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2 11:44최종 업데이트 23.12.02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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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다방의 모습 (자료사진) ⓒ 연합뉴스

 
"네가 가는 카페가 어딘지 말해주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라는 말을 한 것은 오스트리아의 국민 시인 페터 알텐베르크(1859-1919)였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출입하는 음식점이나 카페가 사람의 품위나 지위를 말해주던 때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다방 유행이 시작되던 1930년대를 전후하여 누군가 다방을 출입한다는 것은 문화인이라는 징표였다. 이런 분위기는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구입이 어려운 커피는 여전히 귀했고, 비쌌으며, 누군가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특수한 계층이라는 것을 상징하였다.


1950년대까지 지속하던 커피와 다방의 유행은 5.16쿠데타로 잠시 주춤하였다. 3년 동안 커피는 수입이 금지된 특정외래품의 하나였다. 1964년 10월 수입 금지 특정외래품 명단에서 커피가 제외되었고, 쿼터제를 통해 커피 재료의 수입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966년 11월 커피 원자재의 수입이 완전 자유화되었다. 이에 따라 커피의 대중화 속도가 빨라졌다. 다방이 급격하게 증가하였고, 다방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누구나 드나드는 공간으로 변하였다.

60년대의 다방 문화
 

1967년 4월 29일 <동아일보> 기사 ‘소비생활 합리화와 다방'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물론 수입이 자유화된 것은 커피 생산 원료였지, 완제품은 아니었다. 따라서 미군 PX를 통해 불법적으로 흘러나와 유통되는 미제 커피는 여전히 인기가 높았다. 당국의 잇단 단속에도 불구하고 미제 커피는 시중에 범람하고 있었다. 커피 대중화로 가는 길목이었던 1967년 4월 29일 <동아일보>는 '소비생활 합리화와 다방'이라는 흥미로운 기사를 게재하였다. 보건사회부 실태조사를 이용하여 작성한 기사로서 당시의 커피문화를 잘 보여주는 기사였다. 이 기사를 통해 엿볼 수 있는 1960년대 후반 다방문화는 이러하였다.

첫째, 당시 다방은 전국에 3447개소, 서울에만도 1298개소가 있었다. 이 신문의 표현에 따르면 직장이 있는 주변에는 반드시 있는 것이 다방이었다. 즉, 일터가 있어서 사람이 모이는 곳 주변에는 의례 다방이 생겼다. 다방은 적당한 휴식을 취하는 자리인 동시에 커피 한 모금을 마시는 "거리의 사랑방"으로 우후죽순 들어섰다.

둘째, 다방은 늘어났지만 좋은 휴식처는 아니었다. 다방이 좋은 휴식처가 되기 어려웠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시끄러운 전축 소리였다. 당시 거의 모든 다방에서는 전축을 마련해 놓고 최신 유행하는 팝송이나 국내 가요를 틀어주는 것이 일상이었다. 고객의 취향과 무관한 음악 서비스였지만 휴식을 위해 다방을 찾는 손님에게는 소음이었다.

둘째는 "레지의 과잉서비스"였다. 손님, 특히 남성 손님이 들어오면 레지가 주문을 받는 동시에 손님과 함께 앉아 자신도 비싼 차를 주문하여 마시는 것이 풍습이었다. 레지가 마시는 음료는 물론 손님이 부담하여야 했다. 피하기 어려운 과잉서비스였다.

셋째, 커피 한 잔 가격은 30원이었는데, 이 가격이 자신의 수입에 비해 헐하다고 대답한 사람이 비싸다는 사람보다는 많았다. 정부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공정가격 30원을 35원, 40원으로 올려 받는 다방이 생겨나는 배경이었다. 당시 자장면 한 그릇 가격이 40원으로 책정되어 있었다. 자장면 한 그릇과 커피가 거의 같은 수준의 가격이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요즘 커피 가격은 저렴한 편이다.

넷째, 다방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직업군은 공무원과 정치인이었다. 보건사회부가 공무원, 학생, 교육자, 개인회사원, 공공단체(정치인), 상인, 군인, 가정주부 등 서로 다른 8개 직업인 1백 명씩 모두 8백 명에게 앙케트를 내어 조사한 결과였다. 이들 공무원과 정치인의 반수 이상은 하루 한 번 이상 누구 돈으로 마시든 다방을 출입하였다. 공무원뿐 아니라 일반 직장인의 경우에도 4분의 1쯤은 1일 1회 이상 다방 출입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신문 기사는 하루 한 번 이상 다방을 찾는 직업군에는 "1백 명 중 17명의 가정주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놀라운 일이라고 기록하였다.

