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귤껍질 버리지 마세요, 감미로운 겨울 향이 퍼집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의 온기를 책임져주던 감귤차

등록 2020.12.04 16:07수정 2020.12.05 16:42
1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1월 마지막 공주오일장이 선 '과일상 골목' 풍경이다. 공주오일장은 매달 1일과 6일마다 선다. ⓒ 박진희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사과와 귤이 과일상 매대를 차지하고 있다. ⓒ 박진희


장날마다 과일상들이 몰리는 골목에 들어서면 그리도 좋다. 화려한 색감과 달콤한 향내를 풍기는 그곳에 들어서면 "과일, 맛보세요" 상인들의 목청 높인 호객 소리에 장 보러 나온 손님들이 흥정하는 모습까지 보태져 늘 활기가 넘치기 때문이다.

날이 쌀쌀해지면서 시장은 철 지난 단풍을 대신하듯 울긋불긋한 사과와 귤이 점령 중이다. 특히, 모처럼 등장한 붉은 망에 담긴 밀감은 정겨운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유명세 자자한 그 과일, 덥썩 집고 싶었지만 
   

재래시장에서 '이스라엘 스위티'라고 불리는 수입 과일이 팔리고 있다. ⓒ 박진희

'샤인머스캣'은 칠레산 포도보다 알이 크고 씨가 없으며, 망고 맛이 나서 인기가 좋은 과일이다. ⓒ 박진희

  
과일상이 몰린 골목 모퉁이를 돌아 몇 걸음 더 걸어가니 사뭇 분위기가 다른 과일가게가 보인다. 카드 결제가 가능하단다. 흔히 보이는 사과, 귤 말고도 수입 과일인 '스위티'도 팔고 있다. 그리고 판매대 대부분을 차지한 과일 '샤인머스캣'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친절하신 과일상 아주머니를 통해 이름만 들어서는 수입 과일로 여겨질 법한 '샤인머스캣'에 대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었다. 

한 박스에 2만 5000원의 가격이 매겨진 '샤인머스캣'은 망고 맛이 나서 '망고포도'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일본에서 만든 청포도 종으로 주로 상주, 영천, 진주 등 아랫녘 농가에서 하우스 재배를 하고 있단다.

알이 크고 씨가 없어 인기가 좋다 보니 백화점에서는 6만 원이나 하는 고급 과일인데, 코로나19로 수출길이 막혀서 내수 시장에 막 풀리고 있단다.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 송이에 2만5000원이나 하는 과일을 선뜻 사 들고 올 수가 없었다. 
 

하우스 딸기 가격이 비싸기는 하지만, 이 계절에 벌써 딸기가 팔리고 있다. ⓒ 박진희

 
며칠 뒤, 농협하나로마트에 가보니 하우스 딸기와 수박이 '떡'하니 나와 있다. 잠시 놀란 가슴은 매겨진 가격을 보고는 더더욱 요동쳤다. '입덧 심한 임산부라면 모를까 이렇게 비싼 걸 사 먹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문이 든다. 한편으론 지난봄, 끝물 딸기를 싸게 사다 겨우내 먹을 생각으로 팔목 시리도록 딸기잼을 만들던 날을 되짚으니 허무하기도 했다.

마음먹고 나온 김에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인근 기업형 마트에 들러봤다. 공주오일장에서 본 '샤인머스캣'이 카드 할인가 1만 9800원에 팔리고 있었다. 단순 계산을 해도 포도 한 알에 400원이나 한다. 갈등이 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장날 본 것보다는 싸니까...' 애써 핑곗거리를 갖다 붙이고, 눈 딱 감고 한 박스를 카트에 넣었다. 3.5kg 제주 밀감 한 박스도 50% 할인 가격에 사서 함께 담았다.

아삭하니 달달한 '샤인머스캣'은 이틀을 못 가 동이 났다. 예견된 일이었지만, 식구들한테 인기가 너무 좋았다. 그렇다 보니 몇 날 며칠 디저트는 함께 사 온 제주 밀감이 차지했다. 며칠을 손톱에 노란 물이 들도록 귤을 까먹자니 문득 어릴 적 추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추운 겨울,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던 감귤차

70~80년대에 귤은 자주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었다. 겨울이면 집집마다 상점마다 난로 위에 큰 주전자 올려 물을 끓였다. 물이 끓으면 귤껍질을 주전자에 넣고 차로 우려 마셨다.

차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나오는 뜨거운 김은 겨울철 건조한 공간의 습도 조절을 담당하는 가습기이자 방향제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때로는 아버지 땀 찬 발의 역한 냄새도 없애주고, 지친 발의 피로도 풀어주는 족욕물로 쓰이기도 했다.  
 

농약 걱정으로 베이킹소다와 굵은 소금으로 감귤 껍질을 문지르다 식초 탄 물에 잠시 담가 두었다. ⓒ 박진희

 

감귤 껍질까기 귤을 까먹으면서 남겨진 껍질을 모아둔다. 귤 껍질은 거름으로 이용해도 좋다. ⓒ 박진희

 

먹기에는 껍질 얇은 밀감이 좋지만, 차를 끓여 마실 생각이라면 껍질이 도톰한 대과를 골라야 할 것 같다. ⓒ 박진희


뜬금없이 소환된 옛 기억에, 농약 걱정 때문에 수십 년 동안 잊고 지내던 감귤차를 만들어 봤다. 레몬청, 자몽청, 청귤청을 만들어 마시니, 같은 방법으로 세척하면 좀 더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굵은 소금으로 빡빡 문대고, 식초물에 잠깐 감귤을 담가 두었다. 한결 마음이 놓인다. 세척 후 감귤 껍질을 벗겨 가급적 가늘게 채를 썰어 채반에 널었다. 껍질 얇은 감귤을 사온 터라 크게 기대는 안 했는데, 2~3일 말린 후에 생강편 몇 조각을 넣어서 끓이니 제법 집안 가득 좋은 향이 퍼지고, 빛깔 고운 찻물이 우러나왔다. 

농가에서 고소득 작물로 재배하는 샤인머스캣, 하우스 딸기, 하우스 수박은 역시 내 깜냥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분수에 맞지 않게 샤인머스캣으로 사치를 부리다 추억 속 감귤차를 수십 년 만에 마셔보게 되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포도 못 딴 여우가 "저 포도는 시고 맛이 없어!" 푸념 조로 내뱉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겨울엔 역시 속 뜨시게 하는 게 최고인 것 같다.

하우스 농사나 품종 개량으로 제철 과일보다 몇 배는 비싸고 색다른 맛이 나는 과일이 아니더라도, 감귤차 한 잔이면 긴긴 올겨울을 무난히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오일장이 열리는 날에는 친절한 '샤인머스캣' 파시던 아주머니께 맛난 밀감으로 한 박스 골라 달라고 부탁해 봐야겠다.
덧붙이는 글 충청남도청에도 송부한 기사이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AD

AD

인기기사

  1. 1 윤석열 킹메이커들
  2. 2 셀트리온 치료제, 전문가들에게 물었더니... "한국은 다를 수 있다"
  3. 3 중학생 딸 폰에 저장된 연락처 '좀 급한 듯'... 뭔가 봤더니
  4. 4 53세 남자가 보내온 그 사진... "이게 현실, n번방 없어지겠나"
  5. 5 미국을 더 처참하게... 트럼프는 모든 게 준비돼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