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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방해 세력은 여전하고 정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인터뷰] 단원고 2학년 3반 혜원씨의 아버지, 옥천 출향인 유영민씨

등록 2024.05.05 19:09수정 2024.05.05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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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민씨의 차 대시보드엔 여느 아버지의 그것처럼 단란한 가족사진과 네 남매의 어린 시절 사진이 자그마한 액자에 담겨 놓여있다. 참사 이후 촬영한 가족사진 속 혜원이는, 생전 혜원이가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다시 합성한 것이다. 환하고 밝은 표정의 사진 뒤로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문구가 보인다. ⓒ 월간 옥이네

 
2014년 4월 15일 새벽, 대리운전 일을 마친 아버지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빵과 우유를 한 봉지 가득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대리운전을 시작한 이후 네 남매를 위해 빼놓지 않던 하루 일과의 마지막 순서였다. 다음 날 아침 식탁 위에 올려둔 빵이 깨끗이 사라진 모습을 보면 그게 그렇게 행복했다. 그날도 그는 그렇게 행복을 누렸고, 또 기다렸다. 그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이어질 일상을 말이다.

당연한 일상이 깨진 지 벌써 10년. 한동안 그는 왜 평온하고 행복했던 일상이 깨져야만 했는지 묻고 또 물었다. 거리를 행진하고, 천막에서 밤을 지새우고, 비바람을 맞으며 서명을 받고, 전국 곳곳으로 때로는 바다 건너 이역만리까지 날아갔다. 우리 아이가, 우리 아이의 친구들이, 왜 그 배에 탄 304명이 돌아오지 못했는지, 국가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시민의 관심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아무 것도 밝혀지지도, 해결되지도 않은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으며 그를 다시 만났다. 4월, 고향(옥천읍 교동리)에 흐드러진 벚꽃이 여전히 괴롭다는 유영민(단원고 2학년 3반 고 혜원씨 아버지)씨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물음에 "일단은 잘 지낸다고 하는 게 낫겠다"며 웃는다. 참사 이후 꾸준히 추모 행사에 참여하고 발언하던 그가 자취를 감춘 건 2018년 이후.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전보다 핼쑥해진 모습으로 지난 세월을 돌아봤다.

"사실 그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어요. 참사 이후 진상규명한다고 몇 년을 쫓아다니다 보니 몸이 많이 안 좋아졌어요. 원래도 좋지 않았는데(그는 2000년대 초반 고관절괴사증을 진단받고 양쪽 인공관절 수술을 한 상태다) 스트레스로 체중도 많이 불고 혈압도 안 좋아지면서 한동안 쉬어야했죠."

세월호 참사와 함께 찾아온 불면증도 그대로다. 1년여 병원 상담을 받으며 좀 나아졌지만 몇 주 단위로 반복되는 불면의 밤은 여전히 고통스럽다.

'건강 적신호'로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건강 회복에 집중했다는 그는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갖는 세월호 가족끼리의 식사 모임엔 빠지지 않았다고 했다. 여전히 총대를 메고 전국을 다니며 활동을 만들어 가는 유족들에게 그 나름대로 작게나마 고마움을 표하는 길이었을 테다.


'우리가 정치인들에게 뭘 그렇게 밉보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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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사무실 공간 한편 '진실을 인양하라'는 벽화 앞에서 사진을 촬영하던 유영민·김동녀씨 부부가 오랜만에 만난 4.16 가족들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 월간 옥이네

 
- 요즘 근황에 대한 질문을 드리는 게 내심 죄송하기도 합니다. 어느덧 10주기인데, 10년을 돌아보는 마음은 어떠신가요.
 

"이제 아이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부고가 한 달에 두어 번 전해질 정도의 세월이 흘렀더라고요. 그럴 때 소식 전하고 안부 전하고... 한 달에 한 번 함께 밥 먹으며 얼굴들 보고 그렇게 지냈죠.

그만큼 시간이 흘렀으니, 사람들 머릿속에서도 많이 지워지고 잊히는 거 같아요. 속상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 역시 남은 사람들이 안고 가야 할 아픔이겠죠. 더군다나 세월호 추모공원(4.16생명안전공원) 건립1)도 계속 미뤄지고 있잖아요. 사실 저는 미뤄지는 게 아니라 '방해받고 있'는 것에 가깝다고 보는 입장입니다만... 지금도 세월호 추모 행사 때 막말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어요. 행사 현장에 확성기 달고 찾아오는 사람들이요."

세월호 참사 이후 이태원 참사, 오송 참사 등을 목격하며 그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들을 짚었다. "정치 이야기 하기 싫지만 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말이다.

