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24 11:21최종 업데이트 23.06.24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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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에서 와인을 홀짝이던 소설가 신이현이 충북 충주에서 사과 농사를 짓고 양조장을 만들었습니다. 와인만큼이나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그가 달콤하게 와인 익어가는 냄새가 나는 양조장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편집자말]
온갖 풀들과 함께 1년 동안 동고동락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2021년 8월 승민 올림


<미친 풀들>이라는 이름의 와인 한 병과 함께 포도밭의 잡풀과 꽃들을 직접 그린 작은 종이에 짤막한 한마디가 적혀있다. "승민이 일한 지 벌써 1년이 되었구나. 헤어지기 싫다. 날 버리고 가지마라." 내가 농담한다고 생각하는지 승민이 킥 웃는다. 농담이 아닌데, 진심인데!
 

"많이들 먹어!" 꼬꼬에게 모이를 주는 승민. ⓒ 신이현

 
충주 고속터미널에서 처음 승민을 만났을 때 조금 당황했다. 남자가 아니고 아가씨가 나타난 것이다! 농업에 관심이 많으며 나의 남편 레돔씨의 농법을 배우고 싶다고 메일을 보냈기에 그저 남자이겠거니 했다. 일머리는 없지만 끈기 하나는 자신 있다고 썼는데 뭔가 결의가 느껴져 슬며시 웃음이 났다. 차가 없어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다시 충주시내 버스로 갈아타고 밭으로 오겠다고 해서 터미널에서 픽업하기로 했던 것이다.  

키가 크고 단정한 인상의 아가씨였다. 첫눈에 왠지 호감이 갔지만 저리 호리호리한 도시 아가씨에게 어떻게 농사일을 시키나 싶었다. "아, 이 세이지 풀을 포도나무 사이사이에 심는 것부터 해보라고요? 네, 좋아요!" 아가씨는 세이지 몇 포기를 들고 저쪽 어딘가로 사라졌다. 내가 한 50포기를 심고 그쪽으로 가니 아직도 그 몇 포기를 다 심지 못했다. 곱게 땅을 파고, 곱게 세이지를 심고, 다독다독 흙을 덮고, 나뭇잎을 덮고, 요리조리 살핀다. 그러다 옆에 작은 풀을 발견하면 한참을 들여다본다.
 

모든 잡풀이 궁금한 잡풀 여신 "이 냉이꽃을 발효해봐야겠어요." ⓒ 신이현

 
"이 풀은 뭘까요? 처음 보는 건데, 바닥에 떨어진 별 같아요." 두 손으로 부드럽게 잡초를 쓰다듬고 그 손으로 향기를 맡는다. "글쎄, 잡초 같은데?" 나는 대충 뭉뚱그려 대답한다. 내 대답이 시원찮은지 아가씨는 레돔에게 가서 물어본다. 두 사람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그 보잘 것 없는 풀의 이름을 알아내고 만다. "아, 지칭개라고 하네요. 이건 먹을 수도 있대요. 어머, 꽤 유명한 풀이에요." 그제서야 나는 관심을 가지고 풀을 본다. "먹을 수도 있다고?" 우리는 진지하게 요리법을 들여다본다. "어떤 맛인지 궁금해요!" "한번 먹어볼까? 죽는 건 아니겠지." 풀을 두고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져 밭일 진도가 안 나간다.

"왜 농사를 지으려고 하는 거지?" 나의 질문에 승민이 천천히 대답한다. "그러니까 제 꿈은 자급자족이에요. 지금까지 저의 생활이라는 것이 월급을 받아서 그것으로 먹을 것을 사는 방식인데, 생각해보니 내 직업이 나의 생존과 너무 거리가 멀었어요. 제 일이 먹고 사는 것과 좀 가까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게 농사인 거죠." 조금 부끄러워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일해서는 자급자족으로 살기는 좀 어려울 것 같다." 내 말에 흐흐 웃는다.

자급자족을 꿈꾸는 아가씨는 새벽에 일어나 고속버스를 타고 왔다. 밭으로 오는 시내버스를 기다리며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었다. 빵은 직접 구워서 만든 것이다. 밀가루에 붙은 천연효모를 살려내서 발효한 빵이다. 올 때마다 직접 구운 빵을 한 덩어리씩 들고 온다. 내 평생 먹어본 제일 편안한 빵이었다. 밭에 오면 어딘가로 사라져서 땅을 파거나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가보면 별로 한 것이 없다. "저 일머리 진짜 없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미루어 말하며 또 웃는다.
 

승민은 보리수 열매처럼 작고 빨간 것을 좋아한다. ⓒ 신이현

 
"어머, 이 딸기들 좀 봐요!" 승민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작고 빨간 것들이다. 딸기가 익어가는 것을 보는 동안 눈에 하트가 쏟아진다. 쪼그려 앉아서 한 톨도 버리지 않고 딴다. 나는 작은 열매들을 크게 좋아하지 않는다. "다 일이야 일." 장에 가서 한통 사면 간단한데 종일 따야하는 것이 고단하다. "이 카시스랑 블랙베리도 좀 딸까요? 어쩜 이렇게 예쁘죠!" 카시스와 블랙베리들은 나무에 조롱조롱 달려 보석보다 영롱하지만 이것도 따는 게 일이다. 나는 그냥 패스다. 승민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한알 한알 딴다.

