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06 18:09최종 업데이트 23.08.0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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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딸, 아내, 엄마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깨우쳤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을 매개로 풀어본다.[편집자말]
"솔직히 남편에게 맞고 사는 여자, 이해 못 하겠어요. 스스로 박차고 나오지 못하는 건 혼자 살 능력이 없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가정폭력 피해 사례를 공유하면 꼭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다. 맞는 말 같다. 폭력을 피해, 이혼만 하면 모든 게 깔끔하게 해결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실제 상황은 그리 간단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가정폭력의 피해자 중 꽤 많은 이들이 가해자를 쉽사리 떠나지 못한다. 이상한 일이다. 그들은 왜 고통받으면서도 가해자 곁에 머무르는가? 정말 독립해서 살 자신이 없어서일까? 일단 유명한 화가 부부의 사례를 보자.


"내 속치마는 무릎에서 찢어졌고 새 드레스는 더러워졌다. 그가 무릎으로 나를 마루에 눌러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에는 길게 두 개의 긁힌 자국이 생겼다. 다른 때엔 내가 좋아하던 얼굴이다. 그리고 내 넓적다리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1938년 5월 10일)

"키 큰 남자는 항상 근사하지만 긴 팔로 나를 때릴 때는 아니다."(1941년 7월 8일)

"우리는 저녁 식사 후 상당한 열기를 가지고 싸움을 계속했다. 내가 얼굴을 한 대 맞고 냉장고 위 선반에 머리를 부딪칠 정도였다. 그가 나를 죽일 것 같았다."(1942년 3월 8일)


155cm도 안 되는 키, 45kg 몸무게의 아내와 195cm 키, 거의 100kg에 육박하는 거구의 남편이 '부부싸움'을 한 기록이다. 확연하게 차이 나는 신체 권력을 앞세워, 아내를 손쉽게 제압한 뒤 무지막지하게 구타한 이 남성은 누구일까.

호퍼가 작품에만 몰입할 수 있었던 비결

놀라지 마시라. 바로 현대 도시인의 고독과 상실감, 단절을 무심하게 포착한 '미국의 국민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다. 우리나라에서도 한 대기업이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광고를 만들어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화가다.

그는 현대인이 겪고 있는 쓸쓸함과 무기력을 화폭에 잘 포착해 명성을 얻었지만, 정작 옆에 있는 아내의 우울함은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생각 속에서 아내는 당연히 내조를 해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호퍼는 적막한 공간 속에서 고립된 인물의 소외감을 주로 그려낸 화가였지만, 사실 그 자신은 놀랍도록 평온하고 정돈된 생활을 했다. 호퍼가 작품에만 몰입할 수 있는 최적의 안정된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아내 조세핀 호퍼(Josephine Hopper, 1883~1968, 이하 조)의 헌신적인 내조와 희생 덕분이었다.

조는 연극과 영화를 호퍼와 함께 본 뒤 감상을 나누는 지적인 토론 상대였으며, 그림 소재를 찾아 동서남북으로 돌아다닐 때 힘든 여행을 함께 한 파트너였다. 게다가 조는 성실한 모델이기도 했다. 호퍼는 놀랍게도 오직 한 여성, 자신의 아내만을 여자 모델로 썼다. 그래서 조는 수십 년간 온갖 상황과 역할을 부여받아 다양한 연령대의 여인을 연기하며 호퍼의 그림 속에 남았다.

에드워드 호퍼, <아침의 태양>, 1952년, 캔버스에 유채, 미국 오하이오 콜럼버스 미술관. 아내 조를 모델로 삼아 그린 작품이다. Licensed by ARS, NY - SACK, Seoul ⓒ 2023 Heirs of Josephine H


그 무엇보다 조 역시 뉴욕미술학교를 졸업한 화가였다. 하지만 그녀는 호퍼와 결혼한 후 전통적인 아내 역할에만 얽매여야 했다. 왜였을까. 무엇보다 호퍼는 조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1942년 3월 8일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30년간 알고 지낸 화가 에드윈 디킨슨이 조의 수채화를 보기 위해 호퍼 부부의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호퍼는 교묘하게 조와 디킨슨의 대화를 방해했다. 디킨슨에게 최근 자신이 심사위원을 맡은 일에 대해서만 줄창 떠들어댄 것이다. 급기야 호퍼는 디킨슨이 돌아간 다음, 조에게 디킨슨이 그녀의 작품을 싫어했다고 조롱했다. 조는 이 일을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호퍼가 그답지 않게 말을 많이 한 이유를 잘 알고 있다. 호퍼는 항상 느리고 조용한 사람이며, 대화의 흐름에 무관심하고 호흡 중에 대화를 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가 아주 약한 바람이 내 쪽으로 불어오는 순간, 즉각 행동에 옮겨 그것을 죽여버린 것이다."

