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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5일, 흥미로운 연극 <지정 Self-Designation>이 광주광역시에 있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극장1 무대에 오른다.

장우재가 극본을 쓴 <지정 Self-Designation>에서 영화학과 4학년 이제니 감독은 초인공지능 정신과의사(AGI)의 도움을 받는다. 좋은 작품에 대한 긴장으로 촬영현장에서 쓰러지기까지 했던 이제니는 AGI로부터 스트레스 요인을 줄이고 자신을 긍적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정'이라는 치료행위를 받는다.

'지정' 후 주변에선 '정신적 자살'이라는 논란도 있지만 이제니 감독은 영화 '박씨전'을 만들어 칸에 출품하고 감독상을 수상한다. 수상 후 이제니 감독은 치료를 중단, 즉 AGI의 도움 이전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파장은 적지 않아 이제니를 가르쳤던 교수들 내에서도 AGI의 도움을 청하는 입장과 예술가는 AI가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서로 다른 흐름이 나타난다. 
 
9월 3일 무대에 오르는 연극 '지정'의 포스터
 9월 3일 무대에 오르는 연극 "지정"의 포스터
ⓒ A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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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줄거리를 가진 연극 <지정 Self-Designation>은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 AI를 연극계가 어떻게 받아들이려 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또한 극중에서 감독이 초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만든 작품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지? AGI가 예술계 전반에 스며든다면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은 어떤 변화를 준비해야 할 것인지 등에 관한 다양한 질문을 담고 있다.

극단 '풍경'의 대표이면서 <지정 Self-Designation>을 연출하는 박정희를 한남동에 있는 연습장 더줌아트센터에서 만나 준비상황과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 코로나 4단계를 뚫고 또 하나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느낌은 어떤가요?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마스크 쓰고 연습해야 하는 불편한 상황이지만, 공연이 올라갈 수 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모두 어려운 상황이니 관객들에게 좀 더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 이번에 다루는 초인공지능 정신과의사(AGI)는 신선한 주제 같습니다. 연출하면서 특히 염두에 둔 점은 무엇인가요.
"작품의 시대 배경은 가까운 미래라고 볼 수 있죠. 그때 우리 일상은 어떻게 달라질 가에 대해 상상을 해보고 싶었어요. 인공지능이 모차르트를 비롯한 대가들의 곡을 하루에도 수 백개씩 생산해낼 수 있는 시대잖아요. 이제 우리 연극과 예술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정면에서 논의할 때라고 봅니다. 이번 작품은 그에 대한 첫걸음이라는 마음으로 준비를 했습니다."

- 극본에서, 이제니감독은 작품을 만드는 스트레스 때문에 촬영 중 쓰러지고 발작을 합니다. 그 후 희망을 갖기 위해서 '지정'을 결심해서 '인지신경'을 조절하고 칸 영화제에서 또 다시 작품상을 받게 되었는데요? 이를 제니 감독의 작품으로 받아들여야할까요? 아니면 초인공지능과 제니 감독의 협동작품으로 봐야 할까요?
"저는 제니의 작품으로 봐요. 극중에서 초인공지능은 제니로 하여금 자기 콘셉트대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심리적 안정을 주는 것이지, 영화 컨셉트와 연출 자체에 대해 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수많은 연극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데이터로 쌓은 AI가 '시대의 공기'까지 읽으며 극본을 쓰고 연출에도 관여할 날이 오겠지요. 그때는 인간과 AI의 협동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연습이 끝나고 배우들과 품폄회를 하고 있다
▲ 연출가 박정희 연습이 끝나고 배우들과 품폄회를 하고 있다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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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박정희는 2002년 극단 '풍경'을 창단했다. 그해 연출했던 첫 작품 '하녀'가 '평론가들이 뽑은 올해의 베스트 3'에 선정된 것이 계기였다.

그는 '동인제(同人制)방식'의 극단운영을 꿈꿨다. 어려운 연극계 현실에서 "단원들이 저마다 제작비를 출연하고 스스로 함께 운영"하는 모델을 추구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운영은 박정희의 몫이 되었다. 근근히 연습실을 운영하고 배우들의 연기훈련이나 워크숍을 진행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지하였던 구의동의 연습실은 폐쇄했다.

지금 연극계 현실은, 배우들에게 늘 희생적인 개런티를 요구하고 관객입장료는 고작 회식비나 다음 작품의 진행비 밖에 안 되는 실정이다. 작품을 무대에 올릴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공적 '지원금'밖에 없는 현실에서, 박정희와 극단 '풍경'은 작품을 매개로 '헤쳐모여'식 운영을 택했다. 어쨌거나 그런 어려움에도 박정희는 2002년 데뷔이래 꿋꿋하게 연출의 길을 걸어왔다.

- 예술의 힘은 질문에 있다고들 합니다. 낯설고 새롭게 보기에 있다고도 하고요. 연출님이 이 신선한 작품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제일 던지고 싶은 질문은 무엇인가요?
"연습과정에서 배우들 사이에서도 내가 제니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에 대해 여러 얘기가 나왔어요. 조연출은 바퀴벌레가 무섭고 싫은데, 극본에서 나오는 부분처럼 인공지능의사가 바퀴벌레를 귀여운 곤충으로 여기게끔 해주면 일상생활이 좀 더 편안해지지 않을까라고 했어요. 말하자면 인지신경이 조절되면 삶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고 얘기를 했고 많이들 공감했어요. 하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았어요. 아마 관객들도 제니의 선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거라고 봐요. 인간의 역사에서 신에 대한 질문이 중요했잖아요. 이제는 AI에 대한 질문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어요. 관객분들이 공연을 보시고 '나라면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을 안고 가셨으면 해요."

<하녀>를 시작으로, 박정희는 시대극 성격을 갖는 <철로> <이인실> <시련>,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 최근의 작품 <백치> 그리고 < OIL >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그런 그에게 평단의 칭찬이 이어졌다.

"회색의 관념을 총천연색으로 보여주는 연금술사"
"새로운 '연극'을 갈망하는 관객들의 갈증에 꽃비를 내렸다"
"한국 연극계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오솔길을 냈다"
"강렬한 이미지와 섬세한 심리 묘사,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무대 연출" 등등

박정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공연 하나 보면 책을 한 권 읽은 것과 같아요. 무대 앞에서는 생생한 에너지와 감각들을 느낄 수 있지요. 이게 연극의 매력입니다. 연극계의 살아있는 전설 이호재 선생님, 연기인생을 차분히 걸어가는 이정미 배우, 깊이 있는 사색의 세계를 갖고 있는 나경민 배우 그리고 김정영, 황은후 젊은 청년들이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코로나로 어려운 시대 잠시 들르셔서 힘을 얻어가기를 바랍니다."

이번 <지정 Self-Designation>에는 어떤 평들이 이어질까? 관객들은 어떤 감상을 남길까?
 
한남동 줌아트센터에서 촬영했다
▲ 연극 "지정"의 공연을 준비하는 배우들 한남동 줌아트센터에서 촬영했다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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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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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 줄여서 '사수만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를 빚어내는 일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조명을 비추고 의미를 부여코자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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