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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중순부터 16일간 농장 주인이 만드는 비닐 하우스 짓는데서 일을 배웠습니다. 3천여평 규모에 무거운 쇠파이프를 하나하나 이어서 철 구조물을 세워 나갔습니다. 작업 중에 위에서 떨어진 쇠파이프가 머리로 떨어져 4바늘 꿰매는 상처를 입기도 했습니다. 다 세우고 나니 제게 시킬 일 없다면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가족이 있는 울산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 비닐 하우스 철 구조물 6월 중순부터 16일간 농장 주인이 만드는 비닐 하우스 짓는데서 일을 배웠습니다. 3천여평 규모에 무거운 쇠파이프를 하나하나 이어서 철 구조물을 세워 나갔습니다. 작업 중에 위에서 떨어진 쇠파이프가 머리로 떨어져 4바늘 꿰매는 상처를 입기도 했습니다. 다 세우고 나니 제게 시킬 일 없다면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가족이 있는 울산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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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넘게 살아보니 말입니다.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 삶의 요소인가를 확실히 알겠더구만요. 좋은 만남은 내 삶에 팍팍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잘못된 만남 때문에 인생길이 피곤하고 힘들고 어렵게 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중 저는 오늘 잘못된 만남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끝이 안 좋으면 잘못된 만남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지난 3월 15일자로 저는 다니던 직장을 잃게 됐습니다. 구조조정에 의해 정리해고가 된 것이지요. 정규직이 아니라 비정규직으로 다녔거든요. 대기업인데 한 공장을 뜯어내고 오래되고 낡은 기계를 새 기계로 바꾸는 공사를 한다고 하더군요. 정규직은 1년간 유급 휴직에 들어 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비정규직은 모두 정리해고 되고 말았습니다. 나이 40대 후반에 잘 다니던 직장을 잃으니 얼마나 깝깝하던지요.

울산이라는 도시가 숨이 콱콱 막히는 게, 갑자기 울산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당시 제가 가입해 활동하던 효소관련 카페가 있었는데 거기에 제주도 분이 계시더라구요. '제주도 가서 한번 살아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갑자기 스치면서 제주도 회원에게 쪽지를 보내 사전 정보를 구했습니다. 직접 찾아가 하루 체험을 해보기도 하구요. 제주도 시골로 귀농해서 귤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도 괜찮다 싶었습니다. 제주도 분도 환영한다면서 한번 와보라고 하더군요.

인상 좋고 부지런했던 첫 인연...'술' 때문에 헤어지다

4월 2일 짐보따리를 하나 들고 제주도 효소 회원을 찾아갔습니다. 참 부지런하고 마음 씀씀이가 좋은 것 같아서 무작정 찾아 간 것입니다. 그분은 제주도 토박이었고 저보다 서너살 아래였습니다. 그분은 허름한 빈 집을 구해 그냥 지내게 해주었고 저는 그분과 같이 다니며 귀농살이 일을 배워 나갔습니다. 농사일은 처음 접하는 것이라 몸은 힘들었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여러가지 농사 일에 대해 배울 게 많았습니다. 그분은 귀농교육을 받으라며 알선도 해주었고 교육 시간엔 바쁜 일정을 뒤로하고 먼 교육장까지 트럭으로 태워다 주었습니다.