이렇게 밭에서 거둬들인 작은 것들을 천금처럼 받들어 뭔가를 만든다. "이것에 설탕을 뿌려 살짝 발효해서 파이를 구우면 좋을 것 같아요." 승민이 뭘 만들면 나는 그저 입이 떡 벌어진다. 조그만 검붉은 열매들로 만든 파이는 맛있기도 하지만 너무 예쁘다. 이웃이 준 흠집 난 복숭아도 하룻밤 발효해서 파이를 굽는다. "루바브는 파이로 먹어버리면 너무 아까우니까 잼을 만들어요. 그리고 이렇게 예쁜 보리수는 어떻게 하죠?" 그동안 보리수 씨앗 제거하는 것이 무서워 아무것도 못했는데 승민이 촘촘하게 보리수 씨앗을 제거한다. "승민이 끈기 있다." 내가 혀를 두르면 무심히 이렇게 말한다. "제 특기가 그거예요."
 

양조장 파티 일을 거드는 승민. ⓒ 신이현


이렇게 우리는 붉은 열매들을 짓이기고 발효하고 그것으로 파이를 굽고 잼을 만들면서 여름 한철을 통과했다. 호밀을 눕히고 왕겨와 깻단 퇴비를 넣고 생태화장실도 함께 만들었다. 닭들과 거위에게 모이를 주었고 그들이 자라는 것을 함께 봤다. 어린 나무를 지지대에 묶어주었고 소나기를 맞으며 물꼬 트는 일을 했다. 소나기가 그치고 나뭇잎에 물이 뚝뚝 떨어지면 우리는 허리를 펴고 감탄한다. "저 산 좀 봐요!" 비를 내리고 남은 구름이 먼 산머리에 걸려있다. 아이는 농부만이 누릴 수 있는 그 아름다운 순간을 카메라로 찍는다. 나는 사진 찍는 아이를 사진에 담는다. 승민은 비구름이 아름답고, 나는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그 아이가 아름답다.

약속한 1년의 농사짓기가 끝나고도 승민은 가끔 시간이 될 때마다 밭으로 온다. 자연이 보고 싶을 때, 그 안에 사는 작은 생명체들이 궁금할 때 문득 온다. "리스를 만들어 보고 싶다." 승민이 올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자고 한다. 이 아가씨는 내가 원하는 거는 뭐든지 다 "어머 좋아요, 해요!" 라고 대답해준다.

포도밭과 들판의 마른 가지들을 주우며 우리는 모든 시들어가는 것들을 보고 감탄한다. 감탄도 함께 할 때 더 아름다워지는 것일까. 아가씨와 함께 하면 포도밭도 일터가 아니고 천혜의 휴식처가 되어버린다. "다음에는 열쇠 정원을 만들어보자." 하고 있는 일이 완성되기도 전에 우리는 다음에 하고 싶은 것을 줄줄이 이야기 한다. "진흙 화덕이랑 진흙 집도 내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요." 승민은 한술 더 떠서 이루지못할 것 같은 계획도 펼쳐놓는다.
 

열쇠 정원을 만드는 승민. "이 일은 정말 재밌어요. 소꿉 장난 하는 것 같아요." ⓒ 신이현

 
  "몇 년 농사를 지어봤으니 이제 어떤 생각인지 궁금하네. 자급자족의 꿈은 아직 유효한 거니?" 농사일을 떠나 승민은 천연발효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에서 일을 하고 우리 밀 발효 빵을 굽는 빵집에서도 일을 했다. "솔직히 완전 농사만 짓는 것은 육체적 한계를 느껴요. 그리고 우리나라 시골에 비닐 쓰레기가 그렇게 많고 묶여있는 개들을 보는 것도 힘들어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부정적인 것밖에 없냐?"

"농사를 지으면서 깨달은 것은 환경, 생태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발효와 미생물 쪽으로 가게 되는 것 같아요. 음식도 그렇고 땅도 그렇고, 자연에 기대어 살려면 미생물은 필수잖아요. 최근에 든 생각인데, 농사를 짓는다면 토종작물과 특정 식물들을 보존하는 밭 정원을 만들고 싶어요. 요즘 생태와 미생물을 주제로 한 모임을 하고 있는데 재미있어요. 이런 걸 자급자족이라고는 할 수 있을까요?" 자급자족을 하겠다고 시작한 농사일이 자기가 더 좋아 하는 일, 더 할 수 있는 일을 좀 더 디테일하게 찾아나가는 과정이 된 것 같다.


"시골에 산다고 모두 농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야. 자기가 잘하는 것을 키워 이웃과 교환을 하면 그것이 자급자족이지. 나도 복숭아랑 고구마 감자 옥수수, 많은 것을 이웃에서 가져와 먹어. 가장 이상적인 것은 동네 안에서 내가 먹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겠지. 충분히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어떻게든 이 아이를 시골로 내려와 살게 하고 싶은데, 승민은 여전히 생각중이고 공부중이고 방황중이다.

"이 잡초 좀 꺾어가야겠어요. 이번 달 주제가 잡초 발효거든요. 자라는 곳에 따라 발효에서 나오는 미생물이 달라질 텐데 어떻게 발효될지 궁금해요." 포도나무 아래 잡초를 꺾어 신문지에 잘 말아서 가방에 넣는다. "맨날 공부만 할 거냐. 돈벌이를 해야지." 나의 말에 그녀는 조금 진지해진다. "그러게요. 저도 고민하고 있어요. 나이가 이렇게 되어도 여전히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나는 승민의 미래가 궁금하지 않다. 걱정하지도 않는다. 손만 대면 무엇이든 아름답게 변신시켜버리는, 내 인생에서 가지고 싶은 마법을 이미 가져버린 미의 여신이니까. 
     

양동이 한가득 블랙베리를 딴 승민. ⓒ 신이현

 

승민은 나의 꼬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생각하고 공부하며 길을 찾고 있다. ⓒ 신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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