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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2003년 정부 진상조사 보고서)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시네코드 선재에서 영화 <지슬> 시네토크('한국 현대사 속 제주 4.3') 가 진행되었다. 현장에는 100여 명의 관객과 한국 현대사 연구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참석했다. 과거 정부에서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에도 참여한 한 교수는 정부의 진상보고서에서 지금이라도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누가 폭도고, 누가 양민이고, 누가 민간인인가.
 누가 폭도고, 누가 양민이고, 누가 민간인인가.
ⓒ 자파리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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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표현을 쓰죠. 양민학살. 이게 문제가 많은 말이에요. 양이 좋을 량, 착할 량이죠. 착한 백성은 죽이면 안되고 불량 백성은 죽여도 되나요? 저는 민간인학살로 고쳐야 한다고 봅니다."

양민학살이 아니라 민간인학살

1948년 4월 3일 무장대의 첫 봉기 이후 '준동하는 폭도'를 진압하기 위해 꾸려진 군 토벌대는 '해안에서 5km이상 지역에 통행금지를 명령하면서 이를 어길시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총살에 처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한다. <지슬>의 배경인 제주 중산간 지역은 5km 너머다. 내려오지 않으면 바로 '통비(비적과 내통하는)분자', 불량민으로 몰렸다. 이승만 정부는 토벌대에게 국가의 명령을 거역한 '빨갱이', '폭도'를 즉결처분할 권한을 줬다.

"이건 체포된 '폭도'이구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폭도'가 맞습니까? 무장대입니까? <지슬>에서 던진 질문이 그겁니다. 여기 사진엔 다 '폭도'라고 적혀있어요."

<지슬> 시네토크에 참석한 한홍구 교수가 제주 4.3을 주제로 한 강요배 화백의 그림을 소개하고 있다.
 <지슬> 시네토크에 참석한 한홍구 교수가 제주 4.3을 주제로 한 강요배 화백의 그림을 소개하고 있다.
ⓒ 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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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교수는 관객과의 대화에 앞서 영화 속 배경과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며 슬라이드 사진을 보여줬다. 미국 국무부가 비밀해제한 자료와 사진에 적히고 찍힌 제주 4.3사건 희생자들은 여전히 '폭도'다. 하지만 1947년부터 54년까지 희생당한 3만여 사람들은 대부분 민간인이었다.

한 교수에 따르면 48년 4월 3일 최초의 봉기를 주도한 무장대 수는 고작 300명이었다. 소수의 무장대가 잘 꾸려진 정부 정규군 연대에 맞서기는 역부족이었다. 무장대를 이끌던 제주 남로당 조직 책임자 김달삼은 당시 진압 책임을 맡고 있던 정부측 연대장 김익렬과 신사협상을 통해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지슬>의 한 장면. 주민들이 동굴 안 어둠 속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다.
 <지슬>의 한 장면. 주민들이 동굴 안 어둠 속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다.
ⓒ 자파리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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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0일 협정을 맺었고 5월 6일, 안전보장이 포함된 투항이 이뤄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 방화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무장대의 소행이라고 밀어붙인 정부와 진압 경찰이 협정을 깨고 초토화 작전을 시작했다.

무엇을 위한 초토화 작전이었나

"연대장 김익렬과 남로당 김달삼 사이에 '지도부 탈출, 무장대원 투항'으로 협정 맺었다면 무장투쟁은 끝났다는 얘기 아닙니까. 끝났는데 거기대고 초토화작전을 펼친 겁니다. 왜 했을까요. 우리는 이렇게 빨갱이 다룰 줄 아는 정권이라는 걸 전세계에 알리고 미국으로부터 승인받기 위한 것이었죠. 적어도 자유세계에서."

당시 중국에서는 모택동이 이끈 공산당이 장개석 국민당을 섬으로 밀어내던 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 정권은 체제유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펼칠 필요가 있었고 그걸 보여주기 위한 무리한 장소로 제주도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야기 도중 노란 유채꽃이 만발한 사진이 나왔다. 환한 화면과 달리 말을 꺼내는 한 교수는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변해있었다.

'Never again'이 외쳐진 그 때

"이건 아름다운 유채밭이죠. 제주 4월이 유채꽃 피는 시기인데 그때 학살이 시작된 것입니다. 제노사이드라는 말 들어보셨죠? 제노사이드를 홀로코스트나 유럽에서 나치 대규모 학살로만 생각할 텐데. 물론 유럽에서는 그런 과거를 반성하고 48년 12월 제노사이드 협약을 맺습니다. 그때 구호가 'Never again' 입니다. 다시는 안 된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제주에서..."

<지슬>에서 그린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
 <지슬>에서 그린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
ⓒ 자파리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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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슬>에서 그린 초토화 작전이 본격화된 게 48년 12월이다. 다음 사진은 제주 정방폭포였다. 제주를 여행하면 누구든 다녀왔을 관광지로만 알려진 정방폭포에는 사실 4.3 희생자의 아픔이 서려 있었다.

