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17 07:16최종 업데이트 24.05.17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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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생활사박물관에 1960~1990년대 자취방, 만화방, 음악다방, 문방구 등 옛 서울의 골목길을 재현해두었다. ⓒ 연합뉴스


1970년대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다방적 도시문화"가 번창하였던 시대다. 이 표현은 고려대학교 철학과 신일철 교수가 한 신문에 게재한 칼럼의 제목이었다. 그만큼 다방은 1970년대 우리나라 도시의 풍경을 설명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장소였다. 당시 다방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던 다양한 용어들은 다방이 지닌 다중성이나 문화 코드로서 다방이 지닌 사회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도시의 유랑민 혹은 피란민들의 '공동응접실'이라는 표현을 보면 다방이 지닌 공동 시설로서의 특징이 나타난다. 공동체 의식이나 의례가 살아 있던 농촌을 떠나 도시로 넘어온 유랑민이나 전쟁으로 인해 고향을 떠난 피란민들에게 대체 공동체 혹은 유사 공동체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다방이었다.


있던 자리를 떠나 새로운 자리를 잡지 못한 경계인들이 드나드는 공동이용 시설이 다방이었다. 다방은 '대중사교장'이라는 표현도 이와 크게는 다르지 않다. 호텔 커피숍이나 고급 레스토랑을 이용하기 어려운 대중들이 사람을 만나는 곳이 다방이었다.

구직에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고,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 적은 비용으로 시간을 죽이는 장소로서의 다방은 일종의 '실직자대기실'이었다. 당시 다방 풍경을 담은 사진 속 손님들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쓸쓸함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실향민모임터'라는 표현 또한 도시와 향촌의 경계선에 있던 쓸쓸한 사람들을 느끼게 하는 용어였다.

반면에 다방은 '사회운동아지트'로도 불렸다. 프랑스대혁명이나 미국 독립혁명에서 카페가 담당했던 역할과 유사한 기능을 한 것이 1970년대 우리나라 다방이었다. 의식 있는 젊은이와 지식인, 노동운동가, 문화예술인 등이 민주화운동이나 인권운동을 도모하기 위해 모여든 곳이 도심의 다방이었다.

'아지트'라는 용어는 비합법적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비밀 연락처나 은신처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아기트푼크트(agitpunkt)에서 나왔다. 앞 글자 '아기트'가 구개음화 되어 아지트가 된 것이다.

6.25 전쟁 전후 지리산이나 한라산의 빨치산이 사용하던 비밀 은신처를 아지트라고 부르던 것이 1960~70년대에는 간첩들의 접선 장소를 표현하는 단어로 자주 등장하였다. 이후 반정부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아지트로 표현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사회적 혐오를 조장하던 것이 공권력과 언론이었다.

당시 일부 언론에 의해 다방이 '반문화의 온상'으로 표현된 것도 이와 유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지트'라는 단어는 순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는 비슷한 생각이나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라는 의미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1970년대의 일부 다방은 여전히 '문화인살롱'으로 불렸다. 해방 전후 커피를 마시는 고상한 사람들을 표현하던 용어 '문화인'들이 드나드는 장소라는 의미였다. 대부분의 다방은 문화인의 범주에 들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휴식처였지만, 일부 다방은 여전히 고상한 음악이 있고, 문화적인 취향이 고급스러운 사람들이 주로 드나드는 곳으로 남아 있었다. 호텔에 있는 다방이 '커피숍'이라는 별도의 명칭을 가졌던 이유이기도 하다. '대중살롱'이라는 애매한 표현도 등장하였다.

'일일다방', '일일찻집'
 

1972년 4월 25일 자 <조선일보> 기사 "한마음 한뜻...각계서 지원"에 처음으로 일일다방이 등장한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1970년대에 다방으로 불리며 등장했지만, 정식 다방은 아니고 하나의 문화였던 흥미로운 현상이 있다. 바로 '일일다방' 문화다. 이후 '일일찻집'이라는 표현으로 바뀌면서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문화 현상이며 하나의 모금 운동이다.

우리나라 언론에 일일다방이 등장한 첫 사례는 1972년 4월이다. 부산시 거제3동 부녀교실에서 일일다방을 경영하여 모은 5만 원을 새마을사업을 위한 성금으로 내놓았다는 소식이 <조선일보> 4월 25일 자에 실렸다. 5월 15일 자 <경향신문>에는 서울 답십리3동 어머니회에서 5월 13일 관내 신원다방에서 1일자선다방을 열어 수익금 10만 원을 모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내놓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처럼 초기에 열린 일일다방을 주최하는 것은 대부분 주부들이었다. 5월 26일 부산진구 부녀교실연합회가 서면다방에서 일일다방을 열어 수익금 10만 원을 구청에 전달하였고, 6월 27일에는 여성크리스천크럽이 서울 국립극장 앞에서 일일자선다방을 열어 수익금을 일선장병과 경찰관 돕기에 기탁하였다.

