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19 17:39최종 업데이트 23.04.19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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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왼쪽)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 위키미디어 공용

 
17~18세기 계몽사상가들이 찬양한 인간의 본질은 단연 '이성'이다. 멀리는 고대 그리스 시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출발해, 16세기 프랑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18세기 독일 칸트의 관념론에 이르기까지 이성의 역사는 실로 장구하다.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고, 그 이성 때문에 인간은 합리적으로 사유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인간본질론이다.

18세기에 등장한 주류경제학은 이성주의에 발을 딛고 있는데, 이성주의는 거기서 '경제주의'의 옷을 입는다. 가령, 손익을 완벽하게 계산해 낼 수 있는 이성의 계산능력은 시장을 안정과 조화에 이르게 하는 주류경제학의 주체적 조건이다. 계산적이면 이성적이고, 계산능력이야말로 이성의 힘이다. 이 엄밀한 계산과정에 감정의 개입은 금물이다. 감정은 계산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억제되어야 한다. 나아가 감정은 주류경제학의 '과학화'도 방해한다. 주류경제학 모델에서 감정은 추방하고 무찔러야 할 적이다.


그러나 주류경제학을 철저한 감정혐오주의자로 착각하면 안 된다. 그것이 모든 감정을 혐오하지는 않는다. 감정은 대략 '선한' 감정과 '악한' 감정으로 구분될 수 있겠다. 선한 감정은 보통 연대, 협력, 신뢰, 사랑 등으로 표현되는데, 일반적으로 이런 행동은 '이타주의'로 불린다, 반대로 악한 감정은 배제, 경쟁, 기회주의, 혐오의 모양을 띠는데, 이것들은 보통 '이기주의'를 낳는다.

선한 감정과 이타심은 '미덕'의 바탕이 되고 악한 감정과 이기심은 '악덕'을 이룬다. 버나드 맨더빌과 애덤 스미스가 각각 <꿀벌의 우화>와 <국부론>에서 명백히 선언한 바와 같이 주류경제학은 이런 악덕을 미덕으로 여기는 경제학이다. 얼마나 악덕을 찬양했으면, 당시 사람들이 '맨더빌'(Mandeville)을 '인간악마'(Man-devil)로 불렀을까?

주류경제학이 이성을 숭상한 나머지 감정을 혐오한다고 했지만, 이처럼 실제론 모든 감정을 혐오한 건 아니다. 그들은 선한 감정만 추방했을 뿐 악한 감정은 모델 안에 그대로 유지했다. 이런 악덕의 경제학은 냉정함과 경쟁심, 그리하여 공격적 태도를 인간 본성의 결과로 여기며 권장한다. '일베'가 가장 희열을 느끼며 환호하는 행동 방식이다.

선한 감정도 인간의 본질
 

그러나 인간은 과연 이성적이기만 한가? 계몽사상가들의 융단폭격 아래서 잠시 잊고 있지만, 또 다른 철학자들의 주장을 들어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17세기 후반 파스칼과 19세기 초 쇼펜하우어는 이미 각각 "가슴"과 "충동의지"를 인간의 진정한 면모로 내세운 바 있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자유롭고 평등하며, 연민과 동정심이라는 보살핌의 감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18세기 중반 루소의 '성선설'을 모르는 이가 없다.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다.

이런 인간론은 비주류경제학에 닻을 내렸다. 케인스에 의하면 기업은 미래에 벌어들일 예상 손익을 완벽히 계산한 후 투자하지 않는다. 모든 기업은 어림짐작한 후 과감히 지른다. 그리고 합리적 계산이 아니라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이 투자를 추동했다. 다윈주의자 베블런에 따르면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인간의 이성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 더욱이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수백만 년의 집단생활과 집단 간 경쟁에서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어버이 성향"(parental bent)이 선택되었다. 어버이 성향이 낳은 연대, 포용, 이타심 등 '따뜻한 감정'이 진화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일찌감치 멸종하고 말았을 것이다. 케인스와 베블런은 자본주의경제가 인간을 살리려면 강력한 사회적 연대가 필요함을 역설한 경제학자들이다. 이들 경제학자의 눈에도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 오히려 감성이었으며, 사회를 발전시키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악한 감정이 아니라 선한 감정이었다.

어쩌면 삶 대부분에서 우리는 냉정한 이성보다 사랑하거나 미워하며, 연대하거나 싸우며, 다정하거나 공격적이며, 기뻐하거나 슬퍼한다. 곧, 감정이 인간의 본질에 더 가까울 수 있다는 말이다. 나아가 미워하며 싸우고 공격하기보다 사랑하며 연대하고 다정스럽게 살아간다. 물론 지배하고 쌓아놓기 좋아하는 한 줌 '욕망의 전사'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선한 감정이 없었더라면 서구의 복지국가는 건설될 수 없었으며, 선진국(!)들은 다시 가난해지거나 도태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디플롯

 
인간의 사유와 행동이 이성보다 감성에 추동되며, 악한 감정보다 선한 감정이 인간 본성에 더 부합한다는 관점은 그동안 수많은 진화생물학자, 진화심리학자, 신경생물학자들의 과학적 실험과 이론에 의해 확인되어 왔다. 미국 듀크대학교 진화인류학, 심리학, 신경심리학과 교수인 브라이언 헤어와 그 동료인 버네사 우즈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2021, 디플롯)은 그 한 가지 사례에 속할 것이다.

