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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큰 스승이자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수산(86) 큰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 스님은 말사인 영광군 불갑사에 칩거하고 계셨다. 하늬바람이 기지개를 폈는지 초가을 내내 산사를 뒤덮었을 상사화 꽃망울은 스러지고 없었다. 아마도 겨우내 장송과 벗할 꽃줄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불갑사는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불갑산(516m)에 위치하고 있는데 백제 침류왕(384년) 때 인도스님 마라난타 존자가 처음 불교를 전래한 사찰이다. 첫 불교 도래지라는 의미를 담아 부처 불, 첫째 갑자를 써서 불갑사라 하였으며 마라난타 존자가 처음 도착한 포구 또한 아무포, 부용포라 불리다가 성인이 법을 가지고 온 곳이라 하며 법성포로 바꾸었다고 한다.  
“나는 좀 같은 존재다.”

대선으로 시끄러운 속세와 내홍을 겪고 있는 한국불교에 대해 한 말씀 해달라는 청을 드렸더니 스님은 뜻 모를 화두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그 화두를 받을만한 내공이 없는 사람이라 당황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촌철살인 일침을 받아 적을 수 있으리라는 나의 기대는 스님의 한 마디에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태어난 보람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안 태어난 것만 못하다. 문자를 배우고 법을 배웠으면 뭐하나. 내 인생하나 해결 못한 것이 무슨 남을 해결한 자격을 가지겠는가? 무용지물 한 것이 세상에 태어나서 90이 다 되도록 먹고 입고 썼는데, 세상에 무슨 혜택을 남긴 것이 있는가. 나는 인간세상의 좀이다. 내가 죽은 사람을 살렸는가.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어 가르쳤는가.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 주었는가.”

 

입으로 내뱉는 겸양의 말이 아니었다. 스님의 말씀에는 안타까운 진정성과 철저한 자기번민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스님은 선승으로 살아 온 여든여섯 평생에 대해 가슴 저린 참회의 후회의 말씀을 토해 내었다. 


“요즘은 법문 해달라는 말이 가장 무섭다. 나는 구두선(口頭禪)만 했다. 되지도 않는 이야기 지껄여 봐야 들을 땐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것 같다고 하고 마음을 고쳐먹지만 뒤돌아서면 그것으로 그만이면 하나마나한 헛소리고 구두선이 아니겠는가.”           
 
스님은 ‘소소영영(昭昭靈靈) 부증생부증멸(不曾生不曾滅)이라’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번갯불처럼 보이지 않고 형체도 없지만 분명이 있는 것은 오직 내 마음자리뿐이다.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뜻풀이를 해 주었다. 아마도 서산대사께서 말씀하신 선가귀감(禪家龜鑑)의 한 구절을 말씀하신 것 같다.

 

有一物於此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從本以來 본래부터
昭昭靈靈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不曾生不曾滅 일찍이 나지도 죽지도 않았고
名不得狀不得 이름 지을 수도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 - 서산대사 선가귀감 중에서

 

“사람이 사람이지만 또 사람이 아니야. 천지만물이 그렇듯이 사람에겐 분명 있어야 할 자리가 있어. 그 자리를 모르고 남의 자리를 탐하는 것보다 자기본성을 먼저 알아야 하는데 세상의 이득을 먼저 아는데서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돈, 명예, 권력 같은 것들 죽어서 가져갈 수 있는 게 있나? 공덕을 쌓고 업을 지워야 죽을 때 청명한 마음자리를 가져가는 것이지.” 


아마도 최근 시끄러운 한국불교에 대해서 한마디 훈수를 하신 듯하다. 세속의 잣대로 종교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종교가 사적인 영역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공적인 부분에 대해 책임지겠다고 이야기 해왔다면 분명 그에 응당한 행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디 이것이 불교에만 통용되는 것이겠는가. 이타심이 부족한 몇몇 개신교 집단도 귀 기울여야 할 대목 같다.

 

“염장에 문제가 생기면 갈라서 보지만 부모자식 간에도 볼 수 없는 것이 마음이다. 몸을 낮추는 이는 많아도 마음을 낮추기는 어려운 듯싶다. 출가한 수행자가 계율을 어기는 것은 몸과 마음이 함께 출가하지 못한 탓이다. 승복은 입었으나 세속의 욕망을 버리고 있지 못하는 탓이다. 종교를 통해 세상을 정화하자고 떠드는 사람부터 마음을 정화해야 하는데 말만 앞세우니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닌가. 속세의 욕망을 버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깨달음을 얻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알아야 한다. 수행자들이 출가본연의 자세로 돌아와야 한다.”

 

수산스님은 끝으로 교육문제에 대해서 덧붙이셨다. 만사에 근본이 교육문제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시는 까닭일 것이다. 지나치게 경쟁을 유도하고 학교교육이 양극화를 부추기는 사육의 장으로 전락하는데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셨다. 교육정책을 둘러싸고 대선정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데 대선주자들이 다시금 되새겨야 할 말씀인 듯싶다.
 
“옛날에는 학교에서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수신(修身)을 가르쳤는데 요즘은 지식만 가르친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식만 강조하다 보니 남을 밟고서 최고자리에 올라가는 것만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돈이나 권력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태가 생긴 것이다. 그것은 정치가 잘 보여준다. 자신을 다스리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입과 탐욕으로 하니 항상 나라에 분란이 일고 시끄러운 것이다.”


스님은 왜 스스로를 세상에 도움은커녕 해만 끼치는 ‘좀 같은 존재’라 하셨을까. 수행자라면 마땅히 밝은 눈으로 맑은 소리를 가려듣고 입으로만 법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 할 것이다.

 

진정으로 참된 나의 마음자리를 찾고 나서야 법을 논하고, 그 법이 행함의 길 위에 있어야 함을 말씀 하신 것일 것이다. 여든여섯의 노스님은 다시 수행의 길에 나서시겠다고 말씀 하신다. 후배들을 탓하기 전에 원로로서 스스로에게 회초리를 드시는 것이다.

 

어둠이 자욱이 내려앉은 산사를 내려오며 인도스님 마라난타를 생각했다. 중국 동진의 효무제의 환대를 마다하고 이억만리 백제 땅 법성포로 뱃머리를 돌린 그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오늘을 사는 우리가 다시금 생각해 볼 일이다.    


태그:#수산스님, #불갑사, #백양사, #한국불교, #마라난타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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