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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는 민주화 이후 오히려 담론이 사라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지하게 논의돼야 할 이슈들이 산적해 있는데도, 아예 쟁점으로 떠오르지 않거나 간혹 논쟁이 벌어지더라도 갈등만 증폭되는 현상도 보입니다. 담론의 복원을 위해 어느 때보다 건전하고 창의적인 언론활동이 요청되는 시기입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은 매체창업 또는 칼럼과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우리사회의 건전한 담론형성과 의사소통에 크게 기여해온 분들이 진행하는 '저널리즘 특강'을 마련했습니다. 강의를 들은 저널리즘스쿨 학생들이 쓴 기사를 이번 학기에는 <오마이뉴스>에 연재합니다.<기자 주>

그의 강의 내용은 분쟁지역 전문 PD에서 ‘추적60분’ 책임 PD로 이어지는 그의 이력만큼이나 다채로웠다.
▲ 열강하는 구수환 PD 그의 강의 내용은 분쟁지역 전문 PD에서 ‘추적60분’ 책임 PD로 이어지는 그의 이력만큼이나 다채로웠다.
ⓒ 하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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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 '스쿨 존'... 생활 속의 위협을 고발한다

1996년 12월 체첸의 샤마스티 마을. 많은 주민들이 러시아군에게 학살당했다. 살아남은 여자들은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그 일을 겪은 뒤 어느 날, 양동이에 물을 길어가던 소녀는 낯선 남자의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빤히 그를 바라봤다.

남자는 러시아군의 폭격보다 소녀의 표정이 더 무서웠다. 웃음기 없는 얼굴에 스며있는 슬픔과 공포를 영상과 내레이션으로 옮기려 갖은 애를 썼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다큐멘터리 <비극의 땅 체첸, 평화는 오는가>다. KBS 구수환 PD는 소녀와 마주친 순간을 어제 일처럼 기억했다.  

세명대 저널리즘 특강 여덟 번째 시간을 함께 한 구수환 PD는 <세계는 지금>, <일요 스페셜> 등의 프로그램을 거쳐 지금은 <추적 60분>의 책임 PD와 MC를 맡고 있다. 동티모르, 체첸, 버마,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주요 분쟁 지역을 취재해 PD로서는 이례적으로 방송대상 보도부문 상을 받기도 했다.

요즘은 <추적 60분>을 총지휘하면서 <과자의 공포, 우리 아이가 위험하다>, <스쿨 존이 위험하다> 등 생활 속 위험을 고발한 내용으로 시청자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 분쟁 지역을 돌아다니며 보고 느낀 것들과 PD저널리즘에 대한 의견을 솔직하게 풀어 놓은 그의 강연은, 아무것도 고발하지 않고도 보는 이의 생각을 바꾸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았다. 

구수환 식 저널리즘, 핵심은 '신뢰'

감동적인 영상, 설득력 있는 내레이션 등은 PD저널리즘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 PD저널리즘의 가능성 감동적인 영상, 설득력 있는 내레이션 등은 PD저널리즘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 이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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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그가 밝힌 '구수환 저널리즘'의 제1원칙이다. 구 PD가 준비해온 '주요 작품 모음' 속에는 현장 속 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총소리가 끊이지 않는 예루살렘 골목을 뛰어다니고, 약탈당해 만신창이가 된 이라크의 박물관 내부를 둘러보고, 동티모르에 가서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벨로 주교와 인터뷰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나니, 상투적으로 들릴 수 있는 '현장 강조'의 목소리가 훨씬 설득력 있게 들렸다.

"저널리스트는 전달자입니다. 국민이 피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쫓아가서 확인한 다음 그대로 전달해 주는 게 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합니다. 분쟁지역에 가서 배운 게 저널리스트는 현장에 있어야지 사무실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무실에 앉아서 인터넷을 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검증'이다.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저널리스트 자신과의 신뢰를 의미한다면, 검증은 취재를 당하는 사람과의 신뢰를 지키는 것이다.