"우리뿐 아니라 모든 참사가 유야무야 넘어가고 있죠. 저는 참 의아해요, 정치인들이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건지. 세월호 유가족들만 거리에 있는 게 아니잖아요. 스텔라데이지호 참사에 이태원, 오송 참사까지 많은 생명이 희생됐고 그 유족들이 거리로 나섰어요. 그런데도 막말을 하거나 추모를 방해하는 세력은 여전하고 정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요.

이게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한결 같아요. 정치 이야기 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런데 할 수밖에 없어요. 저도 예전엔 정치에 큰 관심 두지 않았어요. 나 먹고 살기 바쁘고 내 새끼 키우기 바쁘니, 투표일에 투표소 가는 것 말고는 관심을 둘 수가 없었죠. 그 때문에 지금 한국 사회가 이런 걸까요."

사고 초기부터 '우리가 정치인들에게 뭘 그렇게 밉보였나' 싶었다던 그의 의문은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무수히 많은 현장을 거치며 정치에 대한 단념으로 바뀐 듯했다. 잘못을 인정하고 재발방지대책만 제대로 만들었어도 이후의 참사는 막을 수 있었으리라는 그의 말에 깊은 한숨이 배어 있다. 딸을 잃고 지나온 10년은, 그에게 우리 정치에 대한 실망이 반복되며 쌓인 시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일반 시민의 눈높이가 높아진 것'이 희망이라고 말했다. 이 덕분에 그는 4.16생명안전공원이 반드시 건립될 거라고, 시대 흐름을 제대로 읽는 이라면 이를 막을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기도 했다.

"우리 국민들, 일반 시민의 눈높이는 엄청 높아졌어요. 학력뿐 아니라 사회적 인식이요. 요즘 가짜뉴스가 문제라고 하죠. 세월호 참사에 대한 가짜뉴스도 여전하고요. 하지만 저는 우리 시민들이 충분히 분별할 줄 안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정치권인 거죠. 정치가 가짜뉴스를 이용하고 책임 전가하고 꼬리 자르면서 문제 해결의 장해가 되고 있는 거예요. 나 같은 소시민이 이런 거 알 정도면, 다른 국민들은 이미 이 정도 의식은 다 갖추고 있는 거거든요. 제발 좀, 정치인들이 그걸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최소한 정치인으로서의 직업윤리라도 말이에요."

'이러다 쓰러지겠다' 싶을 때면 나타나던 도움의 손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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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민씨의 차 뒷유리창에 붙어있는 세월호 추모 리본 ⓒ 월간 옥이네

 
- 예전에 추모공원 설립을 이야기하면서 그곳의 관리인으로 살고 싶다고, 그래서 매일 혜원이와 아이들을 보고 싶다고 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추모공원 설립이 너무 늦어져서, 저도 이제 늙어서(웃음) 관리인으로 사는 건 어려울 거 같네요. 세월호 간담회로 동포들이 초청해주셔서 독일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2016년 12월) 그때 베를린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유대인 추모공원(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 방문했던 기억이 나요. 그곳에 발을 디디자마자 저도 모르게 숙연해졌는데요. 우리나라 사람들 표현으로 소위 '제일 비싼 땅'에 추모공원을 만든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을 추모하는 한편 나치에 복무한 스스로를 반성하는 추모공원이라고요.

그때 그 현장을 보면서 우리 애들 추모공원도 이렇게 만들어지면 좋겠다 생각했었어요. 사람들이 볼 때마다 '안전사회'를 생각하고 '생명의 존엄'을 새기는 그런 공간이요. 그때는 그게 빨리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10년이 다 되도록 삽도 못 떴을 줄이야..."

- 혜원이는 자주 보러 가시나요.

"예전에는 정말 자주 갔죠. 서울 동작구 현충원 근처 큰 절에 있는데, 안산에서 가려면 1시간씩 걸려요. 거기 혜원이 단짝 (한)세영(단원고 2학년 2반)이랑 같이 있어요. 근데 절에 워낙 행사가 많다 보니 주말에는 가기가 어려워요. 얼른 친구들이랑 한 곳에 같이 있게 해주고 싶어요. 추모공원이 가까이에 있어야 하는데..."

재난이 이토록 많은 나라에서 죽음을 추모할 일상의 공간이 없다는 건 참으로 모순적이다.

추모공원 설립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계속 연기되는 동안 애타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준 건 역시 '노란 리본'. 4월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전국의 노란 물결은 물론 길을 걷다 보게 되는 노란 리본은 그를 늘 뭉클하게 한다. '우리 사회엔 희망이 없나 보다'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눈앞에 나타나는 노란 리본이, 그는 신기하다.

"지금도 가방에 리본 달고 다니는 학생들 보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얼마 전 고향 친구들과 제주도에 다녀왔는데, 거기 렌트카에도 노란 리본이 붙어있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은 그게 눈에 안 들어와도 나는 단번에 알아보지. 정말 고맙더라고요.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에요."