다섯째, 다방족이 즐기는 차는 절대다수가 커피였다. 밀크는 7분의 1 정도, 홍차는 이보다 더 적었다. 이에 대해 해당 기사는 어떤 영양학자의 의견을 빌어, "육식도 못하는 우리가 기름진 것을 먹는 외국인들처럼 커피를 하루 몇 잔씩 마셔도 좋을까"하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여섯째, 다방을 출입하는 목적은 '약속'이 대부분이고, 이용 시간은 오후가 많았다. 문제는 직장인이 일하는 시간에 약속이 있다는 이유로 다방을 무상출입 하는 분위기였다. 다방의 본고장인 서구에서처럼 티타임 혹은 커피브레이크를 이용해 잠깐 마시는 커피로 피로를 회복한 후 다시 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다방에 출입하는 것은 문제였다. 한번 대접을 받으면 다시 갚아야 한다는 체면 의식으로 인해 이유 없이 다방을 반복적으로 찾는 것도 문제였다.

이런 다방 문화 개선을 위해 보건사회부 부녀과에서는 다방에서도 차나 커피 등 음료와 함께 간단한 식사를 제공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소비생활 합리화를 위해 다방에서 빵을 비롯한 일종의 대용식을 팔게 하자는 운동을 제안한 것이다. 문제는 여론 조사 결과였다. 조사 대상자 대부분이 다방에서 음식을 제공하는 것에는 반대였다. 다방은 차를 마시는 곳이지 음식을 파는 곳은 아니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이런 면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방에 부여하는 이미지는 예나 지금이나 서양과는 다른 분명한 특징이 있다. 다방은 말 그대로 차를 마시는 곳이지 음식이나 술을 파는 곳이 아니다.

"아이스커피 한 잔 들만한 멋"

커피의 유행과 함께 커피 맛을 담은 캐러멜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해태제과에서 생산한 소프트 커피 캬라멜이 그 주인공이었다. 신문 광고를 통해 "커피의 진미를 아시려면? 해태 커피캬라멜"이라는 광고문구를 반복적으로 내세웠다. 신문 광고 속에 커피의 역사를 아래처럼 설명하는 친절함을 보였다.

'커피는 아프리카 원산으로 아라비아커피, 리베리아커피 로브스타커피 3종으로 그 중 아라비아커피가 널리 재배됩니다. 1554년 최초의 커피점 카페 카네스가 생겼고, 이를 전후하여 유럽에 소개되어 현재까지 여러분의 벗인 것입니다. 캬라멜은 어린이의 것 만이 아닙니다. 본 캬라멜은 양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현대인의 최고급 캬라멜입니다. 해태 소프트 커피캬라멜, 값30원. 신제품 해태 홍길동 풍선껌.'

물론 "아라비아커피"는 "아라비카커피"를 잘 못 이해한 결과였고, "카페 카네스"는 "카흐베 하네"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 약간의 오류는 있지만 캐러멜 광고에 커피의 역사를 서술한 것은 나름 품위 있는 모습이었다. 이 해에 동양제과에서도 "나도 아빠처럼 커피를!"이라는 광고를 내세우면서 어린이들을 겨냥한 오리온 소프트 커피캬라멜 신제품 광고를 시작하였다. 가격은 커피 한잔과 동일한 30원이었다.

"커피의 진미는 라일락에서"라는 문구는 남양유업에서 종래의 커피 프림 '카네이션'을 대체할 신제품으로 개발한 '라일락'을 알리는 광고였다. 서양에서 광고의 시대가 1920년대였다면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 후반이 광고의 시대로 가는 출발점이었고, 커피캬라멜 광고는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1967년 8월 17일 칼럼 <동아일보> 칼럼 '사이비 멋'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박정희가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한 직후인 1967년 7월 7일, 유서깊은 조선호텔이 폐업식을 갖던 날 외신을 타고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비비언 리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의 커피 유행에 대해 동국대학교 영문과의 이창배교수는 '사이비 멋'이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칼럼(8월 17일)에서 "우리 이웃집 미스김은 판잣집에서 거지 같은 생활을 할망정... 다방에 들러 아이스커피 한잔을 들만한 멋은 안다"라고 풍자하였다.

북한(당시에는 북괴)의 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이 판문점에서 유엔군 측 차량에 뛰어올라 탈출하고, 부정선거 시비 속에 박정희가 두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되던 1967년, 도금시대 대한민국을 지배하던 것은 다방과 이를 둘러싼 사이비 멋이었다. (교육학박사,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 저자)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갈상(2021).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 푸른역사.
<동아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 1967년 관련 기사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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