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연금개혁, 문제는 64세가 아니다.

무대 뒤의 검은 연출자, 블랙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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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정(anouck)등록 2023.03.22 16:32
프랑스 의회는 현지 시각 3월 20일 저녁 정부 탄핵(이 글에서는 탄핵과 정부 불신임을 혼용해서 쓰고 있는데 하나로 통일하는 게 좋겠습니다)을 위한 표결을 앞두고 있다. 연초부터 뜨겁게 정국을 달구던 프랑스의 연금 개혁안 최종 국회 논의를 앞두고 있던 지난 주 목요일, 총리 엘리자베 보른이 국회 표결을 생략하고 헌법 49조 3항을 발동시켜 법안을 채택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정부 탄핵의 화살이 당겨졌다.           

프랑스 경제 활동 인구의 93%가 반대하는(출처) 이 법안을 정부가 완력으로 밀어붙이겠다고 발표한 순간 국회는 물론 프랑스가 발칵 뒤집어졌다. 고교생부터 노인들까지 전세대 걸친 수백 만의 시민들이 함께 해온 반대 집회의 규모는 지난 15년 동안 있었던 대중 집회 중 최고 수위였다.  

10여 일 넘게 지속되던 파리 쓰레기 수거 노동자의 파업도 기꺼이 감내하던 시민들이었다. 보른 총리의 발표는 이토록 명백한 국민의 목소리를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우롱하는 노골적 독재 선언이었다.

총리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의회가 법안을 부결시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헌법  49-3조 국회가 이 결정에 반대할 경우 정부를 불신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법조항인데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게 모호하네요). 국회의원 과반수가 정부 탄핵에  동의하면 총리 이하 모든 내각이 사퇴하고 해당 법안은 자동적으로 부결된다.

반민주적 헌법 조항 49조 3항  

마크롱 2기 정부를 겪고 있는 프랑스인들에게 악몽이 되어버린 헌법 49조 3항은 1958년 드골의 5공화국 출범시 헌법에 삽입되었다. 정부는 긴급한 결정을 필요로 할 때, 국회 표결을 거치지 않고, 법을 발효시킬 수 있다는 놀라운 조항이다.

당시 알제리와 전쟁 중이던 혼란 상황에서 다시 한 번 국가 운영을 맡게 된 드골은 약화된 정부에 강한 힘을 싣기 위해 이런 위험한 조항을 마련했다. 그동안 9개의 정부에서는 한 번도 이 조항을 사용한 적이 없었고, 미테랑 2기 정부 때 로카르 총리가 남용(28회)했던 것을 제외하면 제한적으로 이용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어떤 각도에서 보아도 3권 분리의 원칙을 무시하는 반민주적 조항이기에, 이를 사용하는 정부는 시민들과 의회의 강한 반발을 사고 정국을 급냉각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크롱 2기 내각의 엘리자베 보른 총리는 정부를 운영하게 된 지 10개월 만에 무려 11번째로 이 조항을 사용했다. 16일 그녀가 누른 11번째 버튼은 시민들의 분노를 끓어 넘치게 한 마지막 한 방울이었다는 평이 나온다.  

총리가 49조 3항을 사용할 때마다 야당에선 즉각 정부 불신임 표결을 제안하였으나 통과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 어느 때보다 통과 가능성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말이 좌우 언론에서 나온다(우리 시각으로 오늘 자정 넘어 결과가 나올 것 같은데 부결 가능성이 크다는 보도도 많이 나오는데...).  

일단 불신임안을 발의한 정당이 LIOT라는 이름의 중도 신생 정당이라는 사실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는 극우정당 RN 혹은 좌파정당 연합 NUPES가 이를 주도해왔다. 그들은 마크롱 정부에 반대한다는 점에선 일치하나 정치 지형상 대척점에 있기에 서로의 발의안에 동의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고, 이것이 정부 불신임안을 통과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어왔다.  

LIOT는 중도 우파의 정치색을 띤 신생 정당으로, 좌파, 중도 우파, 해외령의 독립주의자들 등 다양한 색깔로 구성된 소수 정당이다. 이들이 이번 정부 탄핵안을 주도하면서 각 정당들이 함께하는 것이 덜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다. 중도 정당이 명백한 반 정부 노선의 깃발을 들었다는 사실 또한 전세가 기울었음을 보여주는(부결 가능성 크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중요한 신호이기도 하다.

어느 때보다 뜨거운 국민 여론도 탄핵 성공을 점치게 해주는 요인이다. 보른 총리의 11번째 49조 3항이 국회에서 발표된 날 국회 앞 콩코드 광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예고없이 모여들어 "파리여 봉기하라"를 외쳤다. 다음 날엔 마크롱 형상의 모형을 불태우는 의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경찰은 강도 높은 과잉, 폭력 진압으로 대응했고, 2세 전 루이 16세를 처형했던 바로 그 광장에는 시민들의 분노가 끓어 넘쳤다.

