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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담양 소쇄원 입구에 있는 대밭
 전남 담양 소쇄원 입구에 있는 대밭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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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오후 3시 30분께 전남 담양 소쇄원 가는 길. 섭씨 35도가 넘는 폭염은 잦아들지 몰랐다. 입구에 대나무가 청량하게 눈을 사로잡는 듯했지만 그뿐이었다. 목구멍에선 연신 더운 숨이 토해졌다.

이조차 버거운데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의 여름나기는 어떠했을까. 조선왕조 최초로 신하들에 의해 옹립된 왕인 중종을 모셨던 그의 스승 조광조. 왕은 충신이었던 스승 조광조를 기묘사화로 엮어 죽였다.

양산보는 나이 열다섯에 상경해 조광조(1482∼1519)의 문하생이 된다. 그리고 나이 열일곱에 현량과에 합격했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벼슬에 나가지는 못했다. 그해 스승은 기묘사화를 당해 전남 능주로 귀양을 떠난다. 그는 유배지까지 따라가 스승 조광조를 모셨다. 그러나 그해 겨울 스승은 사약을 받고 귀천(歸天)하고 만다. 이후 양산보는 벼슬길은 물론 세상과 등지고 소쇄원을 지어 학문과 후학양성에만 몰두했다.

그래서일까. 조선 최고의 정원이라는 찬사에도 불구하고 대나무밭을 지나 처음 만난 소쇄원의 정자는 이름조차 애달프다. 대봉대(待鳳臺),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는 봉황새를 기다리는 정자. 양산보는 어떤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 기다림엔 어떤 회한이 폭염처럼 들끓고 있었을까. 그는 또 기가 막히는 한을 품고 여전했을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났을까.

한가롭게 노는 듯 보이지만 조선 선비들은 풍류를 즐기며 추상처럼 자신의 기개를 세웠고, 기개를 지키기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선비의 힘이었고 곧 조선의 힘이었다.
 한가롭게 노는 듯 보이지만 조선 선비들은 풍류를 즐기며 추상처럼 자신의 기개를 세웠고, 기개를 지키기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선비의 힘이었고 곧 조선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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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 광풍각에서 열리고 있는 '소쇄원 16영 재현' 행사를 관람하러 이들이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소쇄원 광풍각에서 열리고 있는 '소쇄원 16영 재현' 행사를 관람하러 이들이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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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문화재단이 소쇄원에서 재현한 '선비들의 여름나기 소쇄원 16영'은 풍류에 서린 양산보의 애한을 좇는 좋은 시작이었다. 그 밑바탕은 조선 중엽 최고의 선비로 꼽혔던 하서 김인후의 오언절구 <소쇄원 48영>. 광주문화재단은 이 가운데 행위로 재현할 수 있는 16영을 골라냈다. 박물화된 유적지에 생기를 불어넣는 새로운 시도다.

재현극은 1540년에서 1550년 무렵의 어느 여름 한 날에 담양 소쇄원에서 은거하던 양산보가 자신의 벗들인 하서 김인후와 김윤제를 초대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소쇄원(瀟灑園)은 '시원하고 깨끗한 정원'이라는 뜻이다.

먼저 제월당(霽月堂)에서 차를 대접한 양산보는 벗들을 광풍각(光風閣) 아래 연못가로 이끈다. 사람들이 자신을 '소쇄옹'으로 불러주길 좋아했던 그. 하서 김인후는 '못가 언덕에서 더위 씻기는(池臺納凉)' 그의 모습을 이렇게 노래했던가.

"남녘땅의 무더위는 견디기에 어렵지만
이곳 땅은 유독 달라 가을 같이 서늘하네
언덕 위에 바람 불자 대숲들이 일렁이고
연못에서 넘친 물이 바위타고 흐르누나."

스승을 잃고 세상과 연을 끊은 양산보. 그 높고 쓸쓸한 허무를 '언덕 위 바람'과 '넘치는 물'이 위무했을 것이다. 그렇게 자연으로부터 치유 받은 양산보의 모습을 하서 김인후는 "앉은자리 무너질까 무섭지도 아니하고, 관조하는 늙은이는 편안키가 그지 없네"라 했다.