참사 직후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국민 서명을 받던 때, 세월호 유족들이 전국을 다니며 만났던 시민들의 얼굴도 여전히 힘이 된다. 한여름, 어린 아이를 등에 업은 젊은 엄마가 1만 명의 서명을 받아다 준 대구에서의 기억은 그가 두고두고 떠올리는 장면 중 하나다.

"대구가 좀 덥습니까. 그 더위에 1만 명 서명을 받아다 주셨던 분을 지금도 못 잊어요. 저희가 검은색 반 티셔츠를 맞춰 입고 다닐 때였는데, 그 옷이 땀에 절어 흰색이 될 정도로 더웠거든요. 갑자기 쏟아지는 큰 비에 천막을 쳐주셨던 분도 잊을 수 없지요. 춘천인지 원주인지 어디였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오늘은 서명을 못 받겠구나' 체념하고 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큰 천막이 나타나요. 한 시민이 지나가다 비 맞는 세월호 가족들을 보고 천막을 쳐준 거예요. 더우면 시원한 물 챙겨주시는 분들이 그렇게 또 많고요. '이제 진짜 못하겠다', '이러다 쓰러지겠다' 싶을 때 누군가 와서 도움을 주고 손을 내밀어 주셨어요."

하지만 노란 물결이 더해지는 4월은, 여전히 쉽지 않은 달이다. 벚꽃이 만발하던 때 떠난 아이들, 4월이 지나면 곧 다가오는 혜원이의 생일(5월 26일). 더 없이 밝고 따뜻한 때라 더욱 사무친다.

"저희 어머니 생신이 4월이에요. 어머니 생신 때 혜원이랑 옥천에 갔다가 돌아온 후 바로 참사가 있었던 거기도 해서... 가족 행사가 4월에 있으면 그게 참 힘들더라고요. 우리 조카가 4월에 결혼을 하는데,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그게 참 서운하고... 혜원이 생일 즈음에 결혼한다는 조카도 있어서 또 서운하고(웃음). 그냥 내 마음이 그래요. 어렵지요."

힘들어도 행복했던 때, 돌아보니 '왜 더 잘해주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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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의 사진을 걸어둔 조형물. 1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 월간 옥이네

 
10년을 이어온 세월호 가족들의 외침에도 참사는 멈추지 않았다. 응답하고 책임져야 할 자들의 부재, 그는 이 고통이 '무딘 칼날에 베이는' 것 같다고 했다. 이태원 참사와 오송 참사를 '어이없는 사고'라고 표현한 그는, 이 대목에서 또 한 번 큰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요? 그런데 이 또한 책임자가 없지요. 사고가 났는데 왜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이 또 늘어났네' 싶어 더 아픕니다.

이 아픔이 참, 무딘 칼날 같아요. 참사 당시엔 날카로운 칼날 같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칼날이 더 무뎌져요. 무딘 칼날에 베면 상처가 더 아파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나아진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았으니까. 참사는 계속 되니까. 그게 꼭 무딘 칼날로 상처를 후벼 파는 것 같습니다."

- 시간이 지난다고 그리움이 작아지지 않는 것처럼요.

"맞아요. 혜원이 번호도 지금껏 살려뒀어요. 다른 사람이 그 번호 쓰는 게 싫어서... 혜원이 생일 때면 친구들이 한 번씩 문자를 보냈거든요. 사망신고는 지난해에 했어요. 혜원이 생일 앞두고 했으니 아직 1년이 채 안됐네요. 아직 (사망신고) 안 한 부모님들도 많을 거예요. 저희는 혜원이 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고 해서 아내와 상의해 정리했던 거지만요."

- 혜원이와 혜원이 동생들에게 각각 다른 미안함이 있으신 거 같아요.

"우리 애들이 참 착해요. 그런데 아내는 물론이고 애들까지 제가 고생을 많이 시켰어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계속 옥천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혜원이가 여섯 살 때까지 옥천에 살다 일자리 때문에 안산으로 올라왔거든요. 그러곤 건설 일을 하느라 전국을 다녔어요. 애들은 애 엄마가 다 건사하고 나는 한 달에 두어 번 집에 오는 정도였으니, 항상 미안했죠.

안산 와서도 진짜 힘든 시기가 많았어요. 전세 사기 당해서 집은 경매에 넘어가고, 겨울에 가스도 끊겨보고... 그 와중에 저는 다리 수술까지 하고요. 정말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렸는데, 당시 이웃들 도움으로 시 복지지원을 받으면서 조금씩 힘을 냈어요. 다리가 좀 나으면서 시작한 게 대리운전이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때였어요."

