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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해루
▲ 산해관 등해루
ⓒ 김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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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삼계가 청나라에 항복했고 북경으로 진격해 들어오는 군대는 팔기군입니다."

정보참모의 보고를 받은 이자성은 경악했다. 자신의 군대는 훈련된 군인이 아니라 농민이 주축이다. 부패한 황제를 몰아내겠다는 결기는 대단했지만 전투력은 미약했다. 상대는 기동력을 자랑하는 팔기군이다.

"북경에서 철수하라."

이자성이 후퇴를 명했다. 스스로 황제라 칭하던 '42일 천하'가 끝난 것이다. 퇴각하는 이자성 부대는 궁궐을 불태우고 보화를 약탈했다. 보이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부녀자는 겁탈하고 끌고 갔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러 온 의로운 군대로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백성들이 등을 돌렸다.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북경에 입성했던 이자성 부대는 이 때부터 비적으로 추락했다.

명나라 장수의 안내 받으며 명나라 심장부로

산해관을 출발한 도르곤은 오삼계의 안내를 받으며 북경으로 진군했다. 저항하는 이자성 군졸은 없었다. 오삼계의 통지를 받은 주변 주현(州縣)의 수장들은 연도에 나와 머리를 땅에 박았다. 항복의 표시다. 무령현과 창려현을 통과하고 개평위를 지났다. 하루 평균 1백 20~30리의 강행군이었다.

옥전현을 지나 통주강 언덕에 군막을 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한 무리의 군졸이 나타났다. 미처 퇴각하지 못한 1백여 명에 이르는 이자성의 낙오병들이었다. 군졸들이 도르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산해관 전투에서 패배한 후 청나라 군대가 쫓아올 줄 알고 황급히 재화(財貨)와 부녀자들을 수탈한 다음 화약을 터뜨려 궁전을 불태우고 성문을 빠져 나갔습니다."

북경의 황성이 텅 비어 있다는 얘기다. 도르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팔왕과 십왕 그리고 오삼계를 불렀다.

"이자성 부대가 궁궐에 불을 지르고 황성을 빠져 나갔다. 그들을 추격하여 섬멸하라."

팔기군의 정예부대와 오삼계가 추격에 나섰다. 부대를 출동시킨 도르곤도 길을 재촉했다. 후속부대가 미처 도르곤 행차를 따라잡지 못해 뒤쳐졌다. 그 부대에 세자의 식량 보따리가 있는데 시강원 관원들과 호위 무사들이 이틀 동안이나 밥을 굶는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자금성의 정문 오문
 자금성의 정문 오문
ⓒ 임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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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내성에 도착했다. 내구외칠(內九外七)이다. 아홉 개의 문이 있는 황성권역이다. 도르곤이 행렬을 정지하고 차비를 재정비했다. 순치황제로부터 받은 황색 의장(儀仗)을 전도(前導)로 삼고 말에서 내려 가마를 탔다.

도르곤의 행차는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조양문을 통과했다. 조양문은 원래 황성의 식량이 드나드는 문이었으나 오늘은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가 들어간 문이 되었다. 연도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환영했다.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아간 나쁜 놈들을 몰아낸 군대다."
"황제를 죽인 비적들을 토벌하러 온 부대다." 

인심이 천심이라 했던가. 북경 사람들의 청나라 군에 대한 반감은 없었다. 오히려 반기는 기색이었다. 백성들이 향을 피우고 두 손을 마주잡고 경의를 표했으며 만세를 부르는 자도 있었다. 북경 무혈입성이다. 산해관 무혈입성에 이어 또 하나의 이변이었다.

무주공산 북경에 깃발을 꽂아라

북경은 텅 비어 있었다. 말 그대로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자금성 정문에 도착했다. 오문은 불타고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금의위의 관원이 황제의 의장을 가지고 도르곤을 맞이했다. 금의위(錦衣衛)는 황제의 숙위부대로서 오늘날의 대통령 경호실에 해당한다.

도르곤은 금의위에서 대령한 황옥교로 갈아탔다. 황옥교(黃屋轎)는 황제가 타는 가마다. 도르곤의 행차가 불타버린 태화문을 통과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태화전 주춧돌과 너른 광장이었다. 크고 웅장했던 자금성이 이자성 부대의 방화로 무영전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대명제국(大明帝國) 군대가 출정할 때면 9만여 명의 군졸이 모여 출정식을 가졌던 태화전은 불타고 광장은 을씨년스러웠다. 소현은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의 나라 명나라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명나라는 세상의 중심이었고 대륙의 지존이었다. 그런데 소현의 눈앞에 펼쳐진 명나라의 잔해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천명이 떠난 명조(明朝)에게 10m 궁궐 벽과 50m 해자(垓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사치스러워 보였다.

도르곤이 말하던 '큰 세상'이 바로 이것이구나 생각되었다. '크다고 생각하는 세상을 덮어버리는 더 큰 세계' 이것이 바로 '힘의 논리'라 생각하니 오금이 저렸다.

북경 접수한 도르곤 "황제를 성대하게 장사 지내라"

황옥교에서 내린 도르곤이 무영전에 자리를 잡았다. 좌우에 범문정과 용골대가 자리를 잡고 소현도 자리를 잡았다. 도르곤이 금과(金瓜)와 옥절(玉節)을 펼쳐 놓았다. 청나라의 징표다. 도르곤이 환관을 불렀다.

