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22 11:52최종 업데이트 23.07.22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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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사진작가 천승환은 지난 3월 6일 일본으로 떠났다. 관동조선인대학살 100주기를 맞아 80일 동안 관련 사적지 40여 곳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서였다. 14일째 되는 날 사이타마현의 구마가야(熊谷)시를 방문했다. 유코쿠(熊谷)지 오하라(大原) 묘지에 있는 공양탑을 청소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다가왔다.

"혹시 젊은이는 이 비석과 관계가 있나요?"
"아닙니다. 저는 역사를 공부하는 한국 학생입니다. 이 공양탑이 관동조선인대학살 때 숨진 분들을 추모하는 비여서 청소를 하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구마가야시에서 벌어졌던 일을 자신도 안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할머니가 돌아서고 천승환은 청소를 계속했다. 오하라 묘지의 공양탑은 한 길 높이라 제법 시간이 걸렸다.

천승환이 이번 작업을 계획할 때 청소는 머릿속에 없었다. 하지만 첫 방문지인 구라가노(倉賀野)의 구품(九品)사를 가서 생각을 바꿨다. 돌보는 이가 없어 주변은 어지럽고 추도비 몸돌에는 때가 잔뜩 껴 이를 못 본 척 할 수 없었다. 촬영 결과물도 지저분할 터이니 깨끗하게 돌보고 셔터를 누르기로 했다.

칫솔과 편의점에서 사 온 솔로 먼지를 털어내고 주변을 쓴 다음 물로 겉면을 닦았다. 문제는 음각으로 새긴 글자 사이에 낀 흙 먼지. 오랜 세월 탓이라 거의 돌덩이처럼 굳어 있어 칫솔로는 어림없었다. 손톱깎이에 달린 칼날이 안성맞춤이었다. 표면을 물로 닦고 주변을 청소하는 건 어렵지 않으나 글자 사이 사이 더께를 걷어낼라치면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기도 했다.

"아직도 청소중이네요."

천승환이 땀을 닦으며 고개를 드니 좀 전에 인사를 나눈 할머니였다. 뒤에는 아들과 손자가 보였고 꽃도 들려 있었다. 할머니는 손자에게 100년 전 비극을 설명하며 가족과 함께 추도비에 예를 올렸다. 순간 천승환은 마음이 울컥했다. 학살 현장에서 돌아온 사람의 회고에 '의로운 일본인'의 도움으로 살았다는 얘기가 있는데 마치 그 현장을 보는 것 같았다. 
 

구마가야의 공양탑 천승환은 14일차에 이곳을 방문했다. ⓒ 천승환

  

구마가야 학살터 최초의 학살이 일어난 자갈밭 부근. 현재 치치부선이 지나간다. ⓒ 천승환

 
내무부장이 보낸 공문서

청소를 마치고 공양탑의 사진 촬영까지 끝내니 어느 결에 묘지에는 노을이 찾아들고 어디선가 고적한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백년 전 관동 지방 어디서나 조선인의 피가 흘렀듯 이곳도 그랬다.

구마가야에서 일어난 학살은 사이타마현의 내무부장이 보낸 공문서가 주범이었다. 지진의 피해가 거의 없던 지역인데도 그는 "불령선인이 우리 현에 들어올지 모르니 적당한 방책을 강구하라"고 시정촌에 문서를 내렸고 그 이후 사이타마 여러 곳에서 학살이 시작되었다.

도쿄에서 지진의 참화와 학살을 피해 조선인은 지바, 사이타마현 등 도쿄와 인접한 지방으로 황급히 달아났다. 사이타마로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가와구치(川口)를 거쳐야 하는데 현의 지시를 받은 자경단은 이곳에서 쫓기는 조선인을 낚아챘다.

가토 나오키가 쓴 <9월, 도쿄의 거리에서>에는 구마가야시의 학살에 대한 상세한 서술이 나온다.
 
