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25 11:00최종 업데이트 23.09.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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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주판)의 마지막 세대이자 컴맹 제1세대, 부모에게 복종한 마지막 세대이자 아이에게 순종한 첫 세대, 부모를 부양했지만 부모로서 부양 못 받는 첫 세대, 뼈 빠지게 일하고 구조조정 된 세대인 베이비부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기자말]

갑작스런 퇴직, 갱년기가 찾아왔다. ⓒ 픽사베이

 
"당신, 갱년기야?"

아내가 한마디 툭 던지는데 잠에서 확 깨듯 소스라쳤다. TV 보면서 혼자 질질 짜는 내 모습을 본 모양이다. 그러면서 왜 갑자기 여자가 되어버렸냐고 핀잔까지 얹는다.


지난해 갱년기를 심하게 앓던 아내의 증상과 비교해 보니 얼추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암튼 우울한 건 맞았다. 남성도 갱년기를 겪는다는 사실을 언뜻 듣기는 했어도 내가 당사자가 될 줄은 몰랐다. 성기능 장애, 전립선 이상, 수면무호흡증, 배뇨증상, 적혈구 증가증 등 굳이 의학적 증상을 나열하지 않아도 딱 그 증상 같아 보인다. 

걱정하는 아내에게 괜히 투정 부리듯 "그냥, 아파. 전부다"라고 말했다. 사실 갱년기 병변이 갑자기 온 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징후가 보였다. 예후도 좋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퇴직과 궁핍한 벌이로 인한 환경적 요인도 한몫했다.

아무런 의욕이 안 생기고 눈물만 찔찔 났다. 아파트 17층 거실에서 아래쪽을 보다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또 한 번은 잘 달리는 차 안에서 갑자기 문을 열고 나가려 한 적도 있다. 순간적인 기억상실증 증세도 있었다.

딱 '죽지 않을 만큼' 아팠다. 편두통 섞인 감기는 단순히 가루약 몇 포 먹어서는 낫지 않았다. 마른기침이 나오고 목구멍에선 알지 못할 어둠이 걸렸다. 그 어둠은 폐부 깊은 곳까지 갉아먹었다. 지쳐 쓰러져 뒹굴다 보면 어느새 아침이었다. 그 햇살 옆에 아내가 잠들어 있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것을 왜 잊고 있었나. 평범하게 흘러가는 안온한 일상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을.

우울증 진단에 알약을 한 움큼씩 털어 넣었다

의사는 공황장애에 가까운 우울증이라고 진단했다. 2시간가량 상담하고는 약을 한 보따리 처방했다. 다음날부터 알약을 한 움큼씩 털어 넣었다. 하지만 증상은 1년여 지속됐다. 언제 다시 '맑음'을 되찾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스트레스가 가장 극심할 때 남자의 갱년기가 찾아왔다가 어느새 또 지나갔구나 추측할 뿐이다. 

그러다 최근 청주에서 오한진 을지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의 '중장년의 건강법' 강연을 들었다. '하루 만보 하루 천자'(하만하천) 운동본부를 출범시킨 그는 한국워킹협회장이기도 하다.

"부부 화목을 위해서도 일을 해야 합니다. 일본에서의 좋은 남편이란 '낮에 집에 없는 남편, 아내가 나갈 때 따라 나가지 않는 남편'이랍니다. 부부는 '뇌 밖의 뇌' 손·발을 잘 써야 합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을 만져보면 금세 얼마짜리 동전인지 알 수 있고, 신발에 모래가 들어가면 금방 알아채지 않습니까. 그만큼 손과 발에는 엄청나게 많은 감각세포가 존재합니다."

오 교수는 "남자란 자고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사회 통념과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경향 때문에 갱년기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갱년기를 거치면서 여성은 점점 남성화되고, 남성은 점점 여성화 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다간 바깥양반이 '안사람'이 될 수도 있다"면서 "중장년 시기엔 스트레스를 더욱 잘 다스리라"고 권고했다.

"퇴직 후 3대 불안은 돈, 건강, 외로움입니다. 마음은 뇌에 있습니다.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마음을 쓰다듬어 주세요. 우린 전전두엽을 갖고 있기에 동물의 뇌와 다릅니다.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해선 일을 갖는다거나 취미활동, 사회적 공헌활동(재능기부)을 하면 큰 도움이 되죠."

그에게 스트레스 개념을 설명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대부분 일, 사람, 환경, 돈 때문이죠. 그런 것들로 인해 사람은 상처받습니다. 상처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요. 기억에 기록됩니다. 약이나 수술로도 떼어지지 않아요. 그러다가 한계를 넘어서면 화·분노로 인해 몸을 망칩니다. 죽어도 살 안 찌는 사람과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체질이 아닙니다. 음식량도 아닙니다. 예민하기 때문이죠. 스트레스를 조절해야 합니다."

좋은 사람이 주는 행복... 다시 일 찾기에 나섰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과 일이 필요했다 ⓒ 픽사베이

 
오 교수는 행복하기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내 옆에 좋은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가 최고의 행복입니다.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일이나 봉사를 꾸준히 해야 합니다. 가치 있는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남을 즐겁게 하는 일에도 나서야 해요. 새로운 일이나 배움에 도전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집에 돌아와 문득 아내를 봤다. 내게 가장 좋은 사람인 아내는 결혼 전부터 나를 '때지'라고 불렀다. 돼지의 격음화 현상이 아니라 '때 묻은 지식인'의 약자다. 이 별칭은 30년 가까이 통용되고 있다. 시부모가 있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내를 30년째 '쁘니'라 부르고 있다. 예쁘다는 표현의 '쁜이'를 '쁘니'로 개조했다. 나이 60이 가까워지는데도 이 호칭이 낯간지럽거나 불편하지 않다. 그냥 청춘의 시간에 그대로 머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닮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닮도록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한쪽을 비워두면 오라 하지 않아도 빈자리에 사랑이 소리 없이 앉는다. 꽃은 수수할수록 향기가 짙다고 했다. 아내란 멀미 나는 향기다.

아내에게 메모 같은 편지를 써서 몰래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

"난 어쩌면 우산 같은 사람인지도 몰라. 우산이란 맑은 날에는 그냥 우산일 뿐이잖아. 존재감이 없지. 급할 때 찾으면 없는데, 평소엔 헌신짝 다루듯 하잖아. 어떨 땐 새것을 사기 위해 일부러 잃어버리도록 방치하기도 하지. 하지만 우산은 다음 비 오는 날까지 제자리에서 주인을 기다리지. 그제야 주인은 깨닫게 돼. 우산의 소중함은 결국 온몸이 비에 다 젖었을 때야 생긴단 말이지. 참 가엾어. 여보, 조금만 참아줘. 미안해요."
 

그리고 다시 다짐했다. 좋은 사람은 곁에 있으니 오 교수의 조언대로 '새로운 일'로 나를 다시 세워야 했다. 결국 베이비부머의 건강은 '일'과 연결됐다. 아무 일도 안 한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체면을 버리고 일을 찾아 나서야 한다.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일을 구하든 '쪽팔려'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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