첫인상 좋고 부지런함에 배울 점이 많고 했는데 한 달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살아 오면서 힘든 여정이 많았는지 그분은 술을 무지하게 자주 마셨습니다. 점심을 먹으면서 술을 마셨고 저녁 때에도 그냥 집에 들어가는 날이 드물었습니다. 처음엔 심성이 착해서 저의 제주귀농을 걱정해서 그런가 싶었습니다만 차츰 술이 좋아서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랑은 취향이 너무도 달랐습니다. 저는 술, 담배를 멀리 해야 할 목록 1호로 칠만큼 싫어 합니다. 저의 귀농을 도와 주고 있는데 싫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그분이 만든 술자리를 거절 못하고 함께 했습니다. 제가 저녁을 굶을까봐 걱정이 되어 저녁 먹는 자리를 마련한다고는 하지만 점차 그런 자리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은 2차를 가서 새벽 1시가 넘게 술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술이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참다 못해 그냥 혼자 집까지 걸어 오기도 했습니다. 시골 길은 어두웠습니다. 마을에서 외딴 곳에 있는 집까지 걸어 가는데 2시간이 걸렸습니다. 혼자 터덜거리며 새벽 밤 길을 걸어 가니 가족의 생계 걱정과 무능력함 때문인지 눈물이 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귀농해서 살려고 당신에게 농사 배우러 울산서 온 것이지 술상무 해주려고 온 게 아닙니다. 앞으로는 이런 술자리에 저를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녁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하는 술자리가 싫었습니다. 또 술 마시자고 하는 것을 한마디 그렇게 탁 쏘아 붙이고 저혼자 그냥 집으로 와버렸습니다. 그분은 제주도 시골서 농사 짓고 살려면 술을 어느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지만 저는 술취한 사람과는 대화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음씨도 착하고 일도 잘해서 배울게 있었지만 밤마다 술취하는 그는 별로 였습니다. 그 후 저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참다 못해 저는 그분과 결별을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너 북에서 왔냐? 한국말 못 알아 들어?"...나를 머슴 부리듯 한 두 번째 인연

"참다래 농장 하시는 분이 인턴 한 사람 필요로 하는데 일해 보실래요?"

귀농교육을 받는 반장님에게 일 배울 곳 좀 알아봐 달라고 했습니다. 숙식이 제공 되는 곳으로요. 참다래 농장이 있는데 가보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괜찮은 듯 싶어서 가보기로 했습니다. 처음에 소개 받은 분은 방송국에서 근무했다는 분이었는데 그분은 아직 그런 형편이 못 된다면서 다른 친구분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그 친구 되시는 분은 건설일을 수십년간 한 전문가였습니다. 일본까지 다녀 왔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부탁해 트럭으로 짐을 실어 날랐습니다. 트럭은 1시간 넘게 달리더니 산 속으로 들어 갔습니다. 그곳에는 큰 컨테이너가 2개 있었습니다. 한 곳은 여러가지 도구나 장비를 둔 창고로 쓰고 있었고 한 곳은 숙식 장소로 쓰고 있었습니다.

컨테이너 안에 욕실 겸 화장실도 있었고 부엌도 있었고 작은 침대가 놓인 방도 있었습니다. 대형 냉장고 안에는 이것저것 식품들이 있었습니다. 밖엔 개 2마리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여기다 뭐 하시려구요?"하고 물었더니 비닐 하우스를 만들어 참다래 농사를 해보려 한다고 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알아보니 55살이라고 했습니다. 첫 인상이 깐깐해 보였지만 오히려 깐깐하면 농사 일을 잘 배울 수 있겠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도착한 그날부터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3천여 평 밭에는 무거운 쇠파이프가 널려 있었습니다. 저는 일을 배운다 생각하고 그분을 열심히 돕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소개해 준 분에게 고맙기도 해서 그분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친구가 하두 부탁해서 받아는 주는데 사실은 귀찮아. 필요할 때 용역 갔다 쓰면 되거든."

농장 주인은 일 시키면서 대뜸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속으론 거북스러웠으나 받아주셔 고맙다고 인사를 정중히 했습니다. 가자마자 그분 작업을 도왔습니다. 무거운 쇠파이프로 만드는 하우스 작업은 힘들었습니다. 일 욕심이 많은 그분은 쉴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6월 중순, 날이 무더운 가운데 무거운 쇠파이프 들고 날르다 힘이 들어 잠시 서 있는데 등 뒤에서 농장 주인이 말했습니다.