"후배 PD들이 인터뷰할 때도 꼭 3번을 하게 합니다. 여러 번 인터뷰를 해서 공통점이 있는 부분은 믿을 만한 얘기로 판단할 수 있으니까, 그 부분은 쓸 수 있는 거죠. 고발을 하되, 절대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널리즘이 진실을 파헤치는 것인데, 그걸 왜곡해서 또 다른 피해자를 낳으면 되겠습니까? 검증에는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죠. 그래서 집에 못 들어가는 일이 자주 생깁니다."

마지막으로 '원고를 직접 챙긴다'는 원칙이 있다. 보통 다큐멘터리 제작은, PD가 촬영해오면 그 촬영분을 보고 작가가 구성안을 짜고, PD가 편집을 한 후, 최종 편집본에 맞춰 다시 작가가 내레이션 원고를 작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구 PD는 촬영과 편집뿐 아니라 내레이션 원고 작성까지 직접 챙긴다.

시사 다큐, 특히 고발 프로그램에서는 잘못된 내레이션 한 마디가 시청자들에게 사실을 잘못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속에 반드시 온마이크(기자나 PD가 현장에서 직접 마이크를 들고 화면에 얼굴을 드러내며 설명하는 것) 장면을 넣는 것도 같은 이유다. 최대한 왜곡된 해석 없이 있는 그대로 시청자들에게 사안을 전달하려는 노력이다. 시청자들과의 신뢰를 쌓으려는 것이다.

"나중에 PD가 되든 기자가 되든. 여러분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굉장히 중요해요. 언론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고발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원고를 쓰면 자칫 명예훼손 소송을 당할 위험마저 있습니다. 저는 꼭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온마이크를 합니다. 빨리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는 급박한 순간에도 제가 꼭 온 마이크를 하는 이유는 '저는 속이지 않습니다, 제가 하는 얘기는 진실입니다, 보십시오'라고 시청자들에게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회적 고발'이 더 효과적

시사 다큐, 고발 프로그램 하면 서릿발 같은 비난과 고발이 떠오르지만 구 PD는 조금 다른 얘기를 꺼냈다. 때로는 비난보다 공감이, 고발보다 칭찬이 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자신이 복무했던 백두산 부대를 제대 20년 만에 찾아 제작한 다큐 <가칠봉의 수호 천사들>(2001). 촬영을 하면서 그는 20년 전 자신이 겪었던 부조리가 아직도 군대에 남아 있는 것을 알았지만 부조리보다는 장병들의 노고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방송이 나가고 게시판에 글이 뜨기 시작했어요. '아들 인간 만들려면 군대 보내야 한다' 이런 글부터 '도대체 (불법, 특혜로) 병역면제 받은 사람들은 뭔가요'라는 글까지 나왔죠. 제가 병역 문제 고발을 직접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 우회적으로, 전방에 간 군인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고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하는지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 화살이 고위층 병역 면제자들로 간 겁니다. 우회적으로 고발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우회적 고발이었을까? 친분 있던 종군기자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기획했다는 다큐멘터리 <종군기자, 그들이 말한다>(2004).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이라크전에 '참전'해, 다치거나 죽은 종군기자 중 한국 기자는 단 한 명도 없다. KBS에서 최초로 방탄복을 구매해 입고 전쟁터를 누빈 구 PD지만, 그 또한 종군기자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굉장히 기본적인 의문이 들었어요. 왜 저렇게 사선을 넘나들까? 죽으면 그만인데…. 특종을 하는 게 아니라 존경을 받는 저널리스트는 어떤 사람일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들을 했지요. 저널리스트는 전달자니까 현장에 있어야 한다, 결국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게 여러분이 명심해야 할 것이기도 하구요."

