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23 09:48최종 업데이트 24.02.23 09:48
  • 본문듣기

지난 1월 31일 '부키스트 철거 반대' 구호가 적힌 프랑스 파리 센강변의 노상 중고 서점 부키니스트 앞을 행인이 지나가고 있다. ⓒ 연합뉴스

     
프랑스 파리에서는 2024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지난해 발표되었던 센강변의 부키니스트(bouquiniste, 노상 중고 서점) 이전 계획이 전면 폐기되었다. 지난 13일 "대통령은 내무부 장관과 파리 경찰청장에게 모든 부키니스트들을 보존하고 강제 이전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요청했다"고 엘리제궁 대변인이 밝혔다.

이로써 지난해 여름 파리시 발표로부터 시작된 센강 부키니스트 철거 논란은 여론의 거센 반발 앞에서 파리시와 정부가 한발 물러서는 것으로 마무리된 모습이다. 파리 올림픽 개막식은 센강을 무대로 열릴 계획이어서, 센강의 우안과 좌안에 길게 늘어서 있는 부키니스트들은 관람객 시야를 가리거나 혼잡함을 가중시켜 안전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테러리스트를 막는데도 용이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올림픽 같은 초대형 국제행사를 앞두고 지자체가 새로운 시설을 짓거나 낡고 거추장스러운 건축물을 철거하는 일은 흔히 벌어졌고 '철거' 당하는 쪽에서는 거센 반발이 있어 왔다. 일부 국민의 딱한 사정에 귀 기울이지 않는 마크롱 정부가 고작 200명 남짓한 부키니스트들의 불만 때문에 당초의 결정을 폐기한 배경에는 4세기라는 막강한 역사적 무게와 이런 결정을 문화적 후퇴로 받아들이며 적극적으로 반대 운동에 동참한 시민들이 있었다.

4세기 동안 역사를 함께 해온 부키니스트
 

1843년 윌리엄 패롯이 그린 센강변 부키니스트의 모습 ⓒ 윌리엄 패롯

 
부키니스트는 파리 센강변 3km에 걸쳐 길게 줄지어 선 간이 서점과 서점상을 일컫는 말이다. 주로 고서나 중고 책, 옛 잡지, 옛 포스터, 판화 등을 파는데, 각각의 부키니스트들은 저마다 전문성을 가지고 있고,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과 열정도 대단하다.   

통계에 따르면 매년 약 30만 권의 책이 센강변 부키니스트들에게서 제공된다. 노상 서점이지만 규격화된 짙은 초록색 철제 박스가 있어서 퇴근할 때면 철제 박스를 자물쇠로 잠가 놓고 갈 수 있다.  

부키니스트들의 전통은 16세기에 시작되었는데, 여러 회화나 문학 작품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뜻은 '오래된 책을 팔고 사는 사람'으로 책을 의미하는 '부캥'(bouquin)에서 유래했다. 1649년에는 서점 길드의 압력과 검열이 쉽지 않은 세력을 탄압하고자 하는 절대 왕정의 이해가 맞아 한동안 영업이 불가했던 시간도 겪었다. 그러나 다시 영업을 재개할 수 있었고 1762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편찬한 사전에 처음으로 '부키니스트'라는 단어가 등재되었다.

프랑스 혁명(1789-1795) 중에는 공식 출간물이 대폭 줄었으나, 신문이나 혁명 세력이 찍어내는 선전 팸플릿의 유통은 급증했다. 이들의 가판대는 혁명 문건이 유통되는 시장의 역할을 했고, 귀족들이나 성직자들이 소유한 도서관과 서재들이 혁명 세력에 의해 털리면서, 부키니스트들 손에 진귀한 책들이 대거 들어와 시중에 유통되면서 양적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나폴레옹 1세 시절엔 센강변 정비 작업으로 강변이 더 아름다워졌고, 부키니스트들의 활약도 커져서 더 많은 부키니스트들이 생겨났고, 파리시 공공 상인으로서의 지위도 얻을 수 있었다. 1859년엔 파리시에 의해 부키니스트 양도권에 대한 규정의 윤곽이 만들어졌고, 1930년엔 지금의 초록색 박스의 규격이 마련된다. 2019년 파리의 부키니스트들은 프랑스의 무형 문화재로 등록되었고 지금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다리는 중이다.