"일본에선 그렇게 일 안해. 그렇게 일하다간 다음부턴 당신 안 써. 10시, 15시 딱 10분 쉬고 끝이야. 절대 쉬엄쉬엄 하지 않아."

처음 일해보는 것이라 일의 방향도 몰랐고 사용 도구 이름도 몰랐습니다. 농장 주인장은 성질이 급한 것 같았습니다. 그분이 무슨 도구를 가져다 달라는데도 말을 알아 듣지 못하자 빨리 가져 오라며 크게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몇 번 다른 것을 집어 든 후에야 필요한 도구를 찾아 갔다 주니 그분이 말했습니다.

"너 한국말 못 알아 들어? 너 북한에서 왔냐? 너 간첩이지."

농장주가 그런 말을 여러 차례 했지만 받아 주신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에 속으로야 기분이 별로였지만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 했습니다. 속으로는 무시받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척이나 불편한 날이 이어졌습니다.

마을로 내려 가려면 20분은 걸어 나가야 하는 외진 곳이었습니다. 밤마다 혼자 어둔 산속서 눈물 밥을 삼키면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참고 견뎌야 했습니다. 울산에 있는 가족이 떠 올랐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이 내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오전 7시면 출근해서 일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5시 30분이면 보통 일을 마치는데 때론 오후 6~7시가 넘게까지 일했습니다. 일 마치고 저녁 먹기 바쁘게 힘들어 쓰러져 잠들었습니다. 그렇게 16일을 버텼습니다.

머리가 깨져도 땡뼡 아래서 일을 도왔건만 돌아온 건 의심의 눈초리뿐

"내일부터 너 할 일 없으니 오늘 저녁 나가."

제가 일하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분은 7월 3일 토요일이 되기 며칠 전부터 토요일까지만 일하고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라 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까지만 일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목요일(7월 1일) 오전 일하는 도중 갑작스러운 통보가 날아들었습니다. 황당했습니다. 당장 갈 곳도 없는데 나가라고 하니 말입니다. 일단 알겠다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 전주서 귀농온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고맙게도 동료는 차를 몰고 와주었습니다. 짐보따리 싣고서 그 곳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농장 주인도 작업을 마무리 하고 저에게 빨리 가라면서 말했습니다.

"저번에 너 집에 짐 보낼 때 왜 나에게 미리 보낸다 말 안 했어?"

무슨 말인가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농장 주인은 일요일엔 농장에 오지 않습니다. 저는 평일에 시간이 나지 않아서 일요일 택배를 어렵사리 불러 미리 짐을 싸 보냈었습니다. 그 일을 두고 하는 말 같았습니다. 제 짐 보따리 보내는데 왜 농장 주인에게 허락을 먼저 득해야 하는지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창고 안에 여러가지 비싼 자재와 농기구가 많은데 그렇게 하면 쓰겠어?"

그제서야 농장 주인이 저를 의심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짐 싣는다고 좀 시간이 흐르자 그분은 차를 몰고 저만치 가다말고 서서 우리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차를 몰고 길을 내려가자 그분은 차를 몰고 올라 갔습니다.

거기에 농장 짓는데 필요한 물건이 많을지 몰라도 울산 가는 저에겐 아무것도 필요치 않는 물건들 입니다. 설사 필요한 물건이 있다 치더라도 저는 남의 물건을 훔쳐나 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은 저를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로 보더군요. 저는 첫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그분을 정성껏 도우려고 힘들어도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건 "수고했다"는 따뜻한 인간미 있는 마지막 악수가 아니라 도둑이 아닐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 였습니다.