가와구치에서 붙잡힌 조선인들은 아라비아, 오미아 그리고 오케가와까지 계속 걸어야 했다. 목적지도 모른 채 마을에서 마을로 자경단에게 넘겨졌다. 무려 50킬로미터, 30시간에 걸친 도보 행군이었다. 잠도 못 자고 쫄쫄 굶으며 무더위에 흘러내린 땀으로 온몸에선 쉰내가 났다. 구마가야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구마가야의 자경단에게 넘겨질 장소인 자갈밭에 이르렀을 때 살기등등한 수천 명이 달려들었다. 20명 이상이 여기서 살해되었다.

구마가야시의 연구자 야마기시 시게루는 "자신을 지킨다는 의미의 자경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망가지 않고 얌전히 밧줄에 묶인 채 연행되어 가던 사람들도 가차 없는 폭행을 당했다"라고 했다. 살아남아 있던 조선인은 대부분 유코쿠지 경내로 끌려와 만세 소리 속에서 살해당했다.

이런 아픔이 있는 곳이 구마가야시고 유코쿠지 경내였다. 천승환이 유코쿠지 경내를 벗어났을 때 거리는 어둑했다. 버스정거장까지는 30분 이상을 걸어야 한다. 차비를 아끼려고 웬만한 거리는 두 다리로 움직인다. 할머니가 격려하고 가족까지 참배하는 모습에 기뻤다. 하지만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니 구마가야의 학살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해 몸이 무거웠다.  
   

혼조 나가미네 묘지에서 술을 올리는 천승환. 그는 예를 올릴 때 두루마기 한복을 입는다. ⓒ 천승환

 
천승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건 공양탑의 비문이었다. 1938년 구마가야시에서 세탁소를 하던 조선인 한씨가 노력해 죽은 동포를 기리는 공양탑이 유코쿠지 경내에 세워지게 되었는데 구마가야 시장이 비문을 썼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우리 동포 국민이 자각하고 반성하여 긴장하며 건실한 풍기를 조성하도록 촉구하게 되었으니 그 기여와 공덕은 더할 나위 없이 크고...

이 구절을 읽을 땐 숨이 턱 막혔다. 마치 조선인이 죽어 일본 사람의 도덕심이 향상되었다는 서술은 아무리 좋게 받아들여도 모욕이고 숨진 이를 두 번 죽이는 구절이었다. 숙소로 들어가는 길에 천승환은 편의점에서 저녁을 때우고 사케 1.8리터 한 병을 샀다. 좋아하는 술을 되도록 참았는데 오늘은 취하고 싶었다.

하루의 촬영이 끝나도 숙소에서 할 일이 많다. 내일 일정도 챙겨야 하고 무엇보다 촬영 이미지를 정리해야 한다. 256기가 메모리 카드 두 장을 가져왔으나 한 곳에서 로우(RAW) 파일로 수백  장을 찍기에 금세 꽉 찬다. 이를 외장 하드로 옮겨야 다음 날 촬영할 수 있다. 이놈도 숙소를 옮겨 다니다 잃어버릴 수 있으니 학교에서 제공하는 서버에 별도로 파일을 올려야 한다. 은근히 시간이 드는 작업이다.

그래도 천승환은 이날 밤 취하고 싶었다, 사케 한 잔에 육포 한 점씩, 취해서 잠들고 싶었다.

가난한 대학원생의 결단

촬영 55일 차, 이날은 오카와 쓰네기치(大川常吉)를 기리는 '감사의 비'를 찾아가는 일정이다. 요코하마의 캡슐 호텔을 나서는데 다른 날보다 몸이 훨씬 무거웠다. 천승환은 이번 작업을 준비하면서 열심히 근력 운동을 했다. 몸무게도 10kg이나 뺐다. 하지만 일정의 중반을 넘어가니 허리와 무릎이 신호를 보냈다.

그가 짊어진 배낭의 무게 탓이다. 카메라 몸통에 광각, 표준, 망원에 이르는 줌렌즈가 3개, 거기에 표준, 망원 단렌즈가 각각 1개씩, 렌즈만 다섯 개다. 휴대용 플래시와 삼각대, 노트북에 물통까지 넣었으니 얼추 20kg에 가까운 무게다. 게다가 하루 평균 만 보 이상을 걸으니 몸뚱아리가 아우성을 칠만 했다.
 