"영화에서 봤던 분들. 마지막에 살아서 동굴을 나와서 세 갈래로 흩어졌어요. 한 갈래는 산위로, 다른 한 갈래는 군대에 쫓기다 현장에서 죽었구요. 나머지 몇십 명은 잡혀서 정방폭포에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절반쯤은 시신이 이 밑에 아직도 있을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 앞에서 사진을 찍고 그랬던 거죠. 정말 그래서 제주땅, 아니 제주뿐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 돌 하나 나무뿌리 하나 함부로 걷어차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그 밑에 누가 잠들어있을지 모르는 그런 거죠."

박근혜 대통령은 왜 제주에 가지 않았나

지난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 4.3 사건과 관련해 '국가 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하지만 새 대통령으로 취임한 박근혜는 이번달 열린 '제주 4.3 위령제'에 가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선거를 앞두고 제주를 방문해 "4.3은 제주 도민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가슴 아파하는 사건으로 그동안 정부의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부족했다"고 한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한 교수는 '국가 추모기념일 제정'과 제주도민의 아픔을 치유하겠다'고 공언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달라진 모습에 아쉬움을 표했다.

"사실은 굉장히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했어요.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풀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그런 분 아닙니까. 그런데 안 갔습니다. 그리고 국가정보원장을 임명했는데 그 분이 과거에 한 말씀이 4.3은 무장폭도들이 일으킨 거라고 했죠. 또한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사과했지만, 군 공식입장은 '4.3은 군의 자랑스러운 과업이다'예요. '빨갱이 무장반란'을 진압했다는거죠."

'폭도 모가지 못 따온' 스무살 병사가 영하 15도 언 땅위에 발가벗겨져 있다.
 '폭도 모가지 못 따온' 스무살 병사가 영하 15도 언 땅위에 발가벗겨져 있다.
ⓒ 자파리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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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주로 오간 내용은 '현실에서 반복되는 역사의 비극'에 관한 것이었다. 한 관객이 영화 <지슬>에서 본 끔찍하고 비극적인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까 두렵다고 말하자 한 교수는 쉽고 간편한 말 대신 직설을 던졌다. 한 교수는 긴장된 한반도의 현실이 심상치 않다며 과거와 크게 변하지 않은 지금, 비극이 충분히 반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과거와 지금 얼마나 변했을까

"저는 거꾸로 이렇게 질문드리고 싶어요. 지금 전쟁분위기 심하잖아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고 쳐요. 전쟁이 뚝딱 끝나지 않고 장기화되고, 군대끼리 싸우는 게 아니라 민중의 생활영역까지 들어온다고 가정해보죠. 우리 동네, 우리 집 안방까지 그렇게 되었을 때 영화에서 본 것과 유사한 일이 일어날까 안일어날까요."

<지슬>의 한 장면에는 '폭도새끼 모가지 못 따와' 스무살 어린 병사를 공갈협박하고 밥을 굶기고 영하 15도 꽁꽁 언 땅위에 발가벗겨 철모만 씌우는 군대 장면이 나온다. 한 교수는 오늘날 많이 변화했다고 하지만 그런 상황이 안 벌어진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과거사 진상규명도, 국가의 사과와 보상도, 사회적 공감대와 아픔의 치유도 무엇하나 꾸준하게 이어지지 않은 까닭이다.

한 교수는 역사가 흠집낸 상처에 기꺼이 손을 대라고 권한다. 마침 <지슬> 누적관객이 10만을 돌파했다.
 한 교수는 역사가 흠집낸 상처에 기꺼이 손을 대라고 권한다. 마침 <지슬> 누적관객이 10만을 돌파했다.
ⓒ 자파리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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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에는 그게 뭐가 잘못된 것이냐 묻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건 우리가 수십 년동안 이념과 국가체제수호라는 명분으로 그런 문제를 은폐했기 때문이죠. 입막고요. 그래서 대다수는 기죽어 있었고 얘기를 못했습니다. 지금껏 못한 그런 말들을 지난 10년(김대중, 노무현 정권)동안 했죠. 그런데 다시 반동이 불어오고 있는거에요. "

반동은 뭘 먹고 자랄까

반동은 무관심과 패배주의를 먹고산다. 반동은 또 어떤 비극을 낳을까. 단순하고 정해진 해결책은 없다. 한 교수는 역사가 흠집 낸 아픈 상처를 알리고 관심가질 때 반동과 비극의 반복은 멈출 수 있다고 말했다.

"근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대면 내가 아파지거든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반드시 시작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런 영화가 자꾸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독 인터뷰를 보니까 영화나 4.3 이야기보다 이런 영화가 왜 만들어질 수 없는가를 피를 토하고 말하더라구요. 이 영화를 만드는 데 제주에서 2000만 원 지원했대요. 그럼 누가 해야겠습니까."


태그:#지슬, #한홍구, #시네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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