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17 11:06최종 업데이트 23.06.1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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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프랑스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에 임하는 수험생들 ⓒ RCF

 
6월 14일 53만 명의 프랑스 고교생들이 바칼로레아(고등학교 졸업 자격시험) 철학 시험을 봤다. 긴 세월 온 국민의 관심을 받으며 일주일간 치러지는 바칼로레아의 포문을 열어왔던 철학 시험이지만 올해는 다소 달라진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마크롱 집권 이후 이어진 교육 제도 개편의 결과로 바칼로레아 시험 과목이 5개로 줄어든 가운데 올해는 특히 가장 비중 높은 2개의 선택 과목이 이미 3월에 치러졌고, 학생들은 그때까지 취득한 성적을 바탕으로 대부분 이미 상급학교 진학 방향을 결정지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철학은 잘 못 봐도 대세에 지장을 주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과목으로 남겨진 것이다.  


비판적 사고와 함께 제 의견을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논증하는 시민으로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역할을 맡아온, 프랑스의 상징 자본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도 마크롱 정부의 일관된 개악 드라이브를 피해 가지 못했다.

그러나 철학 시험을 향해 가해진 정부의 명백한 타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든 언론들은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에 출제된 주제들을 비중 있게 다뤘고, 사람들은 밤새워 이 주제를 놓고 이야기꽃을 피웠으며, 시험이 끝난 오후에는 제시된 주제를 두고 현역 철학자와 챗 GPT의 맞대결이 개최되는 등 철학에 대한 프랑스 사회의 융숭한 대접은 계속되었다.  

20점 만점에 20점을 받아 11점을 받은 인공지능을 대파한 철학자 라파엘 앙토벤은 방송(RTL)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인공지능은 1000년 동안 훈련을 받는다 해도 결코 인간처럼 사고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이성이 간여하는 영역인가"라는 바칼로레아 철학 주제를 두고 챗 GPT와 맞대결을 벌여 승리한 철학자 라파엘 앙토벤(우). 채점에 참여한 철학교수이자 작가 알리에트 아베카시(좌). ⓒ RTL(동영상 캡처)

 
시험 어떻게 치렀나 물었더니

이날 고3 학생들은 3개의 문항을 받고 그 중 자신이 고른 하나의 주제에 대해 4시간 고민하고 답했다.

제시된 주제는 다음 세 가지다.

1. 행복은 이성(理性)이 관계된 영역인가?
2. 평화를 원한다는 것은 정의를 원하는 것이기도 한가?
3. 제시된 레비 스트로스(프랑스의 인류학자, 구조주의자)의 <야성의 사고> 중 한 대목을 읽고 분석하기


마침 필자의 딸이 이날 시험을 치른 고3 중 한 명이었기에 아이와 주변 친구들에게 철학 바칼로레아 시험을 어떻게 치렀는지 물을 수 있었다.  

안젤릭(17세)은 1번, 행복에 관한 질문을 골랐다. 할 말이 많은 주제라고 생각했다. 우선 행복은 이성의 영역이라는 데 동의했다.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지나치게 반이성적인 성향의 사람이라면 비난과 소외를 피할 수 없고, 계속해서 사람들과 부딪히게 되므로 행복에 이르는 데도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성이 반드시 행복의 필요 조건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이나 지적 장애로 인해 이성적 사고에 제약이 있는 사람들도 충분히 행복을 누리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누리는 행복의 원천은 이성의 작동과는 무관하다.

안젤릭은 테제(These, 논리를 전개하기 위한 최초의 명제)와 안티 테제(Anti these, 최초의 명제를 부정하는 명제)의 논리 속에서 자기 생각을 실증적으로 펼쳐 나갔다고 말했다.

지미(17세)는 세 번째 주제인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의 글 <야성의 사고>를 읽고 분석하는 것을 택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 책에서 그의 기본 사상인 "우월하거나 열등한 문화는 없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문 기술을 소유한 엔지니어와 주어진 제한 조건 속에서 필요한 물건을 재주껏 만들어 내거나 고치는 사람(bricoleur)이라는 두 카테고리의 인물을 통해 노동과 인간, 테크놀로지의 관계에 대한 시각을 제시했다.   

지미는 이 글을 인간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글이라고 파악했다. 제한적 조건이지만 자발적이고 아마추어적인 노동을 하는 이들에 비해 프로페셔널한 환경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는 일과의 관계 속에서 결국 종속적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봤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일은 자본을 대가로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계약의 형태이기 때문에 인간은 일에 종속되기 쉽다. 지미는 이런 현실 속에서 현대인들은 번아웃에 이르지 않도록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말로 6페이지에 걸친 답안을 마무리 지었다고 했다.

릴리(18세) 역시 세 번째 주제를 택했다. 학교에서 레비 스트로스의 해당 글을 공부한 적은 없지만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철학 시간에 심도 있게 다룬 적이 있었기에 레비 스트로스의 관점이 한눈에 들어왔다.  

엔지니어는 일정 영역에 대한 전문성을 가지고 충분한 작업 여건에서 일하지만 그렇게 일정하게 작업 조건이 짜인 환경에서 그의 능력은 제한적으로 활용되며 정체될 수 있다. 반면 수공업식으로 필요한 물건들을 한정적 도구와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 내는 사람은 바로 그러한 결핍이 오히려 창조의 원천을 제공하며 자신의 창의력을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는 장점이 될 수 있다고 릴리는 결론을 맺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그다지 긴장하지 않았고 시험이 특별히 어렵게 느껴지지도 않았다고 했다. 대체 어떤 훈련을 받길래 아이들은 이 거대한 철학적 질문 앞에서 이토록 여유로울 수 있었을까?

