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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마다 흔하던 평상 위 아이들 풍경
▲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중 동네마다 흔하던 평상 위 아이들 풍경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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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친구에 대한 로망이 있다. 동네친구라고 하면 열 손가락으로 다 헤아릴 수가 없을 만큼 많던 시기도 있었는데 내 나이 열 살 무렵이었다. 우리 집은 초등학교 교문 앞으로 죽 늘어선 문방구 세 군데 중 하나였는데 매일 동네친구들이 집 앞 골목으로 쏟아져 나와 뜀박질을 하며 놀았다.

어릴 적 그 흔하던 평상은 다 어디로

그때 그 시절에는 가게마다 목재로 짠 틀에 장판으로 마감한 평상이 하나씩 있었는데, 아이들은 문방구에서 산 애니메이션 카드며 팽이며 각종 장난감을 가지고 판을 벌이느라 방과 후면 그야말로 시끌벅적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평상에서 식재료를 다듬거나 바쁜 일상 틈틈이 담소를 나누다 흩어지곤 했다.

나는 평상 위에서 친구들과 서로의 몸에 포개 누워 낮에는 싱그러운 느티나무 이파리들 사이로 파란 하늘을 구경했고, 밤이면 서늘한 공기에 휩싸인 채 아득히 먼 하늘을 바라다보곤 했다. 아무 근심걱정 없던 그때 내 안에 새겨진 별들은 여전히 따스한 빛을 내며 내 삶을 지탱해주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드넓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두 눈이 손바닥 안의 작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옮겨가는 동안, 한 집 건너 하나씩 있던 슈퍼마켓들은 편의점으로 바뀌어갔고, 우후죽순 생겨난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사라진 평상의 역할을 대체해갔다.

이제는 구글 맵을 통해 모든 게 변해버린 풍경 위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기억들을 덧입혀 볼 뿐이다. 판타지 영화 속 시퀀스 같기만 한 그 시절 장면들이 내 인생의 첫 마을공동체였다.

늦은 졸업, 탈서울, 낯선 도시로의 이사

2018년, 대학 졸업과 함께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의정부 행복주택으로 이사 오게 되었다. 늦은 졸업, 탈서울, 낯선 도시로의 이사... 어느 하나 가볍지 않은 사건들이 동시에 일어났다.

이사 오고 나서도 꽤 오랜 기간 동안 새로운 터전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유령처럼 붕 뜬 채로 지냈다. 아파트만 수두룩 빽빽하게 지어놓은 이 도시 어느 구석에도 정을 붙일 데가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도록 내 일상은 서울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가끔 마주치면 안부 인사를 나누는 옆집 할머니 말고는 아파트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평소 외로움을 거의 타지 않는 성격 탓에 누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다만 가끔 날씨 좋을 때 야외에서 배드민턴 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도 치고 싶은데 혼자서는 못 치니까 당근마켓에서 같이 칠 사람을 구해보려고 했다. 가능하면 나와 비슷한 나이대, 같은 성별 등의 조건을 따지다가 대체 이게 뭐하는 건가 싶어 그만두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배드민턴과 유사한 스쿼시를 배워서 벽에다 대고 치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주변에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굳이 만들려는 노력을 해본 적조차 없다. 꼭 동네친구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랏돈으로 고등교육까지 받아놓고 가장 젊고 창조력이 넘쳐나는 시기에 지역사회에 아무런 기여도 네트워킹도 없이 살아가는 건 개인적으로도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머지않아 떠날 도시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서울중심주의를 심각한 사회문제로 여기면서도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동시에 정확히 상반된 생각도 들었다. 학부 재학 중 과제로 홍대 인근 젠트리피케이션 사례들을 취재하며 사무치게 깨달은 것은 내 소유의 땅과 건물이 없는 상태에서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해 힘써봤자 임대료 상승으로 쫓겨날 날을 앞당길 뿐이라는 것.

어쩌면 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청년들이 서울에서의 내 집 마련을 꿈꾸며 정작 몸담고 있는 도시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에너지를 비축하며 지내는 편이 생존에 유리한 선택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내 집이 없는 사람에게는 마을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할 의무 따위는 없는 것일까.

