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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책표지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책표지
ⓒ 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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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 말하고 싶다.
아름다운 단풍으로 온 세상이 물들어 가는 가을날이다. 이 풍요로운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가공할만한 폭력과 차마 책장을 넘기기 어려운 성행위가 가감 없이 기록되어 있는 친족 성폭행 "생존자"의 증언록을 읽었다.

읽기 전에는 이런 어두운 이야기를 "또다시" 내 삶 속에 끌어와야 하나 싶어 망설였고, 읽으면서는 저자의 엄청난 고통이 상상이 되어 힘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자, 나도 잊어버리기 전에 "말" 좀 해야겠다는 용기가 불끈 솟아났다. 저자 은수연씨가 언급한 것처럼, 가해자들은 결코 "말"하지 않을 테니.

일상적 성폭력의 위협, 그 기억들

8살 때인가 9살 때인가, 오빠의 친구라던 몸집 큰 동네 아이가 있었다. 여자아이들을 쫓아다니면서 끈질기게 치마 속을 보자, 옷 좀 벗어봐라, 의사놀이하자며 반협박을 하곤 했었다. 나 역시 몇 번 위협을 당했다. 한번은 그 아이가 나에게 "너, 섹스가 뭔지 알아? 난 아는데 한 번 해볼래?"라고 속삭였던 기억이 놀랍도록 뚜렷하다. 뭐가 뭔지는 몰랐지만, 자기 집에 아무도 없으니 가서 놀자고 손목을 잡아끌었을 때 막연히 느꼈던 두려움도 생생히 기억난다. 늘 그 아이를 이상한 놈이라고 싫어했던 막내 오빠가 밥 먹을 시간이라고 나를 찾아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혹시 나 아닌 누군가가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까. 그래도 아무도 몰랐겠지만.

또 다른 기억. 고 1때 학교 행사가 효창운동장에서 있었다. 찾아가다 길을 잃은 나에게 웬 아저씨가 길을 알려주겠다고 다가왔다. 자꾸 으슥한 곳으로 가면서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너 같은 학생들이 나는 제일 좋다, 너 처녀지? 하고 얼굴을 들이댔던 기억은 또 왜 이리 생생한가. 마침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화를 면했고, 집에 와서 엄마에게 이야기하고는 모르는 사람을 따라갔다고 머리를 수없이 쥐어박혔다. 남자의 성기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준 바바리맨 사건과 여자라면 한 번씩을 겪어 왔을 법한 지하철 성추행은 세세히 말하지 않아도 모두들 알 것이다.

다만, 다니던 대학의 과 교수가 학생을 성폭행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대학교수라고 믿고 따르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결국 이런 곳에서도 문제가 터지는구나 싶었다. 사람들이 교수라는 권위에 눌려 쉬쉬하는 사이 결국 더 큰 사건이 터지고 만 것이 아닐까. 괜히 공범이 된듯, 착찹한 생각이 들게 한 사건이었다.

영화 <몽정기2> 한 장면.
 영화 <몽정기2> 한 장면.
ⓒ 영화 <몽정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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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와 피해자, 그들의 육성을 듣는다

내가 친족 성폭행 사건에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92년, 12년 동안 자신을 성폭행하던 양부를 남자친구와 함께 죽인 그 유명한 '김보은, 김진관 사건'의 대책위 활동을 하면서였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인터넷 뉴스의 홍수 속에서 친족 성폭행과 관련된 기사를 발견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기사는 그 내용의 중대성에도 불구하고 별로 진지하게 다가오지 않고 선정적으로만 느껴진다. 모든 성폭행의 약 17%가 친족 성폭행이며, 특히 아동 성폭행의 45%가 친족 성폭행이라는 통계는 현실에서 힘을 잃는다.

은수연씨의 책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일상적 학대의 상황 속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있다. 책 속에서 가해자 친부는 8세짜리 여자아이를 밤에도, 낮에도, 시간만 나면 강간하고 상처에 약을 발라가며 또 강간하고, 심지어 수능 전날에 시험을 보는 아이를 "땀나게 한 번 하자"며 강간하려다 말을 듣지 않는다고 거의 죽을 지경까지 때린다. 게다가 엄마는 "지 애비하고 붙어먹은 년"이라 딸을 욕하며 방치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피해가지 않고 정면에서, 일상적인 언어로 묘사해 준다. 

"수연아, 이리 와봐. 자꾸 해야 길이 들어서 안 아프니까. 이리 와 한 번 하자. 그리고 집에 있을 때는 내가 치마 속에 팬티 입지 말랬지."
"여기 누워, 치마 올리고. 이런데 올 때는 꼭 그렇게 치마 입고 와. 속에 팬티 입지 말고."

친족 성폭행은 이런 식으로 수년간이나 이어졌고, 독자는 책을 읽으며 가해자의 또렷한 목소리가 느껴져 진저리를 치게 된다. 꼭 이렇게까지 써야 하겠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겠다. 듣기 불편해할 사람들을 위해 "순화된" 말을 쓴다면 성폭행의 그 생생한 상처를 표현할 다른 말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결국은 피해자들은 또 다른 침묵을 강요당하게 될 것이다.