호퍼가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갖고 있을 때, 그녀가 집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은 빛이 좋지 않은 부엌과 침실뿐이었다. 조가 1934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이 겪고 있는 내적 갈등이 잘 드러나 있다.

"내가 아주 행복하고 생기가 돌 때면 그림을 그리고 싶지만 호퍼는 먹어야 하지. 내가 어쩌다 그림 그리는 동안에는 더더욱 그래. 그러면 나는 화가 나지. (하지만) 호퍼가 그림 그리는 동안에는 분위기를 유지해야 돼. 영원히 방해받지도 않고 그런 분위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말이지.

그가 그림에 대한 영감이 떠오를 때면 나는 결코 그의 신경을 건드리거나 괴롭혀서는 안 되고 인내심을 가지고 식사를 제공해야 하지... 한때 나는 스스로 예술가라 생각하고 다른 길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나 자신이 부엌데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어디에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아."


이런 상황을 탈출하기 위한 조의 '저항'은 앞서 봤던 '부부싸움'으로 귀결됐다. 하지만 '싸움'이라니. 체격 차이가 이토록 또렷한 두 사람 사이에 과연 '싸웠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

호퍼의 폭력을 합리화 한 아내 조

가정폭력은 남편의 폭력 못지않게 아내의 대항도 계속되기 때문에, 피해자의 정당방위도 폭력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렇기에 소위 '부부싸움'은 여성학자 정희진이 책 <아주 친밀한 폭력>에서 진단한 대로 "대칭적인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남성폭력의 중립적 표현"에 가까울 것이다.

이들의 갈등이 '부부싸움'이 아니라 '남성폭력'이었다는 사실은, 호퍼가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캐리커처가 증명하고 있다. 호퍼가 1935년에 그린 <화 안 내는 남자와 화 잘 내는 여자>를 보자. 호퍼는 자신을 성가대 옷을 입고 후광을 받은 키 큰 성자로, 조는 포니테일 머리를 한 작은 여자아이로 그렸다. 조는 아동복처럼 넓게 퍼진 스커트 차림을 한 채 고양이같이 발톱을 세우고 그에게 덤벼드는 모습이다.

조는 이를 "나의 존재를 무효화하려는 호퍼의 노력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물 위로 코를 내놓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증거"라고 정의했지만, 호퍼에게 그녀의 저항은 그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랬다면 조의 항의를 '화 잘 내는 여자'의 앙탈로 그릴 수 있었겠는가. '화를 안 낼 수 있는 것'도 권력인 것을 호퍼는 몰랐던 것 같다.
 

에드워드 호퍼, <화 안 내는 남자와 화 잘 내는 여자>, 1935년경, 종이에 목탄과 연필. Licensed by ARS, NY - SACK, Seoul ⓒ 2023 Heirs of Josephine H

 
그러나 조는 이 같은 호퍼의 조롱과 폭행에도 그의 곁에 남는다. 한 차례 폭력이 지나간 뒤에 호퍼가 먼저 슬그머니 그녀를 팔로 껴안으면, 조는 '싸움이 싫어서' 마음을 풀곤 했다.

아예 조는 자신이 당하는 폭력을 남들과 비교해 상대화한 후 사소한 일로 만들기도 했다. 조가 1960년 3월 1일에 쓴 일기는 자신이 폭력 가정에 머물러 있는 상황을 스스로 설득한 흔적이다.

"우리가 싸우는 것, 내가 싸우는 것은 얼마나 나쁜 일인가. (...) 호퍼가 상기시켜 주는 대로 그는 (다른 나쁜 남자들처럼) 술을 마시지 않고 난잡한 여자를 쫓아다니지도 않는다."

도대체 조는 왜 호퍼의 폭력을 합리화 했던 걸까. 아니, 조 뿐만이 아니다. 맞고 사는 아내들 중 상당수는 남편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 애쓴다. 이상한 일 아닌가? <여자는 인질이다>의 저자 디 그레이엄 미국 신시내티 대학 심리학 교수는 이 같은 심리를 놀랍게도 '스톡홀름 증후군'으로 설명한다.