저자들은 여기서 호모사피엔스의 진화 및 생존 과정에서 차지하는 '다정한 감정'의 핵심적 역할을 부각해 주고 있다. 우리 인간은 다정함, 곧 '서로를 배려하고 도와주는 따뜻한 감정이 많았기' 때문에 진화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다윈은 자연에서 친절과 협력을 끊임없이 관찰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자상한 구성원들이 가장 많은 공동체가 번성하여 가장 많은 수의 후손을 남겼다'고 썼다. 다윈을 위시하여 그 뒤를 이은 많은 생물학자도 진화라는 게임에서 승리하는 이상적 방법은 협력을 꽃피울 수 있게 친화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다."(p.20)

과학적 실험과 연구를 거친 후 저자들은 이 다윈의 생각을 재확인했다.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우리 종은 갈수록 복잡한 방법으로 협력하고 소통했고, 이로써 문화적 역량도 새로운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 종은 누구보다 빠르게 혁신할 수 있었고 또 그 혁신을 공유할 수 있었다. 다른 인류는 가망이 없었다."(p.32)

선한 감정, 곧 미덕은 인간의 본질이며, 그것이 인류의 성공적 진화를 도왔다. 다정함이 강력한 협력과 따뜻한 연대, 그리고 굳건한 신뢰를 가능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고 다정함이 공격성과 혐오를 이긴다.

다정한 진보가 이길 수 있다
 

414 기후정의파업조직위원회 주최로 14일 정부세종청사 탄소중립성장위원회 앞에서 열린 '414 기후정의파업, 함께 살기 위해 멈춰'란 집회에서 한 참석자가 종이에 손팻말에 글자를 쓰고 있다. 자료사진. ⓒ 연합뉴스


윤석열 정권을 맞아 도덕, 노동, 여성, 환경은 반세기 전으로 퇴보한 듯하다. 대통령 부부로 인해 나라의 품격은 크게 실추되었다. 김구 선생이 "한없이 갖고 싶어" 하던 "높은 문화강국의 힘"은 물 건너간 지 오래다. '날리면' 소동은 잡아떼기의 끝판왕이다. 159명의 꽃다운 청춘들이 압사됐음에도 모르쇠와 뻔뻔함으로 일관하고 있다. 정말 기가 막힌다.

그 와중에 검찰 공화국은 거침없이 건국(!) 중이다. 그토록 자신 있어 하던 경제와 안보에서마저도 무능하니 이제 할 말이 없다. 이 막가파식 정권을 두고 어떤 진보가 화나지 않을까? 나 역시 화를 못 이겨 비판과 조롱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모든 진보가 공격적이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상대를 혐오하며 악마화하는 중이다.

그렇게 굳어진 분노와 혐오는 이제 물불을 가리지 않는 듯하다. 이른바 비이재명계에 대한 '개딸'들의 수박깨기, 문자폭탄 돌리기,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조롱, 정의당에 대한 공격 등 민주진영 내부로 향한 민주당 강성지지자들의 분노와 혐오는 실로 우려할 만하다. 깊이 들여다보면 막무가내식 당헌당규개정과 뻔뻔한 유권해석(!)도 극단적 분노와 증오가 야기한 몰상식적 행동 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악한 감정은 별 도움이 못 된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도 첫째 '다정한 것이 살아남았다.' 우리의 진화역사가 이를 입증해 주었다. 둘째, 몇몇 욕망의 전사를 제외한 대다수 인간은 다정함을 선호한다. 다정함은 인간의 본성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무려 30~ 40%를 차지하는 중도무당층에 다정함이 호소력을 발휘할지 모른다. 충분히 기대해 볼 만한 전략이다.

셋째, 정치적 조건이 변했다. 아무리 윤석열이 무능하고 무식하더라도 박정희와 전두환처럼 폭력적 정권이 아니다. 민주화 시대의 '투쟁방식'은 그리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넷째, 문화적 환경도 바뀌었다. 많은 학생을 가르쳐 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신세대'는 다정하지 않은 방식에 익숙지 않다. 나는 그걸 소홀히 여겨 교육을 효과적으로 실행해 보지 못한 사례에 속한다. 중도무당층과 신세대의 마음과 감정을 읽지 못하면 한국의 진보는 이길 수 없고, 살아남을 수도 없다. 나는 진보가 이겨야 우리 삶이 더 행복하고 좋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보수가 다정해지기 전에 진보가 먼저 다정해져야 할 것이다.

"(나의 개) 오레오와 나눈 우정으로 나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함을.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다."(p.300)

다정한 진보가 살아남고, 다정한 진보만이 이길 수 있다! 사족일지도 모르나 이참에 17~18세기의 비과학적 인문학에서 해방되기 위해 비주류경제학의 인문학을 들여다볼 것도 추천한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더 다정한 새해 프로젝트 리커버) - 친화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진화에 관하여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지은이), 이민아 (옮긴이), 박한선 (감수), 디플롯(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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