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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후 4시 서울 잠수교 남단 반포한강공원에서 열린 '한강 멍때리기 대회' 에서 참가자들이 멍 때리기에 임하고 있다.
 12일 오후 4시 서울 잠수교 남단 반포한강공원에서 열린 '한강 멍때리기 대회' 에서 참가자들이 멍 때리기에 임하고 있다.
ⓒ 손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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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30분 넘어가면 탈락자, 기권자 속출합니다. 그러면 저도 인터뷰하면서 진행하기가 훨씬 수월할텐데 다들 너무너무 잘 버티고 계십니다."

5월 12일 오후 4시 서울 잠수교 남단 반포한강공원에서 열린 '한강 멍때리기 대회' 현장. 77명의 참가자가 30분이 넘도록 큰 미동이 없자 사회자가 진행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한 말이다.

'멍 때리기 대회' 참가자들은 90분 동안 '멍'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눈을 지그시 감지만 않으면 드러눕는 자세도 무방하다. 그러나 휴대폰을 사용하거나, 음식물을 먹거나, 옆사람과 잡담을 하는 등 멍 때리는 자세가 흐트러지면 독특한 복장의 스탭들이 현장에서 적발해 퇴장시킨다.

다만, 90분 동안 말을 할 수 없는 참가자들은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색깔 카드를 제시해 몇 가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빨간 카드를 들면 마사지를 받을 수 있고, 파란카드를 들면 물을 제공받을 수 있다.  노랑카드는 부채질 서비스용, 그 밖에 표현하기 어려운 불편사항에 대해서는 만능의 검정카드가 있다. 그러나 70명 이상의 참가자들이 이런 도움 없이 멍 때리기 대회를 완주했다.

멍때리기 대회에는 상금이 없다. 우승자에게 조각가 오거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패러디한 트로피가 돌아가는 정도다. 그런데도 대회만 열리면 참가 신청이 쇄도한다. 올해는 2787개 팀이 몰려서 본선 경쟁률이 35 대 1에 이르렀다.

참가자들 면면도 다양하다.  시니어 모델, 첫 책을 출간한 작가, 노트북 컴퓨터를 가져온 방송국  구성작가, 퇴사한 패션 디자이너, 해양수산부 청원경찰 등등 하나같이 멍 때리기 대회에 어울리는 사연이 있음직한 사람들이다.  자녀를 동반한 신세대 부모들의 참여도 새로운 트렌드다. 자식이 아무 것도 안 하고 멍 때리고 있으면 뭔가 모자란 행동으로 인식했던 기성세대들을 생각하면 달라도 너무 달라진 세태를 보여준다.

올해로 10년 째를 맞은 '한강 멍 때리기 대회'는 미술 아티스트 웁쓰양이 창시했다. 아무 생각 없이 넋을 놓고 있다는 뜻의 단어 '멍 때리다'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이를 경연으로 승화시킨 것은 웁쓰양의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멍 때리기 대회'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현대인의 바쁜 일상에 멈춤을 제공한다는 취지를 내건 1회 대회는 원래 2014년 6월에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해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며 모든 것이 바뀌었다. 라디오에서는 한동안 빠른 템포의 노래를 들을 수 없었고,  KBS TV <개그콘서트>는 5주 동안 결방됐다. 온 나라가 '초상집'이 된 분위기에서 '멍 때리기 대회'는 시작도 하기 전에 멈춰 섰다.
 
5월 12일 오후 서울 잠수교 남단 반포한강공원에서 열린 '2024 한강 멍때리기 대회'에서 행사 기획자 웁쓰양(오른쪽)이 수상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5월 12일 오후 서울 잠수교 남단 반포한강공원에서 열린 '2024 한강 멍때리기 대회'에서 행사 기획자 웁쓰양(오른쪽)이 수상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서울시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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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를 처음 구상한 웁쓰양의 머리도 복잡해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웁쓰양의 말이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그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분위기.  저희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그래도  이걸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게, 사실 이런 스트레스로부터 잠시라도 벗어나자는 취지로 시작한 대회잖아요?

무거운 분위기에 있을 때 그냥 피식 웃을 정도의 가벼운 농담이라도 던졌을 때 위로를 받는 경험들을 하게 되잖아요? 다들 힘들어하는 분위기에서 약간 엉뚱한 웃음을 줘야겠다 싶어서 밀어붙였죠."


2014년 10월 27일 서울광장에서 첫 대회가 열렸을 때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2년 뒤 가수 크러시(본명 신효셥)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대회 인지도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코로나19로 인해 3년 동안 대회가 중단됐다가 2022년에는 MBC 예능프로그램 PD 김명엽이, 2023년에는 배우 정성인이 각각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대회가 열리는 동안 무대 뒷쪽에 시민들이 참가자들에게 응원 스티커를 붙이는 코너가 있는데, 이 때문에 인지도가 높은 셀럽들에게 몰표가 쏠려서 이들에게 유리한 대회가 아니냐는 오해도 있다.

실제로 이날 대회에서는 135만 구독자 수를 자랑하는 교육컨텐츠 유튜버 '미미미누'(본명 김민우)와 역시 100만에 육박하는 유튜브 구독자를 둔 쇼트트랙 전 국가대표선수 곽윤기가 가장 많은 팬들을 몰고 다녔다.

그러나 우승은 독일 국적의 한인 프리랜서 아나운서 권소아의 차지였다. 사회자의 요청으로 유창한 독일어 실력을 뽐내기도 한 권씨는 "미래의 목표 중 하나가 인플루언서다. 이런 기회에 좀 더 많은 분들이 저를 알아봐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10주년을 맞은 멍 때리기 대회는 이미 일회성 이벤트를 넘어섰다. 일본 도쿄,대만 타이페이, 중국 베이징과 홍콩,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국제 대회가 열렸고 하반기에는 독일 대회가 준비중이다.

멍 때리기 대회의 미래상을 묻자 웁쓰양은 "뭔가 거대한 메시지를 담으려고 했다면 여기까지 대회가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최종 목표는 '세계 멍때리기의 날'을 만드는 거다. 그래서 한날한시에 전 지구인이 단 몇 분이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5월 12일 서울 잠수교 남단 반포한강공원에서 열린 '한강 멍때리기 대회' 무대 뒷쪽에 설치된 보드판에 참가자들의 사연이 빼곡이 적혀있다.
 5월 12일 서울 잠수교 남단 반포한강공원에서 열린 '한강 멍때리기 대회' 무대 뒷쪽에 설치된 보드판에 참가자들의 사연이 빼곡이 적혀있다.
ⓒ 손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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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한강멍때리기, #움쓰양,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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