해가 떨어진 늦은 저녁부터 새벽 2~3시까지 운전대를 잡아야 했지만 더없이 즐거웠다. 새벽녘 귀가해 몇 시간 눈을 붙이고 난 후 낮 동안엔 탁송이나 기타 배송 업무를 찾아 열심히 일했다. 몸은 고됐지만 그에겐 곧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일이었으니. 네 남매의 대학 등록금은 꼭 내 손으로 마련하리라, 그런 다짐이 그를 더욱 신나게 했다.

"내가 버는 돈이 큰돈은 아니어도 애들 학비 마련한다는 생각에 힘든지 모르고 일했죠. 네 남매 다 대학 가면 한 번에 돈이 엄청 들 거라 생각하면서도 행복했어요. 대리운전 일 마치고 새벽에 집에 올 땐, 양쪽 인공관절로 5~6km씩 걸어도 힘들지가 않더라고요. 편의점에서 우리 애들 좋아하는 빵 4개, 우유 사들고 갈 생각만 하면 퇴근길이 그렇게 좋아요. 하루 피로가 다 날아갔지."

자신에겐 한 달에 단돈 만 원도 쓰지 않았지만 네 남매가 먹고 싶다는 거, 하고 싶다는 건 다 해주고 싶었다는 그.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후회가 잔뜩이라 또 마음이 아려온다.

"그때 제가 쓴 가계부를 살펴보는데... 왜 이거밖에 안 해줬을까 싶은 거야. 더 많이 해줄걸. 그땐 나름대로 애들 먹는 건 안 아낀다고 했는데도, 그래도 다시 보니 해준 게 너무 없더라고요. 어휴, 왜 그렇게 악착같이 살았나 싶어."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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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때 찍은 단체사진 속 고 혜원씨 ⓒ 월간 옥이네

 
"불현듯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때는 진짜 속이 터질 거 같아.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우리 혜원이랑 같이 있는(같은 절에 있는) 세영이 아빠(한재창씨)랑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요. 혜원이랑 세영이가 워낙 단짝이었던 터라 우리도 친해졌죠. 사실 세영이는 화성고 다니다가 혜원이랑 같이 있고 싶다고 단원고로 전학 왔던 거기도 하고요.

세영이 아빠랑 만나면 맨날 이런 얘기를 해요. 나중에 우리 애들 만나면 무슨 말할까, 애들이 우리 못 알아보면 어쩌지... 10년이 참 총알같이 지나왔어요. 그런데 돌아보니 빠르게 느껴지는 거지, 앞으로 또 10년은 엄청 길 거 아니에요? 10년 뒤, 내가 60대 중반을 넘어 칠십을 바라보고 있을 때엔 뭐가 바뀌어 있을까, 나 살아생전 그게 가능하긴 할까..."

그는 되풀이되는 참사에도 책임자 처벌은 없는 한결같음이, 10년 뒤에도 계속될까 두렵다고 했다. 10년이 흐른 후에도 이태원 참사 가족들이 지금 세월호 가족들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염려된다고 했다. 한창 하고 싶은 게 많을 청소년과 청년들이 어딘가에서 좌절하는 이야기가 계속 들려올까 걱정된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기억하는 분들이 대단하고 감사한 거겠죠. 종종 '매일 기억하지 못한다'고 미안해하는 분들을 봐요. 하지만 그러시지 않아도 돼요. 가끔이라도, 안 되면 1년에 한 번이라도 기억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런 기억이 이 땅의 비참한 사고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전한 말은 참사 당시 "내 고향 옥천 사람들이 세월호를 계속 기억하고, 그래서 옥천이 안전하고 따뜻한 사회의 시작이 됐으면 좋겠다"던 그의 바람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이 인터뷰 기사를 읽어주시는 분들께도 정말 감사드려요. 지역 잡지를 구독하시는 분들은 지역에 대한 애정이 크신 분들일 거라 생각해요. 그런 분들이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 온갖 사회적 참사와 그 희생자들을 기억해주신다면 더 고맙겠습니다."

1) 4.16생명안전공원은 세월호 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국무조정실과 해양수산부, 안산시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사업이다. 2019년 건립을 결정했지만 여러 행정절차가 지연되면서 10주기에 준공한다는 당초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 '예타 및 타재 면제 사업'인 해당 사업에 기획재정부가 예산 적정성 재검토 등을 실시하며 '사실상 사업 진행 반대를 위한 트집이 아니냐'는 논란도 불거졌다. 한편 4월 1일 <연합뉴스>·<한겨레> 등은 '안산시가 최종 예산과 설계를 확정짓고 후속 행정 절차를 거쳐 오는 10월 착공에 들어간다'고 전했다.
 

월간 옥이네 통권 82호 (2024년 4월호)
글·사진 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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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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