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절로 수 절로 산수간에 절도 절로

[속리산에서 탄금대까지 달래강 인문학 기행 ③] 법주사 이야기

검토 완료

이상기(skrie)등록 2018.07.06 10:30
조사전에서나 찾을 수 있는 의신조사와 진표율사의 모습

의신과 진표 ⓒ 이상기


속리산 물은 법주사로 흘러 내려가지만, 법주사를 찾는 사람들은 속리산을 향해 흘러 들어온다. 이곳 속리산이 좋아 찾아든 첫 번째 스님이 의신(義信)조사다. 불법을 구하기 위해 인도에 유학한 의신조사가 신라 진흥왕 14년(553) 흰 노새에 불경을 싣고 속리산으로 들어온다. 현재 법주사 터에 이르자 노새가 걸음을 멈추고 울부짖었다. 조사는 사방을 둘러보고는 이곳이 절터로 명당이라 생각하고 절을 짓기 시작한다. 그 후 절에 불법이 머물게 되어 법주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전설 수준이다. 불교를 숭상하던 통일신라 성덕왕 19년(720) 법주사는 국가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중창을 한다. 이때 만들어진 석조 문화유산이 지금도 남아 있다.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석연지(국보 제64호), 사천왕석등, 희견보살상 등이 대표적이다. 법주사가 미륵도량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혜공왕 12년(776) 진표(眞表)율사에 의해서다.

쌍사자석등 ⓒ 이상기


두 번째 스님 진표는 김제 미륵도량인 금산사 출신으로, 776년 꿈에 미륵보살로부터 '속리산으로 가 미륵불을 세우라'는 계시를 받는다. 그는 제자 영심(永深)으로 하여금 미륵불을 조성케 하고 법주사를 미륵도량으로 만든다. 그 후 미륵불은 법주사의 상징이 된다. 법주사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은 고려 후기다. 그 전에는 길상사(吉祥寺), 속리사(俗離寺)로 불렸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사』『동문선』을 통해 확인된다.

고려말 자정국존비에는 어떤 내용이

고려말 자정국존비 ⓒ 이상기


법주사라는 이름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고려말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에 의해서다. 이 비석은 자정국존 미수(彌授: 1240-1327)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하고 있다. 1342년에 세워졌으며, 이숙기(李叔琪)가 비문을 짓고 전원발(全元發)이 글씨를 썼다. 지정국존은 13살에 출가, 18살에 승과에 급제하고, 29살에 이미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어 유식론을 강의했다. 속리산 법주사, 삼각산 중흥사, 비슬산 유가사(瑜伽寺) 등의 주지를 역임했다.

『대반야경』을 독송하고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했으며, 심지관경소(心地觀經疏)를 왕에게 올렸다. 그는 또한 5교2종의 사원을 관리하고 승려에 관한 모든 행정을 책임졌다. 1321년 법주사로 하산했고, 1324년 오공진각 묘원무애국존(悟空眞覺妙圓無礙國尊)에 책봉되었다. 1327년 12월 1일 방장실에서 입적하니 세수 88세, 법랍 75세였다. 8일 법주사 서북쪽 산등성이에 다비(茶毗)하고, 산호전(珊瑚殿) 동쪽 모퉁이에 탑을 세웠다. 현재 탑은 없어지고 탑비만 마애비 형식으로 남아있다.

금동미륵불 ⓒ 이상기


조선시대 초에 나온『신증동국여지승람』충청도 보은현 【불우】조에 이러한 법주사의 역사가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다.

"법주사(法住寺): 속리산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신라의 중 의신(義信)이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성덕왕(聖德王)이 중수했는데, 석조(石槽)ㆍ석교(石橋)ㆍ석옹(石翁)ㆍ석확(石鑊)이 있으며, 절 안 산호전(珊瑚殿)에는 금신장육상(金身丈六像)이 있다. 문 앞에는 구리로 부어 만든 깃대(幢)가 있는데, 모양이 몹시 높고 그 한 쪽에 통화(統和) 24년에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또 고려 밀직대언(密直代言) 이숙기(李叔琪)가 지은 중 자정(慈淨)의 비명(碑銘)이 있다."


벽암대사에 의해 현재 법주사의 모습이 이루어졌다.

벽암대사비 ⓒ 이상기


조선시대 법주사의 역사는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와 속리산사실비(俗離山事實碑)에 의해 확인된다. 이들 비석은 법주사 수정교 앞에 세워져 있다. 벽암대사비는 벽암각성(覺性: 1575-1660)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있다. 벽암각성은 보은 사람으로 14세에 출가하여 부휴(浮休)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을 당해 의승(義僧)을 이끌고 나라를 위해 싸웠다. 그러한 연유로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벽암대사는 팔방도총섭(八方都摠攝)에 임명되어 1624년부터 3년 동안 남한산성을 쌓았다.

그리고 1626년(인조 4년)부터 불에 탄 법주사를 중창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1630년에 쓰여진 '법주사 사적기'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전 법주사는 건물 60여 동, 석조물 10여 점, 암자 70여 개로 이루어진 대찰이었다. 대표적인 건물이 대웅대광명전(2층 28칸). 산호보광명전(2층 35칸), 팔상오층전(36칸), 비로전(17칸), 극락전 (6칸), 원통전 (6칸)이다. 전쟁으로 소실된 이들 건물 중 대웅전과 팔상전이 중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대사의 업적을 기려 비문은 다음과 같은 명(銘)으로 끝을 맺고 있다.