광주문화재단은 하서의 구절 가운데서 '상암대기'(床巖對棋 평상바위에서 장기 두다), '복류전배'(洑流傳盃 도는 물에 술잔 띄우다), '조담방욕'(槽潭放浴·조담에서 미역 감다), '옥추횡금(玉湫橫琴 옥추에서 거문고 비껴 차고)' 등을 끄집어내어 양산보와 김인후, 소쇄원을 되살려 냈다.

소쇄원에서 볕이 가장 잘 든다는 애양단 앞에서 재현 행사를 하고 있는 출연진.
 소쇄원에서 볕이 가장 잘 든다는 애양단 앞에서 재현 행사를 하고 있는 출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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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걸린 저 판화에 소쇄원 48영이 담겨 있다.
 벽에 걸린 저 판화에 소쇄원 48영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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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붙이기 쉬워 '선비들의 여름나기'지, 광주문화재단이 재구성한 소쇄원 16영엔 양산보의 탄식과 초월, 이를 정갈하게 풀어헤치는 김인후의 미학이 곳곳에 서려있다. 이를 테면 한여름인데 일부러 '애양단의 겨울 한낮(陽壇冬午)'을 16영에 끼워 넣어 살린 연유를 김인후의 싯구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담장 앞에 시냇물은 아직까지 얼었으나
담장위에 내린 눈은 이미 벌써 다 녹았네
팔베개를 하고 누워 따뜻하게 볕 쬐는데
한낮 되자 닭 울음이 다리건너 들려오네."

애양단은 소쇄원에서 볕이 가장 잘 들어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이곳 기와의 눈만은 녹아 버린다는 곳이다. 김인후는 양산보가 그렇게 눈 녹듯 제안에 서린 애한을 없애는 것을 봤을 수 있고, 또 바라지 않았을까. 좋은 소식 전해준다는 봉황의 소린 아니더라도 닭 울음은 들었으니 최소한 새날이 온 것은 아니었든가.

해서 어쩌면 가장 좋은 여름나기는 시름을 터는 것인지 모른다. 시린 물에 발을 담가 씻는 탁족(濯足)을 하듯. 청랑한 물에 시리게 발을 담그며 스스로 차고 시퍼런 기상을 한시도 포기하지 않았던 조선 선비의 절제가 거문고 저음처럼 담대하다.

"거문고를 아름답게 잘 타기가 어려운건
온 세상을 다 찾아도 종자기가 없기 때문
맑고 깊은 물가에서 한 곡조를 타고 보면
서로 간에 알아주는 마음과 귀 있으려나."

거문고 켜기는 선비들의 풍류에서 빠지지 않았다.
 거문고 켜기는 선비들의 풍류에서 빠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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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족, 선비들은 시린 물에 발을 씻으며 마음을 곧추 세우곤 했다.
 탁족, 선비들은 시린 물에 발을 씻으며 마음을 곧추 세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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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소쇄원 48영 재현행사'는 광주문화재단이 문화관광 상설프로그램으로 기획한 '무등산의 사계' 중 여름 프로그램이다. 여름 프로그램엔 '성산계류탁열도' 재현행사도 포함되어 있다. 이번 행사는 서하당 김성원의 문집인 <서하당 유고>와 소쇄원에 관한 내력을 담고 있는 <소쇄원 사실>을 해제하여 진행했다. 시나리오 작업은 나경수 전남대 교수, 임준성 조선대 교수, 정재경 방송작가가 함께 했다.

광주문화재단 관계자는 "이런 재현이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오늘 시대와 어우러지면서 세태풍자와 전망을 하는 상설 행사로 자리잡았으면 한다"며 "내년에는 담양군과 공동개최를 추진하고 문학적인 요소가 강한 콘텐츠인 만큼 전문 문학인들의 참여를 이끌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태그:#소쇄원, #선비들의 여름나기, #광주문화재단, #피서, #무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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