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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늘 정숙했다. 학생운동 1년 후배였던 아내는 대학 졸업 후 현장보다는 사회 봉사가 더 적성에 맞는 것 같다며 지체 장애아들의 보육교사로 3년여를 보냈다. 그런 아내와 결혼하고 첫아이를 낳은 때가 95년. 당시 나는 재야단체인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약칭 전국연합) 인권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전국연합 실무자들이 받은 급여는 30만 원. 그나마 처음 입사했을 때는 25만 원이었는데 이듬해 5만 원이 전격 인상된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참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되기도 한다. 물론 객관적으로 볼 때 활동비는 매우 적은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재야에서 활동하는 우리는 누구에게 고용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굳이 누가 월급을 줄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 활동비를 챙겨주기 위해 당시 의장단에 계신 어른들은 자비를 부담하거나 빚을 내기도 했으니 받는 우리는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 이러 저러한 강연이나 원고료 등을 보태 조금 더 가져다 주기는 했지만 그 적은 돈으로 살림을 꾸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아내가 다른 통상의 부인처럼 욕심을 부렸다면 내가 돈 안 되는 재야 활동을 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존경스러운 아내가 어느 날 결코 들어서서는 안 될 늪에 빠졌으니 이른바 낙찰계 계주와의 잘못된 만남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미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결코 잊혀지지 않을 악몽이요, 큰 교훈으로 남았다.

낙찰계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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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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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가을 어느 날, 그날도 다름없이 출근하는 길이었다. 평소 늘 지하철역까지 배웅해주던 아내가 아침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분주했다. 문득 귀에 걸리는 몇 단어가 심상찮았다. 혹시나 싶어 추궁하니 아뿔사. 아내가 '계'를 들었다는 것이다.

인권운동을 하면서 적지 않은 업무가 법률 상담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계와 관련한 민원이 상당했다. 태반이 곗돈 들고 계주가 도망갔다거나 또는 계원이 도망가서 집이 가압류 되었다는 식의 민원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아내에게 늘 '계'같은 것은 절대 안 된다고 말해왔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계'처럼 위험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계가 깨졌다며 계주가 뒤로 나자빠지면 사실상 방법이 없었다. 또 계가 깨질 기미가 보이면 당연히 누구보다 먼저 알게되는 계주가 미리 자신의 재산을 빼돌리고 돈이 없다고 하면 그만이다. 더구나 고의로 계를 깨는 경우도 있으니, 이로 인한 피해 정도는 언론에서 흔히 접하는 거액의 계주 도주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둘째는 적어도 재야활동가로서 부정적인 일에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는 체면 의식이었다. 적금이나 보험이면 모를까, '계'는 적어도 내 기준으로 볼 때 영 아니었다.

그런데 아내가 나도 모르게 그런 '계'를 무려 3년 전부터 해 왔다는 것이다. 물어보니 낙찰계라고 한다.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알아보니 내가 알고 있던 통상의 개념과는 조금 달랐다. 통상 '계'는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 일정한 돈을 내고 그 순번에 따라 목돈으로 받는 것이다.

반면 낙찰계는 일정한 돈을 낸 후 계원들이 경매하듯이 자기가 받고자 하는 액수를 적어 내고 그 중 제일 적게 받을 금액을 쓴 이에게 그달의 곗돈을 준다는 것이다. 돈이 급한 이가 원금보다 적더라도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받으려 하기 때문인데, 오히려 이 때문에 낙찰계를 선호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남은 액수는 이월되어 다음 달로 넘어가니 당연히 가장 나중에 받을 사람은 그 액수가 커지게 된다. 즉, 급한 사람은 당장 돈을 쓸 수 있으니 좋고 반면 늦게 받는 사람은 그 대가로 상당한 돈을 이자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계 타기 며칠 전, '잘못된 만남'은 시작됐다

