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현재 국회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한국사 수능 필수 관련 법안들을 발의하고 있다. 그런데 제안 이유를 보면 한 자리에 누워서 다른 꿈을 꾸고 있는 형국이다. 여당 의원들이 생각하는 한국사 교육과 야당 의원들이 생각하는 한국사 교육은 결코 동일한 것으로 읽혀지지 않는다. 서로 꿈꾸는 한국사 교육이 이렇게 다른 상황에서, 이념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달라질 수 있는 심화된 내용을 다루고 있는 고교 한국사를 필수 이수 과목 지정한 것을 넘어 수능 필수 과목으로 지정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실 교육과정과 수능 체제의 특징을 제대로 아는 교육 전문가라면 '한국사 수능 필수화'에 대해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와 달리 고등학교에서는 선택 중심의 교육과정이 운영되고 수능 체제 역시 선택형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모든 학생들이 응시해서 활용하고 있는 국어·영어·수학 등도 실제 학생 입장에서는 편의적으로 응시한 것일 뿐 실제 대입 전형에서는 활용할 수도 있고, 활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일부 언론에서 왜곡된 설문 결과를 토대로 '역사 교육 부실' 여론을 조성하더니, 어느덧 역사 교육 부실은 기정사실이 돼 교총과 교육부 교육과정정책과 등이 나서서 한국사 수능 필수가 유일한 해법인 것처럼 주장하면서 여야를 막론하고 관련 고등교육법 개정안을 경쟁적으로 발의하고 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한국사 수능 필수화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주무부서인 교육부 대입제도과 등에서 몇 가지 안을 가지고 저울질 하는 모양이다. 또 참여정부 이후 역사 교육 편향을 보여 온 교육부 교육과정정책과 등에서는 발 빠르게 한국사 수능 필수와 함께 수업 시수 확대 및 교과 분리안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한국사 수능 필수화는 역사 교육 강화의 해법이 아니라 역사 교육 정쟁의 서막처럼 보인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역사 교육은 이념을 떠나 기본적으로 합의 가능한 기초적인 역사 내용을 가르치는 것과 달리 고교 한국사 과목은 상대적으로 심화된 내용으로 구성돼 있어서 한국근현대사의 논쟁적인 이슈를 다룰 수밖에 없다. 수능 역시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 보다는 자료 분석을 통해 역사적 해석을 내리는 능력을 측정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런데 만약 선택형 수능 체제에서 한국사를 유일무이의 필수 과목으로 지정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바로 연이어 역사 교육 내용을 바로 세우자는 주장이 여야를 막론하고 나오게 될 것이고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등 해당 정책이 추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정부라 할지라도 수능 필수가 된 한국사 과목에서 정부에 비판적인 역사적 관점이나 견해들을 공공연하게 가르치는 것을 너그럽게 봐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이념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달라질 수 있는 심화된 내용을 다루는 고등학교에서 교육과정과 수능 체제를 선택형으로 만들고 교과서 검인정화를 확대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와 달리, 고등학교에서는 단일한 지식이 아니라 다양한 지식, 서로 다르지만 함께 할 수 있음의 가치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역사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여든 야든 특정 이념에 따라 획일된 교과서로 가르치는 한국사라면 진정한 역사 교육이 아니라 사실상 이데올로기 교육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많은 교사들이 자신의 신념에 반해서 '부끄러운' 혹은 자신에 신념을 따라서 '험난한'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만에 하나 박근혜 대통령 임기 내에 한국사 국정 교과서가 추진된다면 역사 교사들 중에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진보적인 교사들은 당연히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재구성하여 국정 교과서 내용에 반하는 역사 수업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향후 야권이 집권하여 진보적인 색채의 국정 교과서가 채택된다면 다수는 아니지만 일정 비율을 지닌 보수적인 성향의 역사 교사들도 유사한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정부는 어떤 대응을 하게 될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직하다.

고등학교의 진정한 역사 교육은 다양한 선택 상황 속에서 정치권의 역사 교육과 한국사에 대한 동상이몽이 함께 가르쳐지는 것이지, 그 중에 한 가지만 가르쳐지고 나머지는 배제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사 수능 필수화는 사교육 부담 증가, 시민교육 황폐화, 교육과정과 수능 체제 왜곡 등을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교육 현장을 이념적인 정쟁의 장으로 만들어 역사 교육 전쟁의 서막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태그:#한국사, #수능 필수, #역사 교육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