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22 11:54최종 업데이트 23.07.22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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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와 쓰네기치를 기리는 비는 요코하마시 도젠지(東漸寺)에 있다. 이번 천승환의 일정 중에서 오카와 쓰네기치를 찾아가는 건 특별한 일정이다. 그는 일본인이고 요코하마시 쓰루미 경찰서의 서장이었기 때문이다.
 
지진의 혼란 속에서 쓰루미 경찰서는 많은 조선인과 중국인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역 주민들이 조선인을 죽여라라고 외치며 몰려와 경찰서를 에워쌌다. 조선인 편을 드는 경찰서 따위는 부숴버려라라는 소리가 높았다. 오카와 서장은 군중 앞에 나서서 유언비어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소지품을 검사했지만 무기 하나 갖고 있지 않다고 하며 해산을 종용했다. 이런 오카와 서장의 태도에 군중들은 잠잠해졌다.
 
많이 알려진 그의 일화다. 1923년 10월 21일 자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조선인 326명, 중국인 70명이 보호받았다고 한다. 이를 기려 1953년 3월 21일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 쓰루미위원회가 오카와를 기리는 감사의 비를 도젠지에 세웠다.

천승환은 도젠지에 도착해 순서에 따라 청소를 하고 향을 올렸다. 다음이 촬영. 70-200GM 망원 렌즈를 달고 200mm까지 당겼다. 조리개는 F9까지 조여 비문을 또렷하게 담았다. 그 후 광각과 표준으로 갈아끼우며 정면과 양옆, 뒷면까지 촬영했다. 시간은 4시에 가까워 한낮의 햇빛처럼 딱딱하지 않았다. 만족스러웠다.
  

오카와 쓰네키치 감사비 그는 한국인을 구한 의로운 일본 경찰로 인정받고 있다. ⓒ 천승환

 
천승환이 사진에 눈을 뜨게 된 건 2014년 LG하우시스에서 진행하는 독도사랑 청년캠프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캠프에서 고수 두 명을 만났다. 기법이 훌륭한 친구, 자기만의 사진 철학을 가진 친구! 그때부터 천승환은 진지하게 사진에 다가섰다. 대학원에 들어가 미학을 공부하고 많은 작가의 작품을 살폈다. 군함도를 비롯해 강제연행의 상처를 찍은 이재갑, 위안부 관련 작품 활동을 오랫동안 한 안해룡, 디아스포라의 삶을 기록하는 성남훈 등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어렴풋하게나마 자신이 가야할 길이 다큐멘터리 사진임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는 사진을 하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 2017년의 국외사적지 촬영도 그렇고 이번 관동 대학살 유적지 촬영도 그랬다. 자신의 사진 세계가 쭉쭉 자라나는 것 같았다. 잊힌 사건이 자신의 작은 사진 한 장으로 어둠을 찢고 나올 수 있다는 게 기쁨이었다. .
 
그런 마음 때문인가? 천승환은 이번 관동을 촬영하면서 한 곳에서 보통 700~800번 이상 셔터를 누르며 정성을 기울였다. 또 아이폰의 라이더(LIDAR) 3D스캐닝 프로그램으로 영상 데이터까지 만들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장소별로 10장 안팎을 추려 보정 작업을 할 계획이다. 우선 JPEG 파일로 공개하고 나중에 원시 데이터인 로우(RAW) 파일로 누구나 내려받을 수 있게 데이터를 풀 생각이다.
  

천승환이 세운 80일간의 촬영 일정. 40곳을 계획했는데 70여 곳으로 늘었다. ⓒ 천승환

 
오카와 쓰네키치를 기리는 감사의 비를 떠나오면서 천승환은 여러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이번 작업을 떠나기 1년 전부터 인터넷 검색과 논문, 가토 나오키의 <9월, 도쿄의 거리에서>, 야마다 쇼지의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 강덕상의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을 읽으며 준비를 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조선인을 보호하려고 노력한 몇몇 일본인이다. 이날 둘러본 오카와 쓰네키치, 미쓰자와에 살던 해군 대령 무라오(村尾履吉), 스미다구 호센지(法泉寺) 경내에 기림비가 있는 사나다 자아키(眞田千秋)다. 천승환은 이번 여행에서 세 사람의 사적을 방문 계획에 넣었다.

