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26 04:57최종 업데이트 23.04.26 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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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낙태약 미페프리스톤 ⓒ 연합뉴스


미국이 낙태권을 둘러싼 2차 논쟁에 돌입했다. 2022년 1차 논쟁 주제는 낙태권을 헌법상의 권리로 인정할 것인가였다. 작년 6월 연방 대법원은 헌법상의 권리로 인정했던 1973년 판결을 뒤집고 각 주에 낙태권 인정 여부를 결정할 권한을 주었다.

이는 선거와 무관하게 행사할 수 있던 권리가 선거 결과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권리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낙태권 여부는 민주-공화당 미국 정치 지형과 비슷하게 형성되었다.


이번 2차 논쟁의 소재는 먹는 낙태약 미페프리스톤(mifepristone)이다. 2000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약으로 현재 미국 낙태의 절반 이상이 이 약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낙태 반대론자들은 안전성 문제를 들어 미국 연방 차원에서 사용을 최소화하고 유통을 막고자 한다. 이 경우, 낙태권을 인정하는 주에 거주하는 여성들도 권리 행사에 타격을 입게 된다.

여성의 낙태권은 다양한 정치 사회 논의와 연결되어 있다. 그중 하나가 20세기 전반기 유행했던 우생학법이다. 사회 문제를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하에 서구는 우열한 유전자를 가진 이들에게 다산을 권하는 '긍정적 우생학'으로 시작하였으나 이 주장은 열등한 유전자를 제거하는 '부정적 우생학'으로 확산되었다. 

영국 및 미국은 범죄자 및 사회 부적응자들에게 자발적 불임을 권했다. 나치가 이를 인종주의와 결합시켜 의무적 불임으로 확대했고 그것이 2차대전기 현실화했을 때 참혹했다. 이후 국가가 개인의 신체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관념이 생겨났고 이는 낙태권을 지지하는 여성자기결정권(Pro-Choice) 논리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다.

낙태약 미페프리스톤을 둘러싼 법적 다툼
 

지난 2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의 대법원 앞에서 태아 생명권(Pro-Life) 진영의 낙태 반대 운동가들이 기도하는 동안 뒤쪽 대법원 광장에서는 반대 목소리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낙태권을 둘러싼 2차 논쟁은 새로운 영역을 끌어들이고 있다. 미국 사회가 식품과 약품의 안전성을 이야기할 때 기준으로 삼는 FDA와 거의 잊혀진 19세기 금욕주의적 법이 소환되었다.

1938년 독립된 행정기구로 개편된 FDA는 미국 내 유통되는 식품과 의료품의 안전성과 효율성을 평가한다. 미국 사회의 건강을 위해 정확한 실험 결과와 사례를 통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을 약속한다. 상당히 높은 신뢰를 받고 있지만 이 기구가 제약회사 로비스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FDA의 신뢰성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지난 7일, 텍사스주 연방 법원 판결이었다. 매튜 카스마릭 판사는 미페프리스톤의 안전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FDA의 허가를 유보시키고 시장에 유통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 이유로 FDA가 승인 과정에서 서둘러 결정을 내려야 되는 정치적 압력에 놓였고 그 결과 객관적이고 신중해야 할 "과학적 평가"에 오류를 일으켰다고 설명했다. 매튜 카스마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판사다.

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워싱턴주 연방 법원은 상반된 결정을 내렸다. FDA가 미페프리스톤에 대한 정책을 변경할 필요가 없고 17개 주에서 이 약에 대한 시장 접근성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했다. 판결을 내린 토마스 라이스 판사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임명했다.

두 재판의 시작은 지난 11월이었다. 여성의 낙태할 권리를 법으로써 존중한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연방대법원이 뒤집은 이후, 미국의 이목은 먹는 낙태약 미페프리스톤으로 쏠렸다.

FDA는 미페프리스톤을 4년에 걸쳐 검토한 후 2000년에 허가했다. 원래 임신 7주까지만 사용하도록 했으나 2016년 임신 10주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2021년에는 처방받으면 우편배달도 허용했다. 미국산부인과협회와 세계보건기구(WHO)도 안전성과 효과를 인정하고 있고 영국과 캐나다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이 약의 유통으로 낙태를 금지한 법적 효과가 치명적으로 떨어진다는 데 있다. 작년 11월 보수단체인 자유수호연합(Alliance Defending Freedom)은 불임과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는 위험한 약이라고 주장하며 "FDA가 수많은 여성과 소녀들에게 끼친 건강상의 문제에 답해야 한다"는 요지로 텍사스 연방법원에 가져갔다. 반대로 워싱턴, 오리건, 애리조나, 일리노이, 버몬트 등 17개 주의 민주당은 워싱턴주 연방법원으로 향했다.  

5개월이 지나 같은 날 몇 분 간격으로 하위 연방법원에서 상반된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 문제는 제5순회항소법원으로 올라갔다. 16명의 판사로 구성된 항소법원은 보수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민주당이 임명한 판사는 불과 4명이고 나머지 12명 판사 가운데 6명을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했다.

미 대선과 맞물리며 중요한 정치적 변수
 

지난 15일(현지시간)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 로스앤젤레스 시청 앞에서 열린 낙태권을 위한 행진에서 연설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12일 제5순회항소법원은 미페프리스톤의 판매는 유지하되 몇 가지 조건을 달았다. 임신 10주가 아닌 임신 7주 이전이어야 하며 직접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안전성에 대한 확신으로 2016년 임신 10주까지 늘리고 2021년 우편으로 배달받을 수 있도록 한 FDA 결정을 뒤집은 것이다.

눈에 띄는 것은 항소 법원이 우편배달을 금지시킨 법적 근거로 인용한 1873년 컴스톡법이다. 거의 잊혀진 법으로 미국 우체국이 음란한(?) 서적, 포르노, 피임 기구, 비합법적으로 낙태시킬 수 있는 모든 물건의 배달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형사 처벌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좀비 법안은 낙태 반자대론자들이 낙태약을 불법화시키는 동시에 우편 유통을 막기 위해 텍사스 재판 과정에서 언급했다. 약의 안전성에 초점을 맞춘 텍사스의 매튜 카스마릭 판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뜻밖에 항소 법원이 받아들였다. 낙태 문제가 우편물 검열 문제로 확대될 수도 있는 모양새다.

메릭 갈런드 법무부 장관은 항소 법원의 판결에 "강력하게 반대한다"며 "FDA 결정을 갑작스럽게 뒤집는 것은 환자, 의사, 모두에게 혼란을 준다"면서 미페프리스톤 제조사인 댄코 래버러토리스와 함께 연방 대법원에 긴급 재검토를 요청했다.  

지난 21일, 연방 대법원은 낙태약 논쟁이 최종 결정 날 때까지는 기존 방식을 유지한다고 판결했다. 조지타운대 로스쿨의 로렌스 고스틴 교수는 "20년 동안 문제 되지 않았던 약에 제한을 가하라는 텍사스의 조치는 보수로 기운 연방 대법원 판사로서도 넘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었다고 평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연방 대법원의 결정을 환영하면서 "여성의 건강을 두고 정치적으로 행해지는 공격에 계속 맞설 것이다"고 했다.

현재 낙태약 문제는 항소법원으로 다시 내려가 5월 17일부터 재판을 시작한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패소한 쪽은 항소할 것이고 결국 이 문제는 다시 연방 대법원 판사 9명이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최종 결정이 나올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낙태 관련 재판 과정에서 통계가 객관적일 수 있느냐는 흥미진진한 토론을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판결이 2024년으로 넘어갈 경우 미국 대선과 맞물리며 중요한 정치적 변수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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