저는 오갈데가 없어 목요일 저녁에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금요일(7월 2일) 오전 비행기를 타고 다시 울산 집으로 왔습니다. 제가 그분 농장 짓는데 반달을, 힘들어도 내색 않고 도운 것이 도둑으로 의심 받을 짓만 했나 싶은 게, 참 씁쓸한 뒷맛만 남기고 제주도를 떠나오게 되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어느날은 작업을 하다 머리위로 쇠파이프가 떨어져 머리가 깨졌습니다. 4바늘 꿰맸지요. 농장 주인은 첫날 병원에 데려가더니 치료비와 약값을 내 주었습니다. 두 번째 갔을 때에는 나보고 돈을 내라더군요. 세 번째 치료 받으러 가야 할 때에는 일이 바빠 주인은 가지 못했고 마지막날 실을 뽑으러 갔을 때에도 내 돈으로 치료비 냈습니다. 일하다 다쳤으면 당연히 농장주인이 치료비와 약값을 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제주 분들이 육지 사람들 못미더워 한다는 말을 제주도 가서야 수도 없이 많이 들었지만 이리도 심한지 잘 몰랐습니다. 처음엔 참 인간적이라 여겼는데 아직 제가 덜 여물어 그런지 갈수록 실망감만 더해 갔습니다. 저는 그분을 믿고 처음부터 참 잘하려고 노력했는데 그분은 처음부터 '도둑'이라는 의심을 가지고 저를 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떠나 오는 날 낮에는 일하면서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날은 바람이 없어 몹시 더운 날이었습니다. 오후 4시경 농장 주인은 참으로 빵과 우유를 사왔습니다. 주인과 일하는 사람 두 명해서 모두 세 명이 있었습니다. 나무 그늘서 쉬면서 간식을 먹었습니다. 빵 한 봉지 안에는 작은 빵이 6개 들었습니다. 각자 빵 2개와 우유 하나가 자기 몫이었습니다. 주인과 저는 우유와 빵 2개를 먹었습니다. 한 분은 우유만 먹고  빵 2개는 남겼습니다.

"아나 니나 먹어라."

농장주는 개에게 빵 하나를 던져 주었습니다. 개가 하나를 받아 먹고 나자 주인은 또 하나를 던져 주려 했습니다. 개가 외면하고 가버리자 말했습니다. 

"저 녀석이 배부른 갑네. 창기야 이것도 먹어라."

저는 그 빵을 받아 먹었지만 속으론 개보다 못한 인간인가 싶어 참 씁쓸했습니다. 그분은 자기 농장일을 돕는 사람보다 개를 더 좋아 했습니다. 사람에게 먼저 먹어라 하고 나머지 있으면 개를 줄 일이지 개 먼저 먹이고 남은걸 사람에게 먹어라 던져 주는 건 또 무슨 이유 일까요? 저는 제주 귀농 희망을 품고 갔다가 희망도 잃고 실망만 안은 채 다시 울산으로 돌아 왔습니다.

저처럼 돈없이 그리고 가족과 따로 독단으로 먼저 귀농한답시고 가시면 힘듭니다. 귀농하려면 가족과 함께 가야하고 돈도 어느 정도는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처럼 인간차별 받다가 귀농 포기하지 않으시려면요. 제주도 3개월 귀농 체험하면서 느낀 점은 잘못된 만남을 만들지 않으려면 여러가지 작업 능력을 보유하고 있거나 아니면 돈이 많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두가지만 가지고 있으면 어딜 가든지 잘못된 만남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눈썰미 없고, 약삭 빠르지 못하고, 가진 것도 없으면 잘못된 만남에 얽힐 확률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이번일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농장 주인에게 부탁하니 당분간 컨테이너에서 지내라고 했습니다. 산속에 홀로 숙식하며 농장 일을 배워 나갔습니다. 컨테이너 바로 옆에 비닐하우스 철구조물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 산 속 컨테이너에서 16일 지냈습니다. 농장 주인에게 부탁하니 당분간 컨테이너에서 지내라고 했습니다. 산속에 홀로 숙식하며 농장 일을 배워 나갔습니다. 컨테이너 바로 옆에 비닐하우스 철구조물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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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잘못된 만남' 응모글



태그:#제주도, #귀농,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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