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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제 대통령이 우리 삶에 관심을 갖는 건가요?"

[아이들은 나의 스승] 유류세 인하를 서민을 위한 대책이라고 여기는 아이들

등록 2024.04.27 19:42수정 2024.04.27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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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물가 부담 완화를 위해 오는 12일까지 서울 전통시장 16곳에 공급되는 사과, 대파, 오이, 애호박 등에 대한 납품 단가를 지원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해당 전통시장인 10일 서울 마포구 마포농수산물시장. ⓒ 연합뉴스

 
정부가 세금을 깎아주는 걸 무조건 서민 경제를 위한 조치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설득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인들이 한목소리로 떠들어대고, 언론에서도 그들의 말을 받아쓰기 급급하다 보니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학교에서 경제 교과를 배우는 아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부가 유류세 한시 인하 조치를 2개월 더 연장한다는 뉴스에, 아이들은 윤석열 대통령이 이제야 서민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며 이구동성 말했다. 기름값이 오르면 그러잖아도 고물가인 상황이 더욱 악화하게 된다는 생각에서다. 언 발에 오줌 누기일지언정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서민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덧붙였다.

지난 총선 직전 대통령이 하나로 마트 매장에서 대파 한 단을 들고 "875원이면 합리적 가격"이라고 한 장면을 그들도 또렷이 기억했다. 먹거리 물가가 너무 올라 장보기 겁난다는 부모님의 하소연을 귀에 못박이도록 들어온 터다. 아이들은 이번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대통령이 민생에 무관심하다는 게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유류세 인하, 결국 이익 보는 사람은 누구?  

과연 유류세 인하가 민생 정책일까. 아예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시야를 조금만 넓혀보면 되레 서민 경제에 해가 되는 자충수일 수 있다. 그보단 세금을 넉넉하게 거둬 사회경제적 약자인 서민을 위해 사용되도록 하는 게 바람직한 방향이다. 무릇 정치란 국가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일일진대, 쓸 수 있는 세금이 모자라면 정치의 효능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아이들은 유류세 인하가 부유층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정책이라는 점을 쉽게 연결 짓지 못했다. 유류비 부담이 낮아지면 유류 소비가 많은 부유층일수록 혜택이 더 많아진다는 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데 말이다. 예컨대, 단순 계산해도 연비가 낮은 대형 자동차를 타는 이들이 연비가 높은 소형차를 타는 이들보다 세금 감면을 더 받게 된다. 전기 요금을 낮추면 전기를 더 많이 소비하는 이들이 혜택을 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유류세를 인하하면, 결국 정유사 등 대기업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해도 대체 뭐가 문제냐는 투다. 문제 삼기는커녕 대기업의 수익이 늘어나면 그만큼 세금을 더 내게 될 테니 모두에게 득이 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대기업이 우리나라를 먹여 살린다는 논리는 이미 아이들 사이에서도 '진리'처럼 받아들여진다.


유류세를 인하하기보다 되레 인상해서 세수를 확보한 뒤 늘어난 세금만큼 유류비 부담에 허덕이는 서민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지원하는 게 '정의로운' 방식이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는 아이들조차 그건 '이상'일 뿐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유류세 인하가 최선은 아닐지언정 차선으로서 서민을 위한 나름의 민생 대책일 수 있다고 거듭 주장했다.

아이들이 말하는 '현실'은 기성세대 못지않게 강퍅하다. 세금이 공평하게 부과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거둔 세금이 제대로 서민을 위해 쓰이지도 않는 것 같다고 말한다. 세금이 정권의 쌈짓돈처럼 오용된 사례를 뉴스로 숱하게 접해온 터라, 애초 어떻게든 세금을 안 내거나 적게 내는 게 상수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는 기실 부모 세대의 영향으로 보인다. 아이들의 '고백'에 따르면, 세금 내는 일을 두고 '남 좋은 일 하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부모도 있었고, 꼬박꼬박 낸 세금이 자신과 가족을 위해 쓰인다는 생각을 지금껏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경우도 있었다. 기성세대로부터 '세금을 제대로 낸 사람만 바보'라는 등의 푸념을 듣고 자란 아이들이 '납세의 의무'를 기꺼워할 리 만무하다.

납세 대상이 누구고 세목이 무엇이든 간에, 아이들조차 세금 인상은 나쁜 것이고, 인하는 좋은 것이라는 납작한 인식이 보편적이다. 심지어 자신들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종합부동산세나 상속세 인하를 두고도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아이들도 드물지 않다. 세대를 초월하여 세금에 대한 맹목적인 혐오가 위험 수위에 다다르고 있다.

