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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황악산이 아니라 그곳을 산행 장소로 택했는지 모르겠다. 지난 26일, 집을 나설 때는 여느 때처럼 황악산 중턱까지 가리라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변수가 생긴 것은 막내 윤경이 때문이다. 보령 이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놀토'니까 아이들을 대전에 보내면 영화라도 한 편 보여주고 돌려보내겠다는 것이다. 현경이는 봉사활동 후 학교에 공부하러 간다고 나갔다. 그리고 윤경이도 대전에 가지 않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래도 조카들이 우리 아이들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 사이 조카 은희는 문자메시지까지 보내왔다.

"이모부, 윤경이 언니 대전 보내 주세요. 이젠 열심히 공부한대요. 꼭요!"

결국 윤경이에게 알아서 하라고 했지만 기차 시간이 애매해서 내가 차로 데려다주어야 할 것 같았다. 윤경이를 역까지 태워다 주고 돌아오다가 갑자기 등산 장소가 변경된 것이다.

김천시립도서관 뒤편에 오를 만한 산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내가 교육청 동아리 모임에 참석했었는데, 한번 그 산으로 야유회를 간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또 이태 전에는 모암교회 양봉룡 장로님에게 목사 장로 명감을 만드는 데 필요한 사진을 시립도서관에서 전달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등산복 차림이어서 어디 가느냐고 물으니 도서관 뒷산에 간다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진 때도 있었다.

황톳길에 미끄러져도 정상은 밟아봐야지

등산로 입구, 산 밑 주택가에 주차를 하고 지팡이를 챙겨서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중턱까지는 포장이 되어 있어서 별로 어려움 느끼지 못하고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포장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흙길을 타고 올라야 하는 코스에서는 '이것이 등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날씨가 풀려서 황톳길이 미끄럽기가 만만치 않았다. 몇 번 미끄러져 옷을 버리기도 했지만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올 일이 더 걱정이었다. 그래도 초행이어서 정상까지 밟아보고 내려가고 싶었다.

나는 등산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아주 옛날 대학 다닐 때, 친구따라 등산을 간 적이 있다. 그때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하는 친구가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이날 나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해서 내려가세요."

올라가고 내려오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인사가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경사가 더 가파른 곳을 올라가는데, 뒤에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고하십니다. 천천히 올라가십시오. 길이 미끄럽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먼저 올라가시지요."

등산복과 등산화를 구비하고 본격적으로 산행을 하는 부부 같았다. 그들은 각각 등산가방(배낭)까지 메고 있었다. 그들과 헤어진 후 내려오는 사람에게 정상이 가까웠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조금 올라가면 왼편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한 15~20분 정도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친절하게 알려주고 내려갔다.

산에서 만난 선한 사람들

나보다 훨씬 뒤에 출발한 팀이겠지만 나를 추월하는 일행들이 있었다. '김천장애인복지관'이라는 글자가 찍힌 똑같은 가운을 입고 있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2인 1조가 되어 고성산 산행에 나선 듯했다. 비장애인들 중에는 전투경찰도 있고 사복을 입은 건장한 청년들도 있었다. 인솔자인 듯한 청년은 얼굴이 많이 상한 장애인인 듯했다. 그는 모자를 쓰고 짙은 선글라스를 썼지만 일그러진 얼굴이 금세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그는 친절하면서도 씩씩하게 앞에서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봉사하는 마음은 늘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중 눈에 익은 얼굴이 있어 자세히 보니 정욱이다. 내가 작년까지 '더고운봉사단' 단장으로 섬기면서 만난 아이다. 벌써 듬직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작년에 고3이었으니 금년엔 졸업을 하고 무엇이든 하고 있을 것이었다. 정욱이에게 내가 기억이 나느냐고 물으니 "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욱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옥산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고성산 입구 주택가에는 교회가 자리잡고 있었고 또 중간 중간 사찰과 암자가 몇 개 눈에 띄었다. 산에는 어딜 가나 예외 없이 양지 바른 곳에 사찰이 있다. 세상과 격리되어 있는 사찰은 중생 구제의 목적엔 다소 불편함이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라 때 원효대사는 심산유곡 사찰을 벗어나 방방곡곡을 다니며 불법을 전하기도 했다. 이런 방법 때문에 당시 승려 사회에서 이단시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성사도 산행로 오른편에 있는 작은 사찰이다.