나는 매우 크게 화를 냈다. 안절부절하는 아내가 변명하기를 자기도 절대 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 전부터 계를 하던 사람들이 계주가 확실한 사람이라며 적은 돈으로 나중에 큰 목돈을 받으려면 계만한 것이 없다고 하도 설득하여 결국 넘어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 만 3년이 지나 두 번만 더 내면 만기가 된다는 말과 함께 어렵지만 그렇게 목돈을 만들어 나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솔직히 그때, 두 가지 마음이 순식간에 교차했다. 하나는 '3년이나 나를 속였다'는 분한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 '그렇다면 이제 곧 거금이 들어오게 되었구나'하는 속물적 생각이었다. 명석한 아내도 나의 두 번째 마음을 읽었는지 결정적인 말을 한마디 더 거들었다.

"이제 두 달 후면 1000만 원을 받게 되거든. 원금이 480만 원인데 그 두 배 정도가 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거 받으면 당신 비상금으로 내가 크게 한번 주고 싶어서 아끼고 아껴 만든거니까, 그만 화 풀어. 대신 앞으론 절대 '계'같은 것은 하지 않을게."

그렇게 말하는 아내를 보니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리고 '견물생심'이라고 막상 큰 돈이 생긴다고 하니 아내가 예뻐 보이기까지 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짐짓 아내에게는 또 다시 나를 속인다면 용서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놓은 후 출근을 했다. 그렇게 두달 후. 마침내 아내가 기다렸던 날이 왔다.

아내는 그 며칠 전부터 대놓고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다. 일단 곗돈을 받으면 나에게 100만 원을 주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쪼들려 맘 놓고 대접하지 못한 동료들에게 막걸리라도 거하게 한잔 사고 나머지는 비상금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요긴하게 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시댁 식구와 친정 식구들에게 한턱 쏘고 등등등. 그렇게 한껏 부풀어오른 아내의 기대가 한방에 빵 터진 사건은 그날 오후에 들려왔다. 아내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입금 계좌를 알려주기 위해 계주에게 전화를 하니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계원들이 돈을 안내 계가 깨졌다"고 했다는 것이다. 순간 그 '천박한' 계 사기사건이 내 사건이 되는 느낌이 확 들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나는 계주에게 직접 전화를 했다.

30년 경력 낙찰계주는 역시 달랐다!

잃어버린 곗돈을 찾아나선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걸스카우트>
 잃어버린 곗돈을 찾아나선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걸스카우트>
ⓒ 보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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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주는 전혀 미안한 기색도, 당황스러워 하지도 않는 듯했다. 오히려 계가 깨져 나도 망했다며 자기 하소연을 장황하게 말한 뒤, 일단 자기가 원금이라도 챙겨 볼 테니 기다려 보라는 것이었다. 물론 확실한 약속은 할 수 없다고 했다. "돈이 사기 치지 사람이 사기 치겠냐?"는 고상한 말도 했던 것 같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좋다. 내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튀어나오려는 육두문자를 억누르며 계주에게 조근 조근 말했다.

"잘 들으세요. 저에게 이제 곗돈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돈을 포기하면 저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져다 준 얼마 안 되는 돈을 쪼개고 쪼개 아내는 3년 동안 저 몰래 계를 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당신이 그런 내 아내의 희망을 깨버렸습니다. 처음부터 이런 계를 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결과적으로 아내가 가진 그 소박한 희망을 당신이 깨 버린 것에 대해 전 참을 수 없습니다. 원금은 필요 없습니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당신이 내 아내에게 진정으로 사과하고 애초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이제 저와 당신은 전쟁을 해야할 것입니다. 저와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나는 나름 비장한 목소리로 계주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반응은 웃겼다. 계주의 요란한 웃음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역시 30년 경력의 계주답다고 할까.

"호호호. 아저씨. 왜 그러세요? 그러지 마시고 제가 나중에 원금이라도 챙겨 드릴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봐요. 너무 화내지 마시고… 호호호…."

