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내 절친들'에게 밥을 산 이유

아내친구 모임에 처음 참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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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진(rhjeen0112)등록 2023.06.16 13:45
종심(從心)에 이르러도 친구들에게 때때로 어깃장 놓고 부끄럽게 나 스스로 얼굴이 발개진다. 가령 모처럼 약속하고서도 음식맛이 별로라느니 장소가 좀 멀다느니 괜히 불평을 자주 한다. 가기 싫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하는데 나는 요즘 친구 간에 청개구리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요즘엔 웬만한 일이 아니면 친구 모임에조차 얼굴 내밀기가 귀찮다. 나이 탓인가 만남이 점점 부담스럽다. 내심 바깥세상과 소통하는데 자신 있다 했는데 나도 모르는 미묘한 변화에 심란하다. 이것이 '고독증후군'이 아닌가 진단하기도 한다. 
 

한국의집 한정식 식당 이미지 ⓒ 이혁진

 
아내 절친들에게 밥을 대접하다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나와 달리 아내는 여전히 친구들과 만남을 오래도록 유지하고 있다. 아이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 모임을 최근 정리했다고 들었지만 초등학교와 대학동창 정기모임 두 개는 수십 년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대학 시절 만난 4인방 중 대전에 사는 친구는 먼 길 마다하고 매달 오전 서울에 와 친구들과 어울리다 내려간다. 이러한 만남을 매달 한 번도 빠짐없이 했다니 나로선 신기할 따름이다. 

듣자 하니 아내 절친들은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을 구경하고 거기서 점심을 해결하는 단순한 모임이다. 그런데도 아내는 그 모임에 다녀오면 어딘가 표정이 밝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이 모임에 스트레스를 푸는 뭔가 특별한 비결이 있는지 늘 궁금했다.

지난 4월 아내에게 45년 자기 친구들에게 점심 한번 사겠다고 갑자기 제안했다. 아내가 대학동창 모임을 다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직후였다. 왠지 아내 친구들에게 점심이나마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아내 친구 남편들은 한 번씩 본 것 같은데 오래돼 얼굴은 어렴풋하다. 기실은 10여 년 전 아내에게 부부동반 모임을 한번 주선해 보길 권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한편 이번 친구들 점심은 '특별하게' 대접하고 싶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처음엔 내 제안이 뜨악하다는 반응이었지만 아내는 내가 친구들에게 처음 인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국의집 한정식 식당 이미지 ⓒ 이혁진

 
우리는 고심 끝에 점심을 서울 충무로에 있는 '한국의집' 한정식으로 정했다. 사실 이곳은 우리 부부가 85년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그때 아내 친구들도 한번 다녀간 곳이다. 우리가 결혼한 장소에서 친구들을 다시 대접한다면 그것도 괜찮은 아이디어 같았다. 

그러나 친구들에게 만날 때까지는 내가 대접한다고 발설하지 않기로 아내와 약속했다. 예전에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엊그제 아내 대학동창들에게 '서프라이징 오찬'을 대접했다. 나는 부인들에게 오랜만에 정중히 인사드리고 식사를 함께 했다. 

아내 절친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사실 내가 더 흥분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친구모임에도 발길을 멀리하는 내가 아내 친구들에게 식사까지 하자는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정말 이상하다. 아내를 포함해 친구들이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무서운 할머니들이 아닌가. 

아내 절친들의 의리에 감동하다

그러나 아내 친구들은 어린아이 안심시키듯 다정하게 분위기를 이끌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매달 친구모임이 설레고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단순하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우정의 표현인가. 나는 그런 감정을 언제 가졌는지 기억이 아득했다. 

오찬에서 나는 주로 듣는 편이었다. 내가 합석해서 그런지 절친들은 남편들 근황도 자연스레 꺼냈다. 이들은 "나이 들어 남편들과의 소통이 중요하다"면서도 "불통인 남편 때문에 속을 많이 썩인다"라고 털어놨다. 남편에 대한 애로사항은 나도 해당돼 잠시 뜨끔했다. 
 

한국의집 한정식 식당 이미지 ⓒ 이혁진

 
이날 아내 친구들의 반가운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나로선 아내 친구들의 진한 의리를 새삼 확인하고 감동하는 자리였다. 무엇보다 친구들이 아내를 배려하고 보듬어주는 것이 아름답고 감사했다. 아내가 이 모임을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것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먼저 자리를 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벼운 발걸음이다. 귀가한 아내도 흐뭇해하는 눈치다. 남편이 자기 친구들에게 베풀 줄 알다니 새삼 고맙다는 것이다. 아내가 이렇게 행복한 줄 알았다면 진작에 빨리 자리를 마련할 걸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모임을 한날 저녁 아내는 전화로도 친구들과 후일담으로 바쁜 것 같았다. 감동이 감동을 낳는다고 했던가. 어찌보면 매우 어색한 자리가 될 수도 있는데 아내 절친들 점심 접대는 매우 성공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참에 내 '버킷리스트' 하나를 해결했다. 아내 친구들에게 감사할 기회를 가진 것이 내 딴에는 중요했다. 친구들 덕분에 아내가 즐겁고 나도 행복한 만큼 소중한 것은 없을 것이다. 아내 친구들에게도 밥 한 끼야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 의미는 오래 기억될 듯싶다. 

아내 절친들 틈에서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고 마음을 헤아리는 우정과 의리가 참으로 보기 좋았다. 내가 아내 친구들에게 밥을 꼭 대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이런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아내 친구모임이 건강하며 행복하게 오래도록 지속하길 응원하고 싶다. 

이혁진 
덧붙이는 글 <브런치스토리>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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