모든 프랑스 고3은 철학 시간에 예술, 행복, 의식, 무의식, 테크놀로지, 시간, 정의, 진리, 자유, 언어, 자연, 이성, 종교, 과학, 정부, 노동, 의무 등 17가지 개념을 두고 다양한 철학적 사유의 관점에 대해 공부한다. 사회의 성원으로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이 근본적 주제어를 둘러싸고 다양한 질문을 만들고, 토론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논증하고 설득하는 훈련을 받는 것이다. 

바칼로레아에서 나오는 질문들은 결국 학기 중에 공부하는 17가지 기본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개념에 대한 훈련을 위해 학교마다, 교사마다 택하는 책이나 철학자는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철학 교사 밑에서 배운 아이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관점과 취득한 방법론을 교환하며 시험을 준비한 것이다.

철학 과목이 결국 너희들 삶에 도움이 되는 것 같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주저없이 '그렇다'고 답한다. 열정 넘치는 젊은 철학 교사로부터 철학을 배운 줄리(18세)는 "우리를 둘러싼 사회 현상과 문제에 대해 사고하고 논쟁하고 내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사회를 살아가는 데서 매우 중요"하다며 "철학 수업을 통해 그러한 방법들을 익힐 수 있다"라고 답했다. 

교육부가 선택 과목 시험을 3월로 배치하고, 그때까지의 성적으로 대학 입학 사정이 이뤄지도록 하면서 철학 과목이 졸지에 무게를 잃게 된 상황이 철학 시험 준비를 소홀하게 만들지는 않았느냐고도 물었다. "그것 때문에 철학 공부를 방치하진 않았지만 철학 시험 점수가 내 미래를 좌우하는 변수가 된다면 훨씬 더 긴장감을 가지고 더 열심히 공부했을 테고, 거의 모든 아이들이 비슷한 생각"이라고 칼리(18세)는 답했다.
 

2023년 프랑스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에 분석 대상으로 제시된 레비 스트로스의 1962년 저작 <야생의 사고> ⓒ 목수정


아무도 원하지 않는 철학 과목의 변방화 

정부의 입시 규정 개편은 철학 시험을 중심부에서 변방으로 밀어냈기에 이에 대한 교사들의 불만은 한층 더 구체적이었다. 프랑스 철학교사협회 회장 마리 페레는 언론(VNI)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부의 이번 개편으로 철학은 무의미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과목이 되고 말았다. 정부의 제도 개편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학교 교육 현장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과목 간의 불필요한 경쟁을 유발했다. (…) 교사들은 최우선 과제로 예년처럼 선택 과목 시험을 철학 시험과 같은 시기에 치르게 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교사들의 목소리에 학부모도 학생도 이견이 없다. 대체 어떤 목적으로 이렇게 부조리한 개편이 단행되었는지에 대해선 마크롱 정부가 줄기차게 보여준 프랑스의 미국화라는 집념에 가까운 방향성으로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감히 철학을 없애는 만행을 저지를 순 없으니, 일단 뒷방으로 밀어버리고 스포트라이트를 꺼버리는 꼼수를 사용한 것이다.

정부가 철학 과목을 향해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철학 과목을 지탱하는 교사들은 묵묵히 현장을 사수한다. 30년 경력의 철학 교사 베네딕트 레는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 이후 교사들이 채점하는 과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우선 각 지역의 철학 교사들이 함께 한 고등학교에 소집됩니다. 한군데 모인 30~40명의 철학 교사들은 각자 3가지 유형의 질문에 대한 답안지를 채점한 후 수차례의 소그룹 조정 회의(Réunion d'Harmonisation)와 토론을 거쳐 각각의 질문에 대한 채점 기준에 합의하고, 채점을 위한 공동의 원칙을 세우게 됩니다. 이틀에 걸쳐 그 과정을 진행하고 나면 엄격하게 채점했던 교사와 관대하게 채점했던 교사들 사이의 격차가 좁혀지며 대체로 비슷한 수준의 틀에서 채점이 이뤄지게 되죠. 이 단계가 마무리되면 100여 개씩의 답안지를 할당받은 교사들은 집으로 그것을 가져가 열흘 동안 채점합니다. 이 기간 또한 마크롱 정부가 축소한 결과예요. 예전에 더 길었죠." 

베네딕트는 답안지 하나를 채점하는 데 평균 30분이 소요된다고 했다. 모든 답안지에 대한 채점은 각각 그 채점의 정당한 이유가 채점 과정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혹시 점수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을 때 채점된 답안지를 통해 교사는 자신이 해당 점수를 준 이유를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사들이 행하는 이 모든 수고에는 일체의 수당도 없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교사의 당연한 의무일 뿐.  

이들의 채점 방식은 컴퓨터가 OMR 카드를 삼켜 순식간에 채점해 버리는 방식과는 비할 수 없는 느림이요, 비효율이다. 그러나 지역의 철학 교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해 기준을 합의한 후 한장 한장 들여다보며 채점하는 시험지는 그것을 준비하는 아이들 또한 함께 모여  머리 맞대고 토론하게 만든다.

이 아날로그 한 채점의 수공예는 6페이지에 걸쳐 제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설파할 줄 아는 아이들을 만드는 하드웨어이기도 하다. 일타 강사 앞에 앉아 과외받으며 경쟁하는 대신, 아이들끼리 방구석에서 만나 서로 토론하고 협업하도록 이끌어 준다.  정치세력이 위로부터 무엇을 계획하든 철학이 수 세기 동안 직조해 놓은 단단한 사고의 뿌리가 이들을 지탱해 줄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을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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