당해보면 이때 기분 참 거시기하다. 끝내 화가 폭발해서 소리쳤다.

"두고 보세요. 당신이 진심으로 사과하게 되나 안 하게 되나. 민·형사 소송을 포함해서 반드시 당신에게 잘못했다는 사과를 받아낼 테니."
"호호호. 지금까지 그런 말 하는 사람 많이 봤지만 뭐 별 수 없던데요. 그러니까 괜히 그러지 마시고 일단 기다려 보세요."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노회한 낙찰계 계주는 나의 독설을 조롱과 비아냥으로 간단하게 격퇴시켰다. 너무 화가 나면 현기증이 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참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했다.

"그렇죠? 지금까지 이런 말 하는 사람 많이 보셨죠? 그런데 이것 한 가지만 기억해 주세요. 저는 좀 다릅니다. 한번 보세요."
"아저씨. 다르긴 뭐가 달라요? 다들 그러다가 나중에는 원금만이라도 하면서 부탁하던데 뭘… 호호호."
"그래요. 그럼 한번 보시죠. 어떻게 다른가 보여 드릴 테니."

명품 가방 대신 검은 비닐 봉지 든 그녀

그렇게 시작된 6개월간의 싸움은 참으로 힘들고 괴로웠다. 물론 교훈도 크게 남았다. 그동안 내가 입으로 해온 민원 상담이 얼마나 맹랑한 것인가에 대한 반성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민원인에게 2천만 원 이하의 사건인 경우 관할 법원에 '소액 심판청구소송'을 제기하면 간단하게 해결된다고 안내해 주곤 했다.

나 역시 받아야할 돈이 그만큼이니 관할 법원에 소송을 냈다. 그런데 이게 장난이 아니었다.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계주는 자신의 집으로 송달되는 소송 서류를 고의적으로 받지 않았다. 집달관의 말에 의하면 집에 있으면서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계주가 더 선수였던 것이다. 송달이 되지 않으면 재판을 할 수 없다는 맹점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또다시 법원으로부터 피고소인의 주소를 고쳐서 다시 내라는 '주소보정 명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법원 집달관 비용도 추가로 내라는 연락도 왔다. 그렇게 수차례 법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나는 그동안 너무 쉽게 말로만 민원인을 대한 그 오만이 부끄러웠다.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하간 그렇게 시작된 계주와의 싸움에서 최대 코미디는, 경찰서에서의 첫 조우였다. 전화상으로 옥신각신 다투기만 했지 실제 그녀를 본 적이 없었던 내가 마침내 대질조사에서 그를 만나게 된 것이다. 30년 경력의 계주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솔직히 궁금했다. 먼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했던가. 그녀에 대해 수소문해 봤다.

간단한 이력은 이랬다. 나이는 50대 초반. 30년 전인 처녀 때부터 계를 시작해 수십 개의 크고 작은 계를 서울 모 지역에서 운영한 '독한' 여자로 알려져 있었다. 늘 원색 계통의 화려한 치장을 좋아했고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명품 선글라스를 낀 채 자전거를 타고 곗돈 수금을 하러 다닌다고 했다. 명성도 화려했다. 유명한 일화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곗돈 떼먹고 도둑 이사한 계원 찾아내는데 귀신이고, 그 집 안방을 차지한 후 몇날이고 밥해 먹어가면서 가리지 않고 악다구니를 써서 모두 받아 냈다는 이야기부터 과일가게 하던 계원이 돈을 떼먹자 자신이 직접 그 집 과일을 팔아 두배로 돈을 챙겼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떠돌았다.