올림픽 개막식 안전을 이유로 부키니스트 철거 계획이 범사회적인 비난과 조소를 받았던 것은 이들이 혁명과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도 언제나 그 자리를 지켜왔기 때문이다. 그들을 막았던 것은 절대 왕정의 독재였지, 그 어떤 사회적 소란도 아니었다. 2차 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부키니스트 수는 현재 230명보다 많은 275명에 이르렀다. 그러니 '안전'을 핑계로 일시 철거를 말하는 정부의 제안을 이들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포기했다"
 

파리 센강변에 늘어서서 중고 책과 판화, 포스터 등을 파는 부키니스트의 모습. ⓒ 목수정

 
"부키니스트들의 존재는 문화와 서적에 대한 파리 사람들의 매우 오래되고 깊은 애착을 증언함으로써 한편으로는 파리의 영혼을 구현한다. 부키니스트들의 실종은 그것이 일시적일지라도 파리 문화와 정신에 대한 또 다른 치명적인 타격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2023년 11월 30일 프랑스 주간지 <르 주르날 뒤 디망쉬>에 기고한 글을 통해 사학자 클레망틴 포르티에-칼텐바그가 질타한 바는 프랑스 지식인 사회가 일제히 정부의 무분별한 판단을 비판한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사실 단 하루만 문을 닫으라고 하면 닫을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6월 중순부터 철거해야 한다고 하고, 그러고 나서 이 박스가 훼손되면 누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이며 언제 다시 설치해 줄지,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 불투명한 상태였어요. 그런 상태에서 도저히 그들을 믿고 박스를 뜯어내는 데 동의할 수 없었던 거죠."

14년 전부터 남편과 함께 부키니스트의 삶을 시작했다는 실비 마티아스는 "그들이 포기했다"며 자신들이 거둔 승리에 매우 흡족한 얼굴로 그동안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때와 비교해 요즘은 경기가 어떠냐는 질문에 실비 마티아스는 "전반적으로 크게 달라진 건 없다. 프랑스인들은 전보다는 확실히 부키니스트를 덜 이용한다. 하지만 관광객들은 꾸준하다. 자국어로 먼저 책을 읽은 사람이 불어로도 읽어보고 간직하고자 여기서 책을 산다. 카뮈, 사르트르, 보부아르, 보들레르 같은 작가들의 작품은 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책"이라고 답했다.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으며 일 년 내내 강변에 서 있어야 하는 부키니스트의 노동 강도는 만만치 않다. 14년 전, 이 일을 하고자 파리시에 신청서를 냈을 때 엄격한 서류 심사를 받았고 100명의 신청자 가운데 22명만이 부키니스트가 될 수 있었으니 약 1:5의 경쟁률이었다고 했다. 파리시는 부키니스트를 하고자 하는 지원자의 동기는 물론 전과 기록까지 살펴 건실한 시민에게만 자리를 부여한다. 파리시가 부여하는 공공 상인의 자격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책 안 읽는 MZ 세대, 불안한 책의 미래
 

부키니스트들은 책뿐 아니라 판화, 포스터, 오래된 잡지들도 판매하며 각자의 전문 분야를 가지고 있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자신이 꿈꾸던 변하지 않는 파리의 추억을 만날 수 있다. ⓒ 목수정

 
내가 만난 부키니스트는 프랑스인들이 그들의 책을 덜 사게 되는 이유로 책을 구입하고 읽는 방식이 다원화되었기 때문이며 전반적으로 덜 읽는 것 같진 않다고 해석했다. 인터넷에서 책을 구입하거나, 전자책(E-book)을 읽거나, 벼룩시장에서 책을 사는 등 책에 접근하는 통로가 다원화했다는 것이다.  

실제 통계를 살펴보니, 책을 한 권도 안 읽은 사람이 2015년엔 10%, 2023년엔 11%였다. 연간 20권 이상의 책을 읽는 사람은 2015년 28%에서 2023년엔 31%로 오히려 나아졌다. 그러나 15세 이상 전체 연령을 대상으로 진행된 이 통계를 15~24세 청년층으로 좁혀보면 확 달라진다.

MZ세대로 분류되는 이들의 20%는 일 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E-Book에 대한 경험은 전체 세대(29%)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52%에 달했다. 10년 전과 비교해 전반적인 변화는 크지 않다는 부키니스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24세 청년이 34세가 될 때의 상황은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의 일반 정서와 동떨어진 판단을 했던 정부의 결정을 20만 명이 반대 서명에 동참하고, 지식인들이 연일 신문에 비판 글을 쓰며 압도적인 여론을 만들어 되돌려 놓았다. 그러나 4시간짜리 개막식의 편리를 위해 4세기의 전통을 잠시 삭제하자는 사고를 하는 통치자들은 여전히 잠재적 위험 요소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처음 출마했던 2016년, 그는 <혁명>이라는 책을 내놓으며 자신이 혁명을 하겠다고 했다. 2년 전 재선에 나서며 당명을 바꾸면서는 '르네상스'라고 명명했다. 프랑스인들은 과거로 퇴행하는 그를 보며 다음번에는 르네상스에서 암흑의 '중세'로 가는 게 아니냐는 농담 아닌 농담을 나눈다.

후보 시절 노숙자가 한 명도 없는 파리를 만들겠다고 장담했던 그는 5년 뒤 파리의 노숙자 수를 2배로 늘려놓았다. 책과 싸우는 모든 정치인은 퇴행을 부른다. 그래서 책을 구하는 모든 싸움은 적어도 사회의 퇴행을 막는 싸움이기도 하다, 어디서든.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