총리의 49.3  발언 직후 실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78%의 프랑스인들이 이번 정부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며 71%의 프랑스인들이 정부 불신임안이 채택되길 바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20일로 정부 불신임 표결 날짜가 잡힌 후 모든 이의 눈길은 공화당으로 쏠린다. 공화당 대표 에릭 시오티의 '공화당은 정부 불신임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는 발표가 무색하게 공화당에서는 시시각각 당론 이탈을 선언하고 시민들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원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62명 공화당 의원들의 소셜 미디어 계정에는 주말 내내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 닫은 정부를 날리기 위해  꼭 투표해 달라는 요청이 줄을 이었고,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 공화당 의원 25명의 명단이 SNS에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들을 종용, 협박, 회유해줄 것을 서로에게 당부하기 위해서다. 탄핵을 위해선 공화당 의원들 25명의 표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 <연합> 보도에선 30명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고 나오네요).

국회에서 정부 탄핵안이 통과되면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는 것으로 맞설 수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미 그런 일이 발생하면 국회 해산으로 맞서겠다는 엄포를 한 상태다. 그리 된다면 당장 총선을 다시 치러야 한다. 공화당 의원들 귀에 '당신들이 탄핵에 동참하지 않으면 재선은 없다'는 유권자들의 '협박'이 당 대표의 발표보다 더 크게 들릴 수 있는 이유다(그렇다면 공화당 의원들은 탄핵 찬성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유리한 것 아닐지요).  
 
2년 더 일하는 게 뭐가 문제?

그동안 언론은 프랑스 연금 개혁의 핵심을 정년을 62년에서 64년으로 늘이는 것으로 압축해 설명해 왔다. 평균 수명이 늘어났으니 좀 더 일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나? 그러나 언론이 내세우는 말과 현실에는 뼈아픈 격차가 있다.

프랑스인들의 2022년 평균 수명은 82.3세다(여성 85.2세, 남성 79.3세). 10년 전보다 0.5년 정도 늘었으나 큰 변동은 없는 수준이다. 평균 수명이 해를 거듭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것은 아니므로 그것이 다가올 연금 금고 적자의 치명적 원인일 순 없다는 것이 노동조합 측 설명이다. 출생률이 줄어 인구 절벽이 예상되는 상황도 아니다. 2022년 프랑스의 출산율은 1.8로 지난 20년 동안 비교적 안정적이다.

더구나 평균 수명은 빈부 격차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비극적 현실도 간과되었다. 상위 5% 부유층과 하위 5% 빈곤층의 평균 수명의 격차는 무려 13년에 이른다. 부자들은 훨씬 더 오래 살며 연금을 길게 받지만, 일용직 노동자들은 뼈 빠지게 일할 뿐 제대로 연금 수혜도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국제적인 빈민구호단체 옥스팜의 프랑스 지부는 프랑스의 억만장자(억만 유로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사람) 42명에게 최대 2%의 세금만 물려도 앞으로 연금 공단이 지게 될 부채는 채워질 수 있다는 계산을 내놓은 바 있다.

빈부 격차가 날이 갈수록 극심해져 가는 지금, 부자들에게 좀더 과세하는 대신 노동자들에게 더 길게 일하고, 더 오래 분담금을 내게 하는 것이 유일한 해법인 양 제시하는 정부는 이례적 인플레이션과 축소되어 가는 공공 서비스(병원, 교육, 교통 등)로 고통받는 시민들에게 더 큰 저항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정부는 이번 개혁이 빈곤층을 위해 설계됐다고 설명하며 월 최저 임금의 85%인 약 1200유로(한화 약 160만 원)의 연금 최저선을 보장하겠다고 선전하기도 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이는 43년의 노동 시간을 다 채운 사람에 한해서만 적용되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62년에서 64년으로 연장된 은퇴 시기는 다시 말하면, 41년을 꽉 채워 일해야 연금을 꽉 채워 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이젠 43년을 일해야 받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21살에 사회 생활을 시작하고, 은퇴할 때까지 한 번도 실업 상태에 놓이지 않은 운 좋은 사람은 64세에 이르러 연금을 전액 탈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21살부터 한 번의 공백도 없이 43년간 줄기차게 일하진 않는다.  

프랑스 정부는 곧 연금 기금이 적자로 돌아설 것이며 이에 대비하기 위해 개혁이 불가피하다고도 역설한다. 어느 나라에든 돌아다니는 연금 괴담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부가 늘어놓은 가장 명백한 거짓말이다. 그들의 말과 달리 연금 기금은 2021년과 2022년 각각 9억 유로와 32억 유로 흑자를 기록했으며, 현재 기금이 보유하고 있는 여유 자금은 1300억 유로에 육박한다(출처).

COR(총리 직속 공공기관, 연금 방향을 논의하는 전문가 그룹)에 따르면 연금 시스템은 2032년부터 적자로 돌아설 수 있으나, 이것이 정부가 말하는 것처럼 통제되지 않은 지출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장기적으로(2070년까지) GDP에서 연금 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은 14.7%(오늘날의 경우)와 12.1% 사이에서 안정적으로 운용될 수 있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가능한 적자의 시나리오는 지출의 증가라기보다 수입의 감소로 인해 찾아올 수 있다고 노동조합들은 설명한다. 노동자들의 수입이 점진적으로 줄고 있기 때문이며 그 원인 제공자는 바로 정부다. 정부가 긴축을 내세우며 공공 부문의 인력과 임금을 급격히 축소하기 때문이다.  
 