그런 계주와 첫 만남을 앞두니 가벼운 설렘조차 들었다. 과연 그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화려한 외양에 도도하고 앙칼진 그녀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 역시 잔뜩 독기를 모으고 있던 찰라였다. 그런데, 그녀를 본 순간 정말 '픽'하고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프로다움에 분노보다 경이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본 그녀는 화려한 원색의 옷에 명품 선글라스를 끼고 전화상에서 나의 분노에 '호호호' 여유있게 웃음을 날리던 30년 경력의 계주가 아닌, 후줄근한 몸빼 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은 아줌마였다. 그중 가장 압권은 명품 가방 대신 들고온 검은 비닐봉지였다. 나중에 보니 그 안에는 도장과 신분증 등이 담겨 있었다. 실소가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 그녀는 조사 내내 한숨과 눈물로 일관했다. 계가 깨져 돈을 못주는 계주의 아픔을 절절하게 호소했고 이 불행한 사건을 고소까지 하는 내가 정말 야속한 사람이라며 울었다. 더불어 몸이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이곳까지 오느라 너무나 힘들었다고 했다. 그녀의 연기에 경찰조차 동정하는 눈빛이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기가막힌 발군의 연기력이었다. 그저 쓴 웃음만 일었다.

나의 승리로 마침내 끝난 '잘못된 만남'

하지만 그녀는 결국 나에게 졌다. 끝까지 저항했지만 변할 수 없는 사실은 그녀의 주장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말과 달리 계는 깨진 적이 없었다. 결국 빈털터리라 갚을 수 없다던 그녀 명의의 40평대 아파트와 은행 계좌 4개를, 그녀 표현대로 본다면 '귀신같이' 찾아내 가압류했고, 결국 그녀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갖은 방법으로 소송을 지연시키고 직접 항소장을 써가며 저항했던 그녀. 똑같은 피해자인 계원까지 동원하여 나에게 가압류와 소송을 취하하라고 압박하던 그녀. 계주는 내가 건 소송 때문에 돈을 못 주는 것이라고 그들을 충동질했고, 이 말에 흥분한 계원들은 나를 찾아와 욕설까지 해가며 소송을 취하하라고 행패를 부렸다. 나는 그들에게 더 이상 속지 말고 하루빨리 그녀의 아파트에 가압류를 하라고 충고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여하간 그렇게 민·형사 소송의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던 어느 날, 마침내 계주는 나에게 전화하여 항복을 선언했다. 애초 받기로 한 돈에 소송비용까지 전부 받기로 한 날, 나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계주를 만났다.

그때 계주에게 꼭 확인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바로 이 전쟁을 시작하면서 내가 했던 그 말이었다.

"제가 반년 전에 한 말 기억하시나요? 저는 좀 다르다고 한 말, 어떠세요? 정말 다른 것 같지 않나요?"

이전까지 변화 무쌍한 전술을 쓰며 사람을 농락하던 계주 역시 인정했다.

"네. 정말 다르긴 다르시네요. 여하간 많이 죄송합니다."

여전히 계주로 활동하는 그녀, 씁쓸하다

마지막 순서가 남아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건 뒤 계주에게 수화기를 넘겨주었다. 아내에게 계주가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않으면 형사 고소를 취하할 수 없다고 하니 결국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낙찰계 계주와의 악연은 나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그 후에 들은 계주의 뒷 이야기는 매우 씁쓸했다. 그녀의 말을 믿고 아파트를 가압류하지 않은 다른 이들은 예상처럼 한푼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더 우스운 것은 그가 여전히 그곳에서 계주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고도 또다시 계 조직을 구성할 수 있다니 가히 그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화려한 원색옷에 빨간 립스틱, 그리고 명품 선글라스를 낀 채 자전거를 타고 말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잘못된 만남은 내가 아니라 그녀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동안 그녀가 만났다던 그 숱한 '그렇고 그런 사람'이 아니라 나같은 이를 만나 완패함으로써 그 화려한 계주 이력에 오점을 남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30년 낙찰 계주와의 기억은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잘못된 만남인 것은 분명했다.

'계', 절대 하지 맙시다.

덧붙이는 글 | '잘못된 만남' 응모작



태그:#잘못된 만남, #고상만, #낙찰계, #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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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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