행복주택 단지 내, 작은도서관에 취직하다

살면서 한 번쯤 도서관에서 일해보고 싶었지만 사서가 될 배짱까지는 없었던 나는 우연히 아파트에 붙은 공고문을 보고 LH 작은도서관 코디네이터에 지원하게 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 단지 작은도서관 운영위원회에서 주도하는 마을공동체 주민제안 공모사업에 합류하게 되었다. 나의 전공 분야를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사업이었던 것은 물론 마치 내가 기획 단계에서부터 참여했던 것처럼 사업의 취지와 목적이 와 닿는 데가 있었다.

하지만 단지 내에서의 활동이 마냥 반갑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익명성의 그늘 아래 지내다가 처음으로 단지 내에서 내 존재를 드러내기가 부담스럽고 망설여지는 데가 있었다. 혹시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더라도 도망칠 곳이 없다는 점에서 잠재적인 위험을 감수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가족과 함께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이웃들과 만나고 관계 맺어갈수록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안심할 수 있었다. 단지 안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원래 내가 살던 아파트인데도 새로 이사 온 것 같은 생경한 기분에 휩싸였다.

코로나19 사태로 휴관했다가 이제 막 재개관을 앞둔 어수선한 도서관으로 어떻게 사람들을 이끌어내야 할지 막막했다. 일단 나부터가 단지 내에서 활동을 겁냈던 터라 다른 주민분들도 으레 그럴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럼에도 코로나19로 지친 일상의 시름을 잠시나마 내려놓고 즐길 수 있는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열심히 준비해서 단순한 재미 추구뿐만 아니라 주민 참가자들 간의 공감과 소통까지 이끌어내고자 했다.
 
수제 과일청 만들기, 바리스타 프로그램
▲ 의정부시 마을공동체 주민제안 공모사업 수제 과일청 만들기, 바리스타 프로그램
ⓒ LH 햇볕뜰 작은도서관 운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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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주민 분들이 서로 데면데면하거나 빨리 집에 가고 싶어하실까봐 걱정했는데 생각 외로 층간소음과 실내흡연 빌런이라는 공동의 적(?)을 주제로 빠르게 가까워지는 것을 보면서,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것이 생각보다 굉장한 공통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길어지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서로 크게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보니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수월했고, 한번 말문이 트이고 나니 집 근처 어디가 좋다더라 하는 식의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다.

부동산 시세보다 더 귀중한 마을공동체의 가치

마을공동체 사업이 진행되는 내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의 연속이었다. 이날 만난 참가자들은 이후에도 서로 반찬을 나눠 먹고 집으로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하는 등 이웃 간의 정을 두터이 하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마침내 내게도 배드민턴을 같이 칠 수 있는 이웃이 생겼다.

단지 내 작은도서관에서 일하면서 내가 사는 아파트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곳이 되었다. 그전에는 하루빨리 돈 벌어서 떠나야 할 곳이었다면 지금은 떠날 생각만으로도 두렵고 아쉬운 곳이 되었다. 언제든 기회만 되면 용수철처럼 튕겨 나갈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이제는 떠나가기에 앞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정도가 된 것이다.

어린 시절 영원할 것 같았던 마을공동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나면 이 또한 없었던 일처럼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현재 모습이 바뀐다고 해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과거 기억까지 송두리째 바뀌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 창문마다 빛을 내고 있는 모습
▲ 어둠이 내린 도시 아파트 창문마다 빛을 내고 있는 모습
ⓒ 하루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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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동체는 가히 인생의 축소판이라 할 만 하다. 열 살 무렵 기억이 여전히 내 삶을 단단히 지탱해주고 있는 것처럼 마을공동체는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주고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시킨다. 

마을공동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가치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으며 평생 몸에 지니고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단지 이것을 얻기 위해서라도 주변 이웃들과 더불어 마을공동체를 꾸려야한다.

도시의 어둠을 밝히는 아파트 창가의 불빛들이 이곳에 몸담고 살아가는 이웃들의 가슴 속에서 별처럼 따스한 빛을 내는 순간들이 찾아오기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2021 의정부시 마을공동체 활동 사례집>에 실린 글을 편집 수정 후 게재하였습니다.


태그:#마을공동체, #행복주택, #작은도서관, #이웃, #동네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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