연금 개혁의 설계자, 최대 수혜자는 블랙록?

그렇다면 왜 프랑스 정부는 국민들과 이토록 심한 갈등을 빚어가며 기어이 연금 개혁을 무리하게 완수하려는 것일까? 많은 시민들은 그 이유를 짐작한다. 2019년 가을부터 연금 개혁을 위한 판을 벌였던 마크롱 정부가 3년간 판을 접었던 것은 코로나 때문이었다. 코로나가 대략 마무리되자 그는 다시 판을 시작했다.

2019년 당시 집회장에 가면 언제나 볼 수 있었던 것이 까마귀 떼로 분장한 블랙록이었다. 이 집요한 연금 개악의 추진에는 블랙록이란 집단의 입김이 있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는 신호였다(누가 대중에게 알린다는 것?).  

블랙록은 뱅가드, 스테이트 스트리트와 함께 전세계 자산관리 시장의 빅3로 꼽히는 회사며 이들이 관리하는 자산은 15조 달러(중국의 GDP에 해당하는 규모), 이중 블랙록이 관리하는 자금만 7천 조 달러(세 개 합친 것보다 더 큰?)에 달한다.

2006년 프랑스에 상륙한 블랙록의 프랑스 지사장은 이미 2013년 올랑드 정권이 연금 재정 개혁을 추진할 당시부터 "연금은 블랙록의 핵심 주제"라 밝힌 바 있다.

블랙록 대표 래리 핑크는 2017년 6월 마크롱 취임 직후  엘리제궁을 방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블랙록의 임원들 20여 명과 자산관리사들이 엘리제궁을 다시 찾았다. 그 자리에서 정부는 샤를 드골 공항, 프랑스 로또사 같은 초대형 공공기업들의 민영화를 약속한다. 같은 해 10월 정부는 공공행동위원회 2022이라는 전문가 그룹에 국가 개혁 작업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블랙록 프랑스의 대표 장 프랑수아 시렐리그도 그 멤버 중 하나였다.

이렇게 정권 초부터 촘촘한 관계를 이어오던 그들은 마침내, 2019년 구체적인 작업에 착수한다. 블랙록이 프랑스 정부에 연금 계획의 "세 번째 카테고리" 즉 자본시장화를 도입할 것을 촉구한다는 내용을  발표한 것이다. 민간 금융기관에 프랑스 연금 시스템의 한 축을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기본 연금 이외에 추가적 민간 기업에 연금 관리를 맡기게 하는 추가적 연금 보험을 반강제로 들게 하는 안을 제안했고, 정부는 이들의 안을 수용한다.   

블랙록 사이트에 버젓이 실려 있는 이들의 대 프랑스 정부 로비 자료에는 이런 제목이 붙어 있다. PACTE법(기업의 성장과 변화를 위한 행동플랜법: 현명한 은퇴 계획). 이들의 제안은  재경부 장관의 발의로 2019년에 법으로 채택됐다. 2023년 법개정을 위한 기본 발판이 이렇게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 사이  블랙록은 프랑스 40대 기업의 핵심 주주가  됐고, 이들은 프랑스 40개 기업중 최소 18개 기업(BNP은행, 보험사 AXA, 르노, 토탈 정유, 소시에테 제네랄 은행, 부이그 텔레콤 등)의 상당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그들이 큰 소득을 취할수록, 블랙록이 취한 배당금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블랙록이 노리는 것이 단지 프랑스 시장만은 아니다. 2019년 11월 공공 및 민간 은행가, 경제학자 및 유명 인사가 함께 모인 국제 싱크 탱크 "Group of Thirty"는 국제적 규모의 연금의 미래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퇴직 연령 연장, 민간금융시장 의존도 증대, 연금 소득 대체율(연금으로 지급되는 소득의 비율) 감소를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연하게도 전세계 연금 공단들을 뒤흔들 하나의 모델이 여기서 탄생한다.  

유럽연합에서의 로비는 이미 결실을 맺어, 2019년 6월 유럽연합은 범유럽 개인 연금 상품 (PEPP)을 승인한 바 있다. 이 상품의 목표는 명확하다. "연금이 민간 자본 시장에 더 많이 투자하면 인구 고령화와 저금리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결국 연금 개혁이라 이름 붙은 개악의 실제 의도는, 현재 연금 공단의 벽을 헐어, 민간 금융 회사들에 나눠주는 것, 즉 연금의 민영화, 금융자본주의를 위한 더 많은 먹잇감 확보에 있다. 그것이 야당들과 노조들이 파악하여, 시민들 귓속에 들려준 이야기다.  

* 이번 프랑스 연금개혁안 내용에 블랙록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조항이 있나요? 이 글만 봐서는 이번 연금개혁안과 블랙록과의 연결고리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주류 미디어의 방해 속에서도 다행히 그 이야기들은 시민들의 귀에 가 닿았고, 월요일 저녁 의회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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