"황제는 어떻게 되었느냐?"
"유적이 황성을 포위하고 대포와 화전(火箭)으로 성중을 공략해 왔습니다. 성을 지키던 군졸들은 여러 달 동안 군량을 공급받지 못해 굶주리고 사기가 떨어져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유적이 성을 타고 넘어오니 황제와 황후는 스스로 목매어 죽고 태자와 황자는 그들에게 붙잡혀 갔습니다. 황성의 백성들이 황제와 황후를 북쪽 진산에 장사지냈습니다."

"이런 고약한 놈들이 있나? 우리는 비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이곳에 왔다. 백성들은 근심하지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궁궐에 남아 있던 관원과 환관 7천∼8천 명이 불탄 잔해가 어지러운 황궁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범문정! 황제의 장례를 성대히 거행해주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도르곤이 범문정에게 명했는데 허리를 굽실거리는 것은 명나라 신하들이었다.

이자성을 연금하라

"이봐라. 용골대! 백성들을 약탈하는 도적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소탕하라."
"명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용골대는 부대를 편성하여 산서성으로 도망간 이자성 부대를 추격하라 명하고 내성의 아홉 개 문을 걸어 닫았다. 이것이 바로 북경에 무혈입성한 청나라의 최대 묘수였다. 모든 군대의 황성출입을 통제한 도르곤은 소현의 거처로 무영전 앞 행랑채를 지정해 주었다. 세자를 호위하던 무사들과도 분리되었다.

이자성 부대를 추격하던 팔기군에게 급히 돌아오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보정부(保定府)에서 패잔병 6∼7만 명을 뒤쫓던 팔기군은 이자성 부대가 버려둔 궁녀 1백여 명과 채단(綵段) 수만 필만을 획득하여 돌아왔다. 팔기군이 안정문에 당도했다는 보고를 받은 용골대는 부대를 통과시키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라 명했다.

이자성 반란군을 추격하던 오삼계가 부대를 거두어 부성문으로 귀환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한 용골대는 급히 부성문으로 출동했다. 부성문은 황성의 땔감이 드나들던 문이다. 오삼계가 부대를 이끌고 부성문에 도착했다. 용골대가 성문을 열고 오삼계를 영접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안으로 드시지요."
오삼계가 아무런 생각 없이 성문을 통과한 순간 도르레와 연결된 성문이 닫혔다. 낌새를 감지한 오삼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짓이오?"
"성중에 이자성의 잔당이 날뛰고 있으니 안전한 곳으로 모시라는 특명입니다."

이자성으로부터 궁궐을 탈환하면 황자를 옹립하여 명조(明朝)를 이어가려던 오삼계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는 청나라의 명나라 접수 작전이 완료되는 시점까지 연금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발행하는 특별 통행증. 심양고궁박물관에 있다.
▲ 황제폐 황제가 발행하는 특별 통행증. 심양고궁박물관에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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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른곤과 동행하여 북경 무혈입성과 명나라의 패망을 목격한 소현세자는 이 소식을 빨리 고국에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현재는 전시상황이다. 밀사를 보낸다 해도 무사히 조선에 도착한다는 보장이 없다.

심양에서 한성까지는 그래도 무난하지만 북경에서 심양에 이르는 길은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특단의 통행증이 없이는 엄두도 내지 못할 여정이다. 소현이 도르곤과의 면담을 신청했다.

"개천벽지(開天闢地)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오? 난 그 중심에 있어서 그런지 아직 감흥을 모르겠소. 하하하."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이 사실을 본국에 빨리 알려야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오. 그리 하도록 하시오."

"여기에서 한성까지 3천 3백리. 머나먼 길입니다. 가는 도중에 무슨 변고가 있을 줄 모르니 통행증을 부탁합니다."

도르곤이 스스럼없이 통행증을 만들어 주었다. 통행증을 받아 쥔 소현이 금군(禁軍) 홍계립을 불렀다.

"지체 없이 달려가 이 수서를 조정에 전하라."

명나라의 몰락을 직접 목격하고 작성한 서류를 내밀었다. 장계를 세자가 직접 작성 치계한 일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그것도 정서된 판본이 아니라 수서(手書)다. 그만큼 시간이 촉박했다는 반증이다. 명나라의 패망 현장을 목격한 소현은 이 소식을 고국에 빨리 알려 부왕과 사대부들이 가지고 있던 기존 관념을 바꾸기를 열망했다.

조선실록에는 소현의 수서 치계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로 풀이하면 제국멸망 현장에 특파된 기자가 급전을 타전한 것과 흡사하다.

세자가 금군(禁軍) 홍계립을 보내어 수서(手書)로 치계하였다. '구왕(九王) 이하 여러 진영이 유적을 대파시켜 승승장구의 기세를 얻었고 오삼계가 미리 전로(前路)의 주현(州縣)에 문서를 돌려서 모두 구왕을 맞아 항복하도록 하였습니다. 황성의 궁전이 모두 불타고 무영전만이 홀로 남았습니다. 황급한 가운데 대충 적어서 치계를 드리니 황송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인조실록>

같은 날, 사신으로 심양에 와있던 우의정 이경여는 비밀리에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천하의 일이 온통 이 지경에 이르니 눈물을 닦고 통곡하며 무슨 말씀을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사건. 명나라의 멸망을 보는 시각은 이렇게도 달랐다.


태그:#북경, #이자성, #오삼계, #도르곤, #자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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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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