기실 세금에 대한 혐오는 정부에 대한 불신이 워낙 강고한 탓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국민은 여야를 막론하고 선거철 전가의 보도처럼 서민을 위한 정부가 되겠다는 공약을 이제 더는 믿지 않는다. 되레 세금을 깎아주겠다거나 지원금을 지급하겠다는 말에 혹할 따름이다. 하다못해 대출받은 돈의 상환 일자만이라도 늦출 수 있다면 표를 주겠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내내 화두된 '공정', 따져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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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2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장성 진급·보직 신고 및 삼정검 수치 수여식에 입장하고 있다. ⓒ 연합뉴스

 
부유층일수록 더 유리한, 이른바 '세제의 역진성'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아이들을 설득해내기가 너무 벅찼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지 않는 한 세금에 대한 혐오를 불식시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만 확인했을 뿐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부터 지금껏 사회적 화두가 된 '공정'이라는 것도 애초 신뢰의 기반 위에서 따져볼 가치다.
 
"유류세는 세수 확보를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유류 소비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임박한 기후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선한' 세금이다."


설득을 위해 논의의 방향을 틀었지만, 이마저도 소용이 없었다. 유류 소비를 줄여 기후 위기에 대응한다는 논리도 먹히지 않았다. 아이들은 역시나 전가의 보도처럼 '현실'을 반론의 근거로 삼았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하면, 더는 대화가 진전되지 않았다. 수십억 인구의 중국도, 인도도 저러고 있는데, 우리만 줄인다고 해결되느냐고 반문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유류세를 인하하면, 유류 소비를 억제하는 효과를 반감시킬 게 뻔하다. 이는 기후 위기를 초래하는 주범인 화석 연료의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세계적 추세와 거꾸로 가는 정책이다. 학교에선 기후 위기의 원인과 폐해에 대해 가르치고, 정부는 기후 위기를 방임하는 정책을 쏟아내는 '이율배반'에 아이들도 배움과 실천은 무관한 것이라며 순응하고 있다.

기후 위기는 멀고, 불편함은 가깝다. 아직 기후 위기는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것이고, 불편함은 당장 일상에서 '겪는' 것이다. 눈앞의 불편함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설파해 봐야 '공자님 말씀'으로 여겨질 뿐이다. 그들만의 문제는 아닐 테지만, 인식과 행동의 '관성'은 편리함만을 추구하고, 다른 '관점'을 떠올리지조차 못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우리 학교 주변 등하굣길 왕복 2차선 도로는 매일 꽉 막힌다. 자녀를 태운 학부모의 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다. 비나 눈이 올 때는 평소 5분 거리인데 30분 넘게 걸리기도 한다. 경찰까지 나서서 교통 지도를 벌이고 있지만, 만성적 교통 체증이 풀릴 기미가 없다. 이를 해결할 근본적인 대책을 물었다. 놀랍게도, 아이들은 답변은 한결같았다.

"도로를 더 넓히면 되죠!"

이 답변도 물론 예상했지만, 소수일지언정 상반된 여러 주장이 함께 나올 것이라 봤다. 이를테면, 등하교 시간의 대중교통을 확충한다던가 차량 수를 줄이기 위해 통행세를 징수하는 방법, 수능일처럼 자가용 승용차의 통행을 통제하는 등 대책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더 바란다면, 차량 운전자에게 불편함을 가중시켜 스스로 운전대를 놓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이야기가 자유롭게 오갈 줄 알았다.

부모님 차량으로 등하교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다 보니, 차량의 증가는 '고정 상수'였다. 그러다 보니 도로를 넓히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거다. 이번에 그들이 말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은 어느 누가 자동차의 편리함을 마다하겠느냐는 것!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나만 안 탄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을뿐더러 나만 손해 볼 수 없다는 거다.

"선생님은 유류세 인하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인도와 자전거 도로를 확충하는 등 자가용 승용차의 통행을 불편하게 하는 게 맞는다고 본다."

아이들이 내 주장에 동의할 때가 과연 오기는 할까. 비록 그들을 설득하진 못했지만, 세수가 바닥나 정부의 행정이 삐걱대고 기상 이변에 혼란이 거듭되면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당장 먹기에는 곶감이 달다지만, 조금 멀리 내다보고 심사숙고한다면 모두가 기꺼이 동참할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면 정부와 교육의 신뢰부터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겠다.
#유류세인하조치연장 #민생대책 #세수감소 #종합부동산세인하 #기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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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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