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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안에게 고문당해 피부가 거북이 등처럼 갈라졌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대구유족회 조사부장 이복녕의 삶

등록 2020.10.24 11:59수정 2020.10.2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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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 철문이 '쾅'하고 닫히더니, '뚜벅뚜벅' 구두 발자국 소리가 났다. 형사 3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온 이에게 90도 절을 했다. "상무님, 오셨습니까?" 상무로 불린 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172cm의 보통 키였지만 90kg이 나가는 그는 인상 자체가 험악했다.

상무는 갖고 온 007 가방을 열었다. 거기에는 전기고문 등 여러 고문기구가 있었다. 그는 두꺼운 입술을 열며 "네가 이복녕이냐?"라고 물었다. 이복녕이 대답을 머뭇거리자 상무는 "이 새끼가 대답을 안 하네"라며 떡두꺼비같은 손으로 이복녕의 뺨을 때렸다.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이복녕이 나가떨어졌다.

겨우 뺨 한 대 맞았을 뿐인데, 지하실 천장에 별이 반짝이고 뺨이 얼얼했다. "옷 전부 벗어"라는 사내의 말에 이복녕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 자의 명령을 거부했다간 뼈도 못 추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무의 지시를 받은 형사들은 팬티만 입은 이복녕을 밧줄로 묶고 난로 옆에 앉혔다. 난로 바로 옆은 절절 끓었다. 5분이 지나자 상무가 고갯짓을 했다. 형사들은 이복녕을 끌어내어 옥상으로 데리고 갔다. 1983년 12월 경북도청에 위치한 경북도경 대공분실 옥상은 영하 10도를 오르내렸다.

옥상에서 5분이 지나자 다시 지하실로 데려와 난로 옆에 5분간 앉혔다. 이렇게 하기를 십여 차례 했다. 그러자 이복녕의 피부는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면서 피가 흘렀다. 나중에는 온 몸이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쓰라린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상태가 됐다.

고문기술자 이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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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9년 1월 구속이 결정된 이근안 전 경감이 성동구치소로 이송되기 전 수원지법 성남지원에서 자신의 심경을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진 피부에서 흐르는 피로 온 몸이 걸레 조각이 된 이복녕에게 고문은 계속됐다. 손과 발을 묶어 그 사이에 봉을 끼우는 일명 '통닭구이 고문'도 가해졌다.

상무라는 자의 고문기술은 다양했다. 그의 특기는 관절 뽑기였는데 멀쩡한 사람의 뼈를 해체하는 것이다. 팔꿈치 안쪽에 각목을 끼우고, 팔을 힘껏 안쪽으로 밀어버리면 관절이 뽑아지는데, 이를 '관절 뽑기 고문'이라 한다. 갈빗대가 뽑히는 고문을 당한 이복녕은 숨도 못 쉴 정도로 고통스러워 했다.

이복녕을 장난감 다루듯이 고문한 이는 다름아닌 이근안 경감이었다. 이근안은 1958년부터 1962년까지 공군에서 복무하다 경찰이 되었다. 가명은 김철수, 별칭은 박중령, 불곰, 반달곰이었다. 1972년 8월 치안국 대공분실 형사가 됐으며 1974년 7월 경기도경찰청 대공분실로 발령받은 그는 이른바 '고문기술자'로 이름 날렸다.

그는 고문 과정에서 '상무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었으며, 간첩과 용공분자 조작 전문가로 정평이 났다. 그는 소속이 경기도경찰청이지만 간첩 및 용공조작사건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 출장을 가는 '전문 고문기술자'였다. 그는 1985년 민청련 의장 김근태를 고문한 혐의로 수배됐고, 10년간 도피생활 후 1999년 자수해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이근안은 1983년 당시로는 생소했던 성고문을 했다. 피의자의 아내와 딸을 대공분실로 데려와 면회를 시켜준다며 데려와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피의자를 보여줬다. 그들은 수치심으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성적 폭언도 다반사였다.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네 ○○을 ○○해 버리겠다." 1983년 12월 경북도경 대공분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1983년 9월 발생한 대구미문화원 폭파사건 피의자들은 이렇게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했다. 한국전쟁 시기 불법학살된 민간인 유족들의 단체였던 대구유족회 조사부장이었던 이복녕도 이 사건으로 구속돼, 1985년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1년을 받았다. 이복녕은 훗날 2018년 대구지법에서 진행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2대 악법 반대투쟁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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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구유족회 조사부장 이복녕

 1961년 3월 14일 대구시 종로에 있는 사회당 경북도당 사무실에는 의자가 부족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사회당 경북도당 위원장 백기만과 주요 당직자, 통일사회당, 사회대중당 등 혁신정당과 민민청, 민자통, 교원노조, 피학살자유족회, 대구시내 고등학생과 대학생 간부 들이 참여했다.

'2대 악법(데모규제법과 반공임시특례법) 반대 경북공동투쟁위원회' 창립에 관한 회의였다.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장면 정권에 반기를 든 것이다. 경북유족회는 여기에 적극 참여했다. 이날 회의에서 경북유족회 권중락(총무)은 지도위원에, 이복녕(원호부장)은 재정위원에, 김현구(대의원)는 동원부원에 선임됐다.