'스톡홀름 증후군'은 1973년 8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은행 강도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인질로 붙잡혔던 사람들에게서 발견된 특이한 심리기제 때문에 생겨난 용어다. 당시 은행직원 4명이 6일간 억류돼 있었는데, 이들은 그 강도에 대해 적대적이기는커녕 도리어 편들어 주고 심지어 사랑하는 행태를 보였던 것이다. 왜였을까. 인질극이라는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피해자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공격자와의 동일시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트라우마>의 저자 주디스 허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립되어 가면서, 피해자는 생존이나 기본적인 신체적 욕구뿐만 아니라 정보, 심지어 정서적 지지를 위해서 가해자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된다.

두려움이 커질수록 오직 하나의 허용된 관계 즉 가해자와의 관계에 더욱 매달리고, 가해자에게서 인간성을 찾으려고 애쓰게 되며 가해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즉 스톡홀름 증후군은 정신적 외상에 의해 생겨난, 비정상적 유대심리인 셈이다.

어쩌면 조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전형적인 희생자였을 지도 모른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고통에 적응하는 다양한 전략을 발달시킨다고 한다. 조는 자신이 당한 폭력을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있는 그대로 해석한다면 가정을 떠나야 하는 더 큰 문제와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조는 호퍼의 폭행이 시작될 때마다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물었다"라고 술회한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를 무력한 피해자로 정체화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나도 같이 때린다, 그러므로 동등하다"라는 주장은 그것 자체가 상대적으로 약한 자신의 반격을 똑같은 공격으로 여기는 '방어 기제'일 가능성이 높다. 학대자와 친밀한 관계일 때, 가해-피해 관계를 인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호퍼의 아내로만 살다 죽은 조 

<아주 친밀한 폭력>에 따르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남성에게 절실히 필요한 존재가 됨으로써 그가 가진 권력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한다. 조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호퍼는 조의 내조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호퍼는 스스로 끼니마저 해결할 수 없는 무신경한 사람이었다. 여성은 남성이 자신을 원할수록 권력을 느끼는데, 결국 이 권력을 향한 욕망은 여성 스스로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남자를 위해 소진하는 길을 걷도록 만든다. 조가 그랬다. 그녀는 결국 호퍼의 아내로만 살다가, 호퍼의 아내로서 죽었다.

어쩌면 '나의 남편은 여성에게 폭력 따위 쓰지 않는 신사적인 남자'라고 우쭐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 신사적인 남편 역시 분명 다른 남자가 여자에게 행하는 성폭력으로부터 무형의 이득을 본다.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 대부분은 알게 모르게 '스톡홀름 증후군'의 포로이기에, 굳이 폭력까지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남편 '달래기'와 '기 세워주기' 같은 감정 노동 제공하기, 시댁 일에 봉사하기, 남편보다 가사노동을 자발적으로 더 하는 것 등의 현상들은 여자들이 '스톡홀름 증후군'의 희생자임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소설가 박완서는 <지금은 행복한 시간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사람 밑에 종이라는 족속이 따로 있었을 적에도 주인을 잘 만나 사람 대접받는 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0명의 종 중 9명이 주인과 겸상을 해서 밥을 먹고,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학문을 익혔다고 해도 단 한 명의 종이 다만 종이라는 이름으로 박해받는 게 정당한 사회에선 그 9명의 종이 단지 특혜를 받고 있을 뿐 사람대접을 받고 있다고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 '특혜'라는 것은 정당한 권리가 아니기에, 그걸 베푼 쪽에서 언제 빼앗아가도 항의할 수 없다. 바로 그것이 "솔직히 남편에게 맞고 사는 여자, 이해 못 하겠어요. 스스로 박차고 나오지 못하는 건 혼자 살 능력이 없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라는 이야기를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참고서적
<여자는 인질이다>, 디 그레이엄 외 지음, 유혜담 옮김, 열다북스, 2019
<에드워드 호퍼>, 게일 레빈 지음, 최일성 옮김, 을유문화사, 2012
<화가의 마지막 그림>, 이유리 지음, 서해문집, 2016
<아주 친밀한 폭력>, 정희진 지음, 교양인, 2016
<트라우마>, 주디스 루이스 허먼 지음, 최현정 옮김, 사람의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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