 / 두 손 가득 ㅇ은 사라지고 꼭지만 남은 옛이응 / 그 거룩한 열매를 받들고 나오신다"(시 "꼭지만 남은 옛이응" 부분).

시인은 자음 ㄱ을 다루면서 "세발가락나무늘보"라는 희귀한 야생동물의 생태를 떠올렸고, 그 나무늘보가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몸을 굴리는 것이 ㄱ을 움켜쥔 채 지구를 돌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 시 "콩잎장아찌 석 장"도 가슴을 울리게 한다. 한글은 읽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욱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이듬해 여름인데도 / 콩잎장아찌 반찬이 전부다 / 차곡차곡 포개진 노란 잎 이미 갈색으로 변해 있다 / 된장 속에 묻어놓은, 여럿이 함께 묻혀야만 / 맛이 깊어진다시던 당숙모 / 자모가 겹친 한글처럼 월남치마 접힌 자락 / 들러붙은 콩잎 하나를 떼어내어 / 밥 한 숟갈에 콩잎 앞뒤를 혀로 핥고 / 두 숟갈에 반을 찢어 입에 넣고 / 세 숟갈에 나머지 반을 먹는다 / (중략) / 군대 간 막내 손자가 보내준 생일축하 카드를 꺼내 놓고 / 나에게 읽어달라고 하신다 / 한글은 읽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감동이다 / 당숙모 눈가 맺힌 땀을 엄지로 슬쩍 훔치신다"(시 "콩잎장아찌 석 장" 부분).

시인은 시 "ㅍㅍㅍ으로 걷는 게걸음"에서는 자음 ㅍ의 상형 원리를 다루고, 시 "나이테"에서는 자음 ㅇ의 상형 원리를 그리고 있는데 시인은 나무의 둥근 나이테를 동그라미에 비유하며 '시간의 육필'이라고 명명해 놓았다.
 
나이테

나무도
한평생 한글을 익히며 산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글자
시간을 쌓아 육필로 쓴,


 
 
이 시집에 대해 이동순 평론가는 "주체의식과 애민 정신이 특별했던 세종대왕이 창제한 우리 한글의 구성 원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초성, 중성, 종성과 순경음(脣輕音)의 어울림과 우주와 대자연, 혹은 인간의 삶 그 자체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고 했다.

이 평론가는 "박종현 시인은 우리가 소홀하게 지나친 부분에 대해 진작 주목하고 특별한 애착을 가지며 한글의 창제원리와 그에 깃든 상형성의 내부를 시적 이해방식으로 분석하였다. 그 경험을 성실하게 정리한 것이 이 시집이다"고 했다.

윤한룡 실천문학 대표는 추천사에서 "한글은 지구촌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만든 사람과 반포일을 알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글자로 신비 그 자체이자 위대한 인류문화유산이다"며 "천지인 3개의 기호만으로 홑소리 열 자와 발성 기관의 모습을 본 따 닿소리 열네 자를 만든 한글의 '구성 원리와 그 체계에 대한 깊은 사색과 철학(해설)'을 박종현 시인이 시로 빚어냈다"고 했다.

박종현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태풍 힌남노에 쓰러져 누운 소나무 / 밑동이 썰려 있다 / 자신의 뽀얀 속살에다 예순 번도 넘게 새긴 ㅇ자 / 시간을 쌓아 육필로 쓴, / 세상에서 가장 옹글고 아름답게 핀 꽃 / 솔향기가 난다 / 썼다 지우고 짓다 허무는 짓만 숱하게 했다. / 옹근 글자 하나 새기지 못한 내 얼굴 / 여태 이지러진 ㅇ이다"고 했다.

창녕에서 태어난 박 시인은 199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와 199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고, 시집 <쇠똥끼리 모여 세상 따뜻하게 하는구나>와 <절정은 모두 하트 모양이다>, 산문집 <나를 버린 나를 찾아 떠난 여행1, 2>가 있다.
 
박종현 시인 시집 <한글 날다>.
 박종현 시인 시집 <한글 날다>.
ⓒ 실천문학사

관련사진보기


태그:#박종현 시인, #한글, #실천문학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