구 PD가 준비해온 <종군기자…>의 주요 장면. 종군기자였던 약혼자를 전쟁터에서 잃고, 그 후 다른 종군기자와 결혼했지만 그마저 분쟁지역에서 잃어야 했던 엘리다라는 여성의 사연이 화면을 채웠다. 남편의 추모비를 쓰다듬는 엘리다의 모습 위로 내레이션이 흘렀다. '종군기자는 역사의 현장을 남기기 위해 뛰는 사람들이다. 때로는 그들이 역사의 기록으로 남는다.' 이 말을 들으며 학생들 틈의 구수환 PD를 보니 그는 눈물을 훔쳐 내고 있었다.

PD 저널리즘은 위기인가

이날 강의에는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뿐 아니라 다른 대학의 언론인 지망생들도 여럿 참석했다.
▲ 열린 저널리즘 특강 이날 강의에는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뿐 아니라 다른 대학의 언론인 지망생들도 여럿 참석했다.
ⓒ 이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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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끝난 후 이어진 학생들과의 식사 자리에서는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지난 2004년 탄핵 방송 논란 이후 불거진 PD 저널리즘의 위기에 대한 질문에 구수환 PD는 이렇게 말했다.

"우선 제작 환경이 달라졌습니다. 방송 후 소송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범죄를 저지르는 수법이 교묘해져서 취재나 방송이 어려운 경우가 늘어났습니다. 또 PD들 내부의 문제점도 있습니다. 시사 고발 프로그램 같은 힘든 분야에는 지원자가 별로 없어요. PD의 전문성 확보 문제도 중요하구요."

구 PD는 최근에 이야기되고 있는 방송 환경의 변화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시했다. 방송과 통신의 융합으로 가속화할 수 있는 방송의 상업화 경향, 신문과 방송의 겸영이 초래할 수 있는 방송의 공영성 약화를 걱정하는 것이다.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 어떻게 보면 시사 고발 프로그램의 최후 보루입니다. 시청률만을 중시하는 상업 논리가 방송을 지배하면 안 됩니다. 서로 다른 매체가 존재해야지 똑같은 성격의 매체만 존재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구수환 PD와 함께한 세 시간 남짓의 시간은 '구수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군의 총탄이 쏟아지는 예루살렘의 베들레헴 성당에 진입한 에피소드는 소설을 읽는 것처럼 짜릿했고, 알자지라 방송과 우리 언론의 이라크전 보도를 비교하는 대목은 쓰디썼다. 그러나 '정말 보람 있는 직업이다, 꼭 저널리스트가 되셨으면 한다'는 말은 언론인 지망생들에는 달콤했다.

<추적 60분> 팀의 회의가 있다며 또다시 여의도로 향하는 구수환 PD. 일주일에 겨우 이삼 일 집에 '들를' 정도로 일에 몰두하는 가장을, 아들이 잘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그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내 이름이 어딘가 기록에 남을 텐데, 그렇다면 사회와 인간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다. 어떤 저널리스트는 기록이 되기도 한다.

"학생들의 태도가 워낙 열정적이라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강의 후 구수환 PD는 말했다. 저널리즘에 대한 강의 외에도 프로그램 제작 에피소드와 예비 언론인에 대한 조언이 곁들어졌던 이번 강의에는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들 외에도 언론을 공부하는 대학 재학생들과 언론인 지망생들이 청강생으로 참석했다. 고려대 언론학부에 재학 중인 김현정(26)씨는 "PD 지망생으로서 PD라는 직업에 대한 새로운 꿈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한국언론의 새로운 표준과 가치를 모색해보려는 '저널리즘 특강'에 독자 여러분, 특히 언론인과 언론인이 되고자 하는 분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서울에서 진행되는 특강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분은 사전에 연락해주시면(043-649-1148) 제한적이나마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특강일정표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홈페이지(http://journalism.semyung.ac.kr)에 게시돼 있습니다.



태그:#구수환, #추적 60분, #세명대 , #저널리즘스쿨, #하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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