물론 여러 시각이 있다. 오카와는 경찰서장이니 주민 보호는 마땅히 할 일을 한 건데 그렇게 칭찬할 필요가 있냐는 시각도 있다. 또 일본의 극우가 "일본 경찰이 자경단으로부터 조선인을 보호했다. 이것이 일본의 참모습이다"라며 오카와를 활용하고 있으니 상황이 고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승환은 모두 조선인을 박해할 때 인간애를 발휘한 일본인에게 머리 숙이는 일은 의미있다고 판단했다. 가네코 후미코가 박열과 동지애를 나눴고 후세 다즈치가 2·8 독립선언을 한 유학생과 연대한 것처럼, 일본과 한국의 청년이 손을 잡아야 극우로 치닫는 양국 정부를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으로 오카와 쓰네기치의 비를 찾았고 촬영이 끝났을 때 오기 잘했다고 자신을 칭찬했다.
 
무너져가는 보화종루
 
익숙해지고 단련된 탓인가. 60일이 넘어가면서 허리 통증은 사라졌다. 65일에 걸쳐 군마, 사이타마를 거쳐 도쿄, 가나가와현을 오갔다. 이제 지바현과 나리타(成田) 시의 사적을 찾아가면 80일의 일정은 다 끝난다. 72일 차가 되는 날 천승환은 지바현 야치요시의 간논(觀音)지로 향했다. 실은 나흘 전에도 왔는데 비가 내려 '보화종루'를 제대로 촬영할 수 없었다. 
 

일본에 있는, 한국인이 세운 단 하나의 위령시설. 지바현 칸논지에 있다. ⓒ 천승환

 
칸논지의 보화종루는 깊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한국에서 자칫 영원히 잊힐 뻔한 관동 대학살 사건의 기림 운동이 일어난 건 극작가 김의경과 민속학자 심우성 덕분이다. 김의경은 1985년 관동 대학살을 다룬 희곡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를 쓰기 위해 답사를 하던 중 치바현 칸논지에서 조선인 위령 푯말을 발견한다. 이 푯말에는 내력이 있었다.

1959년경 한 노인이 칸논지의 세키 고센(關光禪) 주지에게 찾아와 절에서 300m 정도 떨어진 나기노하라 들판에서 학살된 조선인을 추모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노인의 고백 덕에 칸논지에 위령 푯말이 세워지고 해마다 9월에 위령제가 열렸다.

김의경은 한국으로 돌아와 이 사연을 전하며 한국인의 손으로 제대로 된 위령 시설을 건립하자고 문화예술계에 제안한다. '위령의 종 보내는 모임'이 발족되고 민속학자 심우성이 실무 책임을 맡게 되었다. 고맙게도 세키 고센은 위령시설 건립터로 칸논지 땅의 한 쪽을 내주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차별없이 살아가자는 뜻으로 보화(普化)라 이름 붙인 종과 한국의 기와와 목재에 단청을 입혀 만든 종루는 1985년 8월 바다를 건너 칸논지에 세워졌다(이 과정은 오충공 감독의 <불하된 조선인>에 영상으로 담겼다).

이런 사연 때문인가? 1998년에는 타카츠구 주민들이 나기노하라 학살 현장에서 발굴한 유해를 항아리에 담아 칸논지로 옮겼다. 다음 해인 1999년 9월에는 위령비를 건립하고 조선인 희생자 6명의 유골을 안치함으로써 칸논지는 조선인 학살의 역사를 증명하는 중요한 사적지가 되었다.
 
천승환은 보화종루를 촬영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지은 지 40여 년이 지나 단청도 다 벗겨지고 잦은 지진으로 기둥이 밑동부터 여기저기가 갈라져 보기가 안타까웠다.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우리 손으로 지은 단 하나의 위령시설이 무너진다면 영령을 두 번 죽이는 꼴이 될 것 같았다. 마침 한국의 시민단체 '유라시아문화연대'(이사장 신이영)가 100주년을 맞아 보수 작업에 나섰으니 사진을 잘 찍어 상태를 생생히 알리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
 

보화종루는 현재 위험한 상태다. 시급한 보수가 필요하다. ⓒ 천승환

  

보화종류는 잦은 지진으로 기둥이 쩍쩍 갈라진 상태다. 시급한 보수가 필요하다. ⓒ 천승환

 
잡초는 언젠가 돌을 깨고 자란다
 
천승환은 5월 26일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40곳을 계획했으나 현지에서 추천받은 곳을 더해 나가다 보니 70여 곳이나 촬영했다. 80여 일 동안 엄마의 닭볶음탕이 그리웠다. 작업비가 부족하니 햇반에 반찬 한두 가지 혹은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웠다.