친족 성폭행의 사회적 맥락

저자의 뒷 표지 문구가 눈길을 끈다. 결국, 말해서 죽는 이는 가해자였다.
▲ 근친 성폭행과 관련된 책들 저자의 뒷 표지 문구가 눈길을 끈다. 결국, 말해서 죽는 이는 가해자였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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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인 친부는, 책에서 상세히 서술되지는 않지만 역시 어렵고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가해자의 친가가 매우 궁벽한 시골의 아주 가난한 곳이었다고 기억한다. 친할머니도 이상한 사람이었다. 어린 저자가 요강을 잘 버리지 않았다고 요강 속의 오줌을 먹이는가 하면 어릴 때는 귀찮은 존재라며 남의 집에 팔아넘기기까지 했다. 친할아버지는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아버지가 없는 집이 아니었을까 싶다. 외가는 훨씬 상황이 낫긴 하지만, 어렵기는 매일반이었다. 심한 치매를 앓는 외할아버지를 두고 외할머니와 저자의 어머니가 하루종일 일을 해 먹고 살았다. 친부는 저자의 어머니를 "아무하고나 붙어먹는 더러운 년"으로 증오했는데, 이는 친부의 왜곡된 의식에서 나온 여성 혐오로 보인다.

이와 같은 저자의 증언 속에서, 우리는 친족 성폭력이 배태되는 배경과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어려운 가정,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가부장적 권위와 폭력을 무기로 극단적인 '가정폭력'을 저지를 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친족 성폭력이다. 이는 20년 전에도 이미 언급되었던 것들이다. 당시의 심포지엄에서, 성폭력을 상담하는 여성 목회자분이 하셨던 말씀이 또렷이 기억난다.

친오빠에게 수년을 성폭행당한 한 소녀의 사례였다. 너무나 가난했던 집에서, 다 크고 나이 든 오빠와 어린 여동생이 한방을 쓰며 지냈던 집이 있었다.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사회에 대한 울분과 적개심에 차 있던 오빠. 돈이 없어 연애도 못하고 사창가도 못 가는 오빠가 한 방을 쓰던 여동생을 성추행하다가 결국은 성폭력으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동생의 입을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하게 된 사례였었다. 친족 성폭력을 소아 성애자나 성도착증 환자의 소행으로 볼 수도 있지만, 많은 사례가 이미 이런 사건의 사회적 맥락을 지목하고 있다.


성의 문제가 아닌 폭력의 문제  

그러나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단순히 자신의 사례를 증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저자가 던져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바로 성폭력도 폭력의 한 부류이고, 그렇기에 치유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말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일을 당하고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반응들이 별로다. (중략) 저런 일 당하면 살기힘들겠다. 정신이 이상해지겠다 생각하는 사회의 편견도 기분 나쁘다.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그럼 친아빠라는 사람에게 성폭력을 당한 나는 어쩌란 말인가 싶어 마음이 힘들어진다."

우리 사회의 성폭력 문제가 피해자를 더 힘들게 하는 면이 있다면, 그것은 성폭력, 혹은 "성"자체를 너무나 두려워하며 금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성폭력은 극복 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이야기 되곤 한다. 저자는 이러한 "편견"에 강한 문제의식을 던진다.

"피해자들이 모자이크와 우스꽝스러운 음성 변조를 벗고, 아픈 상처를 토로하고, 극복한 무용담을 나누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게 되는 날을 꿈꿔 본다. 나도 못 해본 그 일을"

가해자에 대한 연구와 대책, 절실하다

만약 김보은 사건이 없었고, 성폭력 특별법도 없었다면, 그녀의 자유가 가능했을까? 불가능했을 것이다. 저자는 성폭력 특별법의 원년 판결자이다. 그녀도 언급했듯이 좋은 형사과 판사가 있었기에 친부가 교도소에 7년 동안 수감될 수 있었다. (이것도 너무나 짧다고 느껴지지만!) 하지만 아직도 많은 점이 미비하다.

친족 성폭행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피해자를 위한 장기적인 쉼터의 마련, 상담치료를 위한 경제적 지원(은수연씨는 상담 치료를 위해 버는 돈의 거의 전부를 써야 했다고 말했다.), 전문화된 상담 인력(은수연씨가 최초로 가출했을 때 그녀를 상담한 여교수는 그녀에게 아버지와의 관계를 즐겼느냐고 했다.)이 더 많이 필요하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 교육이 더 많아지고, 여기에 친족 성폭력을 고려한 내용이 포함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아직은 전인미답의 상태로 남아 있는 가해자에 대한 연구와 대책이 절실하다. 친족 성폭행의 신고율이 낮은 이유 중 하나는 피해자들이 교도소를 나온 가해자들을 너무나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책을 보면, 친부는 수연씨의 친구 한 명도 성폭행했다. 가해자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또 다른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가해자들의 환경, 정신상태에 대한 면밀한 연구와 그에 따른 대책이 마련될 때, 친족 성폭행은 물론 전반적인 성폭행의 암울한 고리를 더 많이 끊어내고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올해 유난히 많았던 성폭행에 대한 수 많은 말들, 대책들이 벌써 잊혀져 가려고 한다. 잊혀져서는 안되는 성폭행 피해자들을 꼭 기억하자. 그리고 그 폭력의 한가운데 서 있는 친족 성폭행의 피해자들에게도 눈길이 머물기를.

덧붙이는 글 |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 어느 성폭력 생존자의 빛나는 치유 일기 | 은수연 (지은이) | 이매진 | 2012-08-10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 어느 성폭력 생존자의 빛나는 치유 일기

은수연 지음, 이매진(2012)


태그:#서평, #성폭력, #친족 성폭력, #성폭력 가해자, #일상적 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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