법주사 전경도 ⓒ 이상기


괴로움의 바다에 배를 띄워 중생을 구제하였고 作舟苦海以濟羣蒙
그 본원을 본받으니 실로 임제의 정종이로다. 規厥本源實惟臨濟之正宗
높디높은 속리산은 선사가 머문 곳이니 俗離嵓嵓惟師所宮
돌에 새겨 그 시작과 끝을 기록하노라. 刻之于石以記始終


속리산사실비는 조선 현종 7년(1666)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 비문은 앞부분에서 조선 초 속리산을 찾은 사람들 이야기를 적고 있다. 세조가 김수온(金守溫)과 함께 속리산에 왔고, 성운(成運)이 속리산에 은거하며 많은 시를 지었다. 비문의 뒷부분에서는 속리산 수정봉 위에 있는 거북바위(龜石)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속리산사실비 ⓒ 이상기


거북바위의 목이 서쪽으로 향하고 있어 중국의 재물이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사신이 이를 알고 거북의 목을 베고, 그 위에 10층의 부도(浮屠)를 세우도록 했다. 그 후 각성선사가 목을 이어 붙였고, 충청도병마절도사 민진익(閔震益)에 의해 다시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리와 부도를 통해 불교를 신비화하고 사설(邪說)을 퍼뜨린다고 적고 있다. 불교에 비판적인 비석이다. 

법주사는 근현대 들어 어떻게 변했을까?

팔상전 ⓒ 이상기


근대 들어 1851년(철종 2)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도움으로 법주사 중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1872년(고종 9)에는 청동미륵불이 해체되고 2층으로 된 용화보전이 헐렸다. 다행히 1881년부터 탄응(坦應)선사가 전각을 중수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아가게 되었다. 1939년에는 주지 장석상(張石箱)스님의 발원으로 미륵불 조성이 시작되었다. 80척으로 계획하고 조각가 김복진(金復鎭)에게 제작을 의뢰했다. 그러나 1940년 김복진이 세상을 떠나면서 사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미륵불이 완성된 것은 1964년 주지 박추담(朴秋潭)스님에 의해서다. 문제는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미륵불이 청동미륵불로 다시 태어난 것은 1990년 월탄(月誕) 주지스님 때다. 미륵불 아래에는 성보전시관으로 사용되는 용화보전이 위치한다. 2002년에는 청동미륵불이 개금불사를 통해 금동미륵불로 변화되었다. 현재 법주사의 상징은 청동미륵불이고 대표 건물은 팔상전이다.

대웅(보)전 ⓒ 이상기


성보전시관에 있는 법주사 전경도에 보면, 법주사는 건물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일주문에서 홍교(虹橋)를 건너면 금강문이 나온다. 금강문 다음에 천왕문이 있고, 천왕문 좌우에 범음료(梵音療)와 행랑(行廊) 있다. 천왕문 북쪽 법주사 한 가운데 오층탑이 있다. 오층탑이 지금의 팔상전이다. 오층탑 좌측에 용화보전이 있고, 북쪽에 원통전, 극락전, 약사전 세 전각이 서에서 동으로 나란히 있다. 그리고 극락전 뒤로 대웅전이 있다. 

법주사로 날아 들어온 금까마귀 선사

금오 태전 ⓒ 이상기


금오태전(金烏太田: 1896-1967)선사는 보월성인(寶月性印)선사의 제자로, 만공과 경허로 이어지는 선불교의 맥을 잇고 있다. 1911년 강원도 금강산 마하연선원에서 도암긍현(道庵亘玄)을 은사로 출가한다. 도암은 경허의 제자인 혜월(慧月)선사로 법맥이 이어진다. 금강산 마하연에서 3년을 보낸 후 20세부터 안변 석왕사 내원암에서 3년 동안 용맹정진한다. 1921년에는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가 한암(漢巖)선사의 지도를 받는다. 1923년 3월에는 예산 보덕사로 보월선사를 찾아가 깨달음의 인가를 받는다.

보월선사의 사법(嗣法)제자가 된 태전은 1925년 만공선사로부터 금오라는 법호와 함께 무문인(無文印)을 전수받는다. 이때 내린 전법게는 다음과 같다.

덕숭산 아래에서 이제 무문인을 내리노니 德崇山脈下 今付無文印
보월 아래 계수나무 금오가 하늘을 훨훨 나네. 寶月下桂樹 金烏徹天飛

금오태전 승탑(부도) ⓒ 이상기


금오선사는 1953년 선학원 조실을 거쳐 1954년 불교정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된다. 금오선사가 법주사외 인연을 맺은 것은 1956년이다. 봉은사 주지를 거쳐 법주사 주지가 되었다. 1958년 조계종 총무원장을 잠시 맡았고, 1967년 법주사 조실로 다시 돌아왔다. 이때부터 금오선사는 대종사로도 불리게 되었다. 그는 법석을 열고 종풍을 진작시키며, 법주사의 위상을 높였다. 그리고 1968년 10월 8일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했다.

홀연히 본래사를 깨달은 것 같은데 忽覺本來事
부처님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네. 佛祖在何處
뱃속에 온 세계를 담고 肚裏藏乾坤
몸을 굴리며 사자후를 토했네. 轉身獅子吼
덧붙이는 글 7월 1일 속리산 법주사를 포함한 7개의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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