산을 오르면서 고성산을 한자로 기록해 놓은 푯말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고성산이 어떤 의미일까를 혼자 생각해 보았다. 고성(高聲), 고성(高聖), 고성(高城) 등 여러 갈래로 추측해 보았다. 고성(高聲)은 높은 소리라는 뜻이고, 고성(高聖)은 높고 거룩함이라는 뜻이며, 고성(高城)은 높은 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앞 글자에 '높을 고'자를 배치한 것은 공통적이었다. 왜냐하면 산은 평지보다 높은 곳이어서 사람들이 올라가야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글자가 문제였다.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높은 소리'도 어울리는 산 이름이다. 산에서 외치는 소리는 더 크게 들린다. 메아리가 되어서 돌아오는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높고 거룩함'도 말이 된다. 왜냐하면 예부터 산을 신성시하는 토테미즘이 우리 생활을 지배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룩할 성(聖)' 자가 들어가는 산 이름이 의외로 많다. 성주산(聖住山), 성락산(聖落山), 삼성산(三聖山)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정상에서 한참 기다렸어요"

정상 가까이 올라가니 길이 몹시 가팔랐다.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고 옆에 굵은 밧줄로 손잡이를 설치해 놓을 정도로 경사가 급했다. 이런 장치는 혹시나 굴러 떨어지는 사람이 나올까봐 설치한 안전장치일 것이다. 계단 중간쯤 가서 숨을 돌리고 있는데, 아까 만난 부부 등산객을 다시 만났다. 그들은 반갑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남편 되시는 분이 말했다.

"힘 드시지요? 정상이 바로 저깁니다."
"예,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내려가세요."

부인이 말을 이었다.

"뜨거운 물이 좀 남았는데, 커피 한잔 드시겠어요?"
"주시면 감사히 마시지요."

부인은 즉석에서 커피를 타면서 말했다.

"정상에서 같이 커피 들려고 한참 기다렸어요."

고마웠다. 그들은 나를 특별하게 기억하는 듯했다. 나처럼 몸이 불편한 사람이 지팡이에 의지해서 산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눈에 띌 일인데, 거기에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는 모습에 격려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런 곳에서도 선한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입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뭉클해왔다. 나는 그들을 위해서 마음 속으로 간단히 기도를 하고 커피를 마셨다. 산 위에서 마시는 커피여서 그런지 맛이 유별났다.

해발 500m도 안 되지만, 내게는 감격의 첫 산행!

정상엔 몇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여나문 명의 아주머니 부대(?)가 유쾌하게 떠들어댔다. 정상에 이런 표지석이 서 있었다.

"高城山 482.7m"

그중 한 여인이 말했다.

"애걔걔, 난 1000m는 되는 줄 알았는데, 500m도 안 되다니!"

그들도 미끄러지며 어렵게 정상까지 올라온 것 같았다. 힘든 산행을 하면 걸음이 더뎌서 산 높이도 더 아득하게 보이게 한다. 고성산(高城山)이라. 높은 산성이 있었나? 어쨌든 산의 한자 이름을 확인하고 그 산을 다시 음미하면서 하산을 시작했다. 걱정이 태산 같았다. 산은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힘든 것으로 알고 있다. 더욱이 장애인인 내가 미끄러운 황톳길을 걸어 내려간다는 것은 여간한 걱정거리가 아니다. 그래도 스스로 올라왔으니 내려갈 방도도 있으려니 하고 마음을 다졌다.

몇 번 미끄러졌지만 그런대로 기분 좋은 산행이었다. 직지사를 지나 황악산 중턱 암자들을 순례했을 때는 '산행'이란 말을 쓰기가 좀 그랬는데, 482.7m 고성산 정상까지 다녀온 오늘은 '산행을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산행을 하면서 격려를 해준 사람들, 특히 나를 기다리면서까지 맛있는 커피를 타준 다정한 부부와 장애인들을 도와 함께 산을 탄 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태그:#고성산, #장애인 등산, #정상 등정,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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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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