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04 20:42최종 업데이트 23.08.04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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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헤밍웨이는 대표적인 행동파 작가다 ⓒ 펙셀스



헤밍웨이가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는 노인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쓴 건 실제로 낚시광이어서 그렇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낚시와 사냥을 즐겼고 권투와 투우도 배웠다. 그것도 모자라서 종군기자가 되어 전쟁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기도 했다.


유명 작가 중에는 헤밍웨이 같은 행동파가 많다. 그들은 원양어선을 타고 비행기를 몰고 정글을 탐험한 경험으로 걸작을 썼다. 무모한 짓을 실행하고 독자들에게 대리 체험의 쾌감을 선사한 그들은, 자극만 좇는 이 시대의 유튜버들 못지않은 강력한 관종력을 세상에 떨친 선구자들이다.

며칠 전에 지난 1년간 주짓수를 소재로 쓴 글을 새어보니 20편이 넘었다. 뿌듯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는데 사실은 뿌듯함은 잠깐이고 두려움은 떠날줄 몰랐다. 금방 곳간이 텅 비고 쌀독이 바닥난 것 같은 불안이 밀려왔다.

태생적으로 소심하고 배짱이 결여된 나는 일단 저지르고 보는 행동파가 될 수 없다. 그보다 신중을 핑계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으른 완벽주의자에 더 가깝다. 그러나 글을 쓰자니 달리 방도가 없었다. 배가 고프면 '나는 배고프다'고 써야 하는 게 글쟁이의 운명이다.

이제 좋든 싫든 간에 경험을 써내는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주짓수 대회를 선택했다. 한편으로는 단지 글을 쓰기를 위해서 얼마나 더 이상한 짓을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사람이 으레 그렇듯 결전이 다가올수록 부담이 커지고 마음은 외로웠다. 그럴 때는 이 지독한 외로움을 이해할 단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는 내가 맞붙을 적이었다. 내가 만든 가상의 적은 30대 초반의, 주짓수를 수련한 지 2년 6개월 남짓이고 조금은 호전적이면서 경쟁을 즐기는 여성이다. 나와 비슷한 키에 근육량이 많고 힘이 세다. 평소 논문 작업이나 육아로 인해서 스트레스가 많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목적으로 주짓수 대회를 선택했다. 내가 글쓰기로 인한 스트레스를 주짓수에 퍼붓듯이.

큰 곤경에 처했다

대회가 열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드디어 진짜 적이 실체를 드러냈다. 대진표가 공개된 거다. 즉시 유튜브 검색창에 적의 이름을 입력하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경기 영상을 뒤졌다. 상위 목록에 있던 영상 두 개를 보고 내가 큰 곤경에 처했음을 알아차렸다.

순진하게도 적도 나처럼 한가하게 가상의 적이나 떠올리고 취미로 도장에 들락거리는 초짜일 거라고 믿었다. 상상력의 한계인지 몰라도 그 굳건한 대전제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적은, 첫 출전인 나와 다르게 아주 노련한 메달 컬렉터였다. 유튜브가 어떤 상대를 만나도 가뿐하게 제압하는 적의 활약상을 보여줬다. 영상의 목록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마디로 그는 나를 반대로 만들어 놓은 사람 같았다. 내가 이미 훈련 과정에서 겁을 잔뜩 집어먹은 데 비해 그는 두려움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내가 경기 규정, 심지어 점수 체계도 잘 모르고 헤매던 동안 그는 불과 한 달 전에 있었던 경기에서도 우승 메달을 목에 걸었다.

심지어 나는 마흔두 살인데 그는 막 피어난 젊음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게 과시인 줄도 모르는 채로.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당하는 편이 나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모든 게 초연결 시대의 부작용인 것 같았다.

"주짓수 대회는 나이 구분도 없나요?" 불운한 소식을 절친에게 전했더니 고맙게도 대신 화를 내줬다. 나는 주짓수계를 대신해서 구분이 있으나 여성부 참가자가 너무 적어 체급만 맞으면 무조건 겨뤄야 한다고 설명했다.

잠자코 듣던 친구가 다시 말했다. "근데 이거… 이야기는 되겠는데요?" 친구는 언론사 기자이고 '이야기가 된다'는 건 그쪽 업계에서 흔히 쓰는 말로 '기삿거리가 된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그렇죠?" 나는 친구의 말을 듣자마자 지더라도 도망갈 구멍이 생겨서 기뻤다.

지금 돌아보면 영화에서 재앙이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마을 축제를 즐기는 장면 같은 순간이었다. 그때까지도 주짓수 대회에 관해 내가 모르는 사실이 또 있었다. 바로 패배할 기회마저 허탈하게 사라질 수 있다는 거다.

이미 원했던 걸 가졌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지난 2017년 재개봉 열풍을 타고 다시 스크린에 걸렸다. ⓒ 레이크쇼어 엔터테인먼트


열흘 넘게 나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장본인은 대회를 불과 나흘 앞두고 출전을 돌연 취소했다(그동안 유튜브 영상 때문에 너무 친숙해졌는지 출전을 취소한 이유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수정된 대진표에는 내 이름 석 자만 남았고 이제 할 일은 경기장에 가서 아래 체급인 선수들에게 번외 경기를 구걸하는 것뿐이었다.

안 하던 짓을 한 대가로는 너무 잔인한 것 아닌가? 곧장 불 꺼진 방에서 어릴 때부터 꾸준히 개발한 주특기인 '불행의 굴을 파고 기어들어 가기'를 시작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내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챔피언의 드라마를 흡수하고 싶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단순히 불행이라고 칭하기도 미안한 최악의 사건, 노력이나 열정과 무관한 인생의 붕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가르쳐준 영화였다.
'자신만이 볼 수 있는 꿈 때문에 모든 걸 거는 거야.' 주인공 매기의 삶을 변호하는 모건 프리먼의 내레이션이 두 배로 슬프게 들렸다.

또 이전까지 보이지 않던 맥락이 새롭게 보였는데, 부상을 입기 전에 매기는 보이지 않는 무엇에 사로잡혔다는 점이다. 그를 사로잡은 건 누추한 삶의 보상일 수 있고 우중충한 인생과 대비되는 빛나는 성취일 수도 있다.

나는 무엇에 사로잡혔던가. 가학적인 긴장과 두려움에 압도됐거나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면서 약간의 위안을 얻었을 수 있다. 재수 없는 드라마를 상상할 때마다 발휘되던 기발함에 취했는지도 모른다.

나를 사로잡은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그건 글을 쓰는 과정처럼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독의 진공 상태를 혼자서, 맨몸으로 통과하며 얻은 감각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번외 경기를 하겠다고 나선 선수가 있었고 그 덕에 매트에 설 수 있었다. 그토록 두려움에 떨었던 게 머쓱하게 상대는 작고 귀여웠다. 그리고 경기 시간인 6분 내내 그동안 단 한 번도 승리의 드라마를 써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죽기 전에 매기가 프랭키에게 말했듯 나는 이미 원했던 걸 가졌다.
덧붙이는 글 브런치에도 게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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