2대악법반대공동투쟁위원회는 선전삐라를 배포하고,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할 것을 결정했다. 경북유족회는 유족회 명의로 투쟁비 18,000환을 납부하고, 대구시내에 시민대회포스터를 부착했다. 또 유족회는 1961년 3월 21일 대구역전 광장에서 열린 '2대악법반대투쟁대회'에는 '상기하라 대학살! 철회하라 2대 악법!'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참가했다.

이날 시위에는 만여명이 참석했는데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였다. 대회가 끝나고 오후 5시부터는 거리행진이 있었다. 시민들은 대구역전에서 덕산동에 있는 전 법무부장관 조재천 집까지 행진했다. (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한국혁명재판사』, 1962)

민간인학살 추정지, 대구 22곳 발굴

경북유족회는 왜 '2대 악법 반대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까? 유족회가 요구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4.19 이후 들어선 장면 정부가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반공임시특례법은 유족들의 주장을 무력화시킬 수 있어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대구유족회 조사부장이자 경북유족회 원호부장 이복녕은 1960년 4.19혁명 직후인 6월 초순경부터 '피학살자 유족회' 활동을 했다. 대구유족회와 경북유족회 창립부터 '경북지구 합동위령제'에 이르기까지 적극 참여했다.

1960년 8월 20일 대구시 동성로에 있는 경북유족회 사무실에서 '합동묘건립위원회'가 구성됐다. 한국전쟁 때 발생한 민간인 피학살자의 유해를 발굴해 합동묘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유족회는 그 해 9월 초순부터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시 수창동, 지묘동, 송현동, 본리동, 만촌동 등 22곳을 발굴했다. 또 대구 시내 일간지에 '합동묘비 건립취지서' 광고를 내고, 정부 각 기관과 지역유지들을 면담해 건립기금을 모금했다. 이복녕은 이같은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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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된 이병옥

 이복녕의 아버지 이병옥(1912년생)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7일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예비검속돼 경북 달성군(현재 대구 달성군) 가창골에서 학살됐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보고서』)

달성군 하빈면 동곡리 출신의 이병옥은 교남학교를 졸업하고 영남일보 기자를 거쳐 대구운수노조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 대구 10월 항쟁에 참여한 그는 대구 동촌으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10월 항쟁 주도자들은 향후 거취를 논의했다. 

화학노조 서기였던 이일재(1923~2012)는 보현산으로 입산해 빨치산 투쟁을 벌였고, 이병옥은 귀가했다. 이병옥은 1949년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에 강제적으로 가입되었고, 전쟁 발발 직후 가창골에서 학살됐다.

이일재의 생전 증언에 의하면 대구운수노조는 황태성(1906~1963)과 이병옥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운수노조는 지게꾼과 하역노동자로 구성되었고,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소속으로 대구 10월 항쟁의 주요 동력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이병옥의 조카 이○○은 "삼촌이 남로당에 가입된 일로 전쟁 전 형무소에 몇 차례 다녀온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이런 경력 탓에 이병옥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었고, 이후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불법 학살 당했다.

아버지와 두 아들이 참여한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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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녕의 장남 이성번

 "빠방"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매캐한 냄새가 광장을 감쌌다. 최루탄이 터지자 시위 대열은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청바지를 입고 '화이바'를 쓴 백골단이 시위대를 향해 돌진했다.

단상에 있던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구경북지부 공동의장 이복녕은 사수대의 보호를 받으며 피신했다. 이복녕은 몸을 피하면서도 뒤를 몇 차례나 돌아봤다. 장남 이성번(영남대 생물학과 81학번)과 차남 이○○(대구대 중문학과 86학번)의 신변이 걱정되어서다.

두 아들은 1986년 초 민통련 대구경북지부가 주최한 집회에 아버지 이복녕과 함께 참가했고, 특히 차남 이○○은 집회 사수대로 있었기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복녕(1929년생)은 경북 성주군 월항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농업에 종사하다가 한국전쟁을 맞았다. 전쟁 초기 아버지 이병옥이 학살당한 후 그는 군경에 쫓기다가 친척의 도움으로 경찰에 들어갔다. 1951년 3월경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순경으로 근무하다가, 1953년 4월경 육군에 입대, 1958년 헌병하사로 제대했다.(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한국혁명재판사』, 1962)

한국현대사 연구자들은 이복녕이 경찰에 들어간 것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그 이력 때문에 이후 피학살자 유족회 활동과 민주화운동에 평생 몸 바친 의미가 퇴색될 수는 없다고 평가한다.(노용석, 부경대 국제지역학부 부교수)

그는 1960년 4.19혁명 직후 대구유족회와 경북유족회 간부로 활동하다가 1961년 5.16 쿠데타로 '혁명재판'을 받게 되었다.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고 5년 만에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는 대구시 중구 덕산동에서 고서전문점인 '문림서점'을 운영했고,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69년에 소위 '김태구 사건'으로 구속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이 선고되었으나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았다.

이후 이복녕은 1990년 '민자통(민족자주평화통일)' 대구경북협의회 공동의장과 1991년 대구경북민족민주운동연합의장, 2003년 대구경북통일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2007년 작고할 때까지 그는 대구·경북지역 민주화운동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의 장례는 대구·경북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민주통일인사 이복녕선생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조문객은 3천여명에 달했다. 1960년 '피학살자 유족회' 간부를 맡은 이 중에 초심을 잃지 않고 평생을 민주화운동에 몸 바친 드문 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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