후원해 준 이들이 한결같이 잘 먹고 다니라고 했건만 캡슐 호텔에서 밥을 해먹을 수도 없고 좋은 음식을 끼니마다 사 먹을 수도 없는 일. 가끔 소고기덮밥을 먹거나 더러 돈가스를 먹는 사치를 누렸다. 편의점 도시락이나 햇반으로 저녁을 때운 날은 금세 허기가 져 엄마의 닭볶음탕이 눈에 삼삼했다. 공항에 내려 엄마의 안부보다 닭볶음탕 차려놓으라는 주문부터 했으니 석달 내내 걱정하신 어머니가 서운하셨을 테다.
 
천승환은 돌아와 쉴 틈이 없었다. 우선 전시 준비를 해야 한다. 전시회는 100주기인 9월 1일에 맞춰 하고 싶었는데 서울에서 전시장을 구할 수 있을까 걱정이 컸다. 다행히 성북구청의 최인담 학예사가 천승환이 페이스북에 연재한 글을 보고 "성북구청이 운영하는 <문화공간 이육사>에서 초대전을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천승환은 기뻤다. 공간은 작아도 '이육사'를 기리는 곳에서 할 수 있다는 점이. 8월 29일부터 9월 24일까지 날짜를 잡고 제목은 일단 '관동 대학살 100주년, 잡초는 언젠가 돌을 깨고 자란다'(가제)로 잡았다. 7만 장 중에서 추리고 추려 20점 정도를 걸 생각이다.
 
또 하나 닥친 과제가 대학원 논문. 7월 말까지 '계획서'를 내야 한다. 전주대학교에서 역사문화콘텐츠를 전공하고 더 깊게 공부하고 싶어 건국대학교 대학원 문화콘텐츠 학과에 진학했다. 학부 때와 달리 대학원에선 '왜'라는 질문을 많이 했다. '왜' 내가 이 역사를 마주하는지, '왜' 내가 이 역사를 사람들에게 잊지 말자고 하는지. 그런 고민을 많이 했다. 이번 80일간 촬영한 작업물로 석사 논문을 쓰겠다는 방향은 세웠지만 어떻게 쓸진 아직 못 정했다. 7월 말까지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문화공간 이육사에서 여는 전시는 벌써 다섯번째 개인전이다. 8월 29일부터 전시할 예정이다. ⓒ 천승환

 
천승환은 80일 동안 걷고 찍으며 많은 질문을 길어올렸다.
 
'나름대로 의미를 새기고 출발했지만 추도비를 사진으로 남긴다는 게 정녕 의미가 있을까?'
'내가 찍은 사진이 관동대학살 사건에 대한 한국 사회의 무관심을 흔들어 깨울 수 있을까?'
'1923년, 백년 전의 아픔, 아우성, 분위기를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한다면 그 방법은?'
 
여러 질문이 솟아났다. 쉽게 해답을 찾지 못했다. 특히 호센카의 니시자키 마사오가 제공한 도쿄의 학살지 열한 곳을 돌 때는 막막했다. 대부분 아무런 흔적도 없고 그 땅의 주소가 바뀐 경우도 많았다. 표지석조차 없는 현장에 서면 이 터를 사진으로 남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기 흘렀던 피눈물을 사진으로 전하는 게 가능할까 이런 회의가 밀려왔다.
 
천승환은 이런 고민과 질문의 해답을 대학원 석사논문과 전시회에서 나름 드러낼 터이다. 궁금하고 기대된다. 천승환은 전시회를 열자마자 8월 30일부터 8일간 일본으로 2차 촬영에 나선다. 7만 장을 정리해 보니 미흡한 점도 눈에 띄고, 무엇보다 일본에서 백주기를 맞아 다양한 추도회가 열리는데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을 찍고 싶어서다.
 
8월 30일 사이타마에서는 구학영(관동 대학살 당시 대량 학살된 조선인 가운데 유일하게 묘비에 이름·고향주소·나이가 새겨있는 인물) 추도식을 카메라에 담을 작정이다. 9월 1일 극우의 저지선을 뚫고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열릴 추도식에선 뜨거운 함성을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9월 2일 저녁 7시 일본 국회 앞에서 개최되는 촛불집회에선 프레임 안에 간절함을 채워넣을 계획이다.
 
9월 6일까지 이어지는 2차 촬영을 마치고 돌아올 때 천승환은 관동 조선인 대학살이라는 거대한 역사 속에서 또 어떤 질문을 길어가지고 올까? 아마도 관동 대학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백 년 동안 침묵한 것에 돌을 던지는 질문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천승환에 관한 더 많은 이야기는 그의 페이스북에서 만날 수 있다.
https://www.facebook.com/hwan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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