일일다방을 통한 성금 모금 운동은 모든 일터에서 유행처럼 벌어졌다. 1974년 7월에는 서울 시내 모범운전사들이 일일다방을 열어 모금한 3만 2000여 원을, 9월에는 사당3동 예비군중대에서 1일 다방을 열어 모금한 2만 410원을 방위성금으로 기탁하였다. 당시 인기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에 출연 중이던 배우 한혜숙과 민지환이 방위성금 모금을 위한 일일다방을 부산 시내에서 연 것은 1974년 8월 5일이었다.

청년들이 일일다방을 열기 시작한 것은 1974년 즈음이다. YWCA 청소년 Y틴클럽지도자회 주최로 일일다방이 열리고, 임성훈, 정광태 등 인기 가수들이 노래 손님으로 참여한 것이 1974년 2월 16일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일일다방 문화는 1974년을 전후하여 대학가에서 하나의 유행으로 번졌다. 연세대학교 사학과 1학년 학생 일동이 일일다방 수익금 2만 원을 수재의연금으로 <조선일보>에 접수시켰다는 소식, 서울 봉천동 일대에서 야간학교를 운영하던 대학생들이 일일다방을 열어 운영비를 모금하였다는 소식 등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초기에는 대부분 동아리에서 주도하는 각종 봉사활동 자금 마련을 위한 행사로 기획되었으나, 점차 아르바이트로 변질되면서 사회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시내 다방을 일정한 돈을 내고 빌리고, 티켓을 만들어 주변 친구들에게 판매한 후, 당일 직접 차를 만들어서 판매하였다. 이렇게 하여 남은 수익금을 필요한 일에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문제는 주변 사람들에게 티켓을 강매하는 일, 일일다방 참여를 이유로 학교 수업을 소홀히 하는 일, 건전하지 않은 목적으로 여는 일일다방 등이었다.

모금 운동의 한 형태로 자리 잡아

일일다방 확산에는 공직 사회도 기여하였다. 1975년 6월 12일 자 <조선일보> 기사 '1일다방 열어 원호모금'은 재무부 주최 일일다방 소식을 전하였다. 재무부는 6월 10일 청사 6층 회의실에 일일다방을 차렸다. 고위 공무원들이 엄숙한 회의를 하던 장소에서 은은한 멜로디의 고전음악이 흘러나왔고, 영문을 모르고 복도를 지나는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 신문의 보도를 보면 당시 우리 사회의 수준이나 모습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당시 일일다방에서 커피를 나르는 일은 여직원들이 맡았다. 정규직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공직 사회에 소속된 여성 공무원 혹은 여성 공무 지원인력들이었다. 이들이 커피를 타고 나르는 일에 거리낌 없이 동원되던 시대였다.

신문 기사에서 이들을 "아가씨(여직원)"라고 표기하였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신문 기사를 옮기면 이렇다. "아가씨(여직원)들이 부산히 찻잔을 들고 다니며 커피 냄새가 구수하게 번지는 다방으로 회의실이 변했다. 여기저기에 직원들이 모여 커피나 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회의실 문 앞엔 커다랗게 '불우이웃돕기 1일 휴게소'라고 써 붙여 놓았다.

'원호대상자', 지금 표현으로는 보훈대상자를 위한 모금을 하려고 "전 여직원을 동원하여, 서비스를 시키면서 차를 판 것"이었다. 이날은 마침 재무부 소속 외청장 회의를 하는 날이어서 회의 참석자들이 싫든 좋든 일일다방 손님이 되어야 했다.

참석한 모 은행장은 1만 원을 내놓기도 했다. 당시 커피 한 잔 가격이 100원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지금 돈으로 50만 원쯤 되는 액수다. 이날 하루 동안 이곳을 들른 사람은 400여 명, 모금액은 모두 13만 원이었고 전액 원호처에 전달되었다.

이렇게 1970년대 중반에 시작된 일일다방 문화는 일일찻집이라는 이름으로 변화하면서 지난 50년간 우리나라 모금 운동의 한 형태로 자리를 잡고 있다. 커피가 사람을 돕고, 사회를 따뜻하게 만드는 유용한 음료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아름다운 문화 일일찻집이다.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의 저자, 교육학 교수)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1972-1975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기사 일체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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