2017년 국외사적지 기행을 할 때의 천승환. 이때는 배낭 무게만 40kg에 가까웠다. ⓒ 천승환

 
천승환은 스물네 살인 2017년 일본, 중국, 러시아, 베트남 등 적지 않은 나라를 여행했다. 그는 중학교 때 무전여행으로 세계를 돌아다니겠다는 꿈을 꿨다. 철이 들며 무전여행은 불가능한 걸 알았지만 세계 여행의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전주한옥마을에서 사진 촬영을 하며 어렵게 여행 경비를 마련했다.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으니 기왕이면 뜻깊은 여행을 하고 싶었다.

2017년에 시작해 2018년으로 이어지는 140일 여정, 이름하여 '국외 사적지 역사기행'이다. 강제징용과 원자폭탄 피해와 관련해 나가사키를 둘러봤고 오사카·교토·나라에서는 백제 도래인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중국의 동북 3성을 다니며 항일무장투쟁의 격전지와 고구려 성터를 찾아다녔고 연해주에 있는 독립운동 유적을 살폈다.

천승환은 베트남의 꽝남성과 꽝응아이를 거닐며 한국군 민간인 학살 위령비와 증오비를 돌아볼 때 작은 변화를 꾀한다. 그전에도 나름 고민하며 셔터를 눌렀는데 '기록'이란 단어를 머릿속에 새기며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진으로 남길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때부터 여행은 진지한 기록 작업이 되었다. 

역사기행 얘기를 들려주면 모두 합창하듯 물었다.

"어떻게 가야 해?"

그는 결심한다. 국외 사적지를 온라인에서 누구나 찾아볼 수 있는 지도로 만들겠다고. 천승환의 국외 사적지 역사기행은 '대한민국 국외사적지 역사지도작업'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먼저 발견하고 연구한 선배에게 감사를 드리며 일본, 중국, 러시아, 몽골, 대만, 홍콩, 필리핀 등 총 37개국 700여 곳의 사적지를 정리했다.

독립운동,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베트남 참전 등 기록된 장소는 다양했다. 각종 사이트나 책을 참고하고 위성 지도와 로드뷰를 돌려봤다.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을 보며 '여기다'라고 장소를 짚었다. 연락이 닿는 해당 국가 사람이 있으면 도움을 청해 어떤 주소나 GPS 좌표보다 정확성을 꾀했다. 구글의 '내지도' 기능을 이용해 압정을 꽂듯 한곳 한곳 표시하고 이미지와 해설문을 달았다. 30분 내에 정리가 된 장소도 있고 1주일을 헤맸던 경우도 있었다.
  

대한민국 국외 사적지 온라인 지도. 천승환은 지금도 이 작업을 하고 있다. ⓒ 천승환

 
관동조선인학살 기록 작업은 '국외사적지 지도작업'의 내용을 더 알차게 채우는 의미도 있었다. 관동 일원에 있는 유적지의 주소와 사진이 제대로 없다는 게 천승환의 투지를 불태웠다. GPS 주소만 정확하면 누구나 참배하고 아픔을 기릴 수 있건만, 제대로 된 사진 기록물이 있다면 연구자건 시민운동단체건 풍부하게 활용할 수 있으련만 안타까웠다. 그래서 2017년의 140일 여행 이후 1829일 만에 배낭을 바리바리 싼 것이다.

출혈도 있었다. 80일 동안 비행기 삯에 먹고 움직여야 하는 비용은 살던 집의 보증금 1000만 원을 빼 마련했다. 또 46만 컷이나 찍어 간당간당한 소니 카메라 A7M3의 셔터를 20만 원 주고 갈았다. 사적지의 전경을 넓은 화각으로 담으려고 350만 원이나 되는 광각 렌즈도 장만했다. 이래저래 이번 사적지 촬영을 위해 1500만 원이나 들인 셈이다. 친구와 선·후배, 은사의 도움이 있었지만 가난한 